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244화 (244/275)

244. 황태자의 첫사랑

연은 가정교육보다 학교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차별과 혐오, 갈등이 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묻는 문식이에게 연은 이렇게 답했다.

'집에서 차별받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가족이잖아.'

-가족?

'부모에 따라 자식을 차별할 때도 있고 그로 인한 갈등도 있겠지. 하지만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끼리 혐오하는 것 봤어?'

-음···.

'그런데 학교는 어때? 너도 알지?'

-뭘?

'다투고 나서 졸업할 때까지 서로 말 한마디 안 하고 지낸 애들.'

-아···, 현민이와 진욱이?

'맞아. 한번 틀어진 후로 우리가 뭔 짓을 해도 답이 없었지. 그래서 난 학교 교육이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해.'

연이 지낸 21세기는 학교 교육이 엉망이었다.

오직 입시만을 위해 교육하고 인성교육은 가정에 맡겼다.

하지만 가정 또한 자식들 인성교육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로 인해 사는 형편에 따라 학교 안에서 계급이 형성되고, '왕따'라는 못된 일본 '이지메' 문화가 정착되고, 집단 따돌림까지 난무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되려 그런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하기 바빴다.

그 누구도 인성교육을 책임지지 않은 사회.

그런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이 사회에 나오면 어찌 되겠는가.

이미 정착된 부에 따른 계급 사회는 최악이었다.

동료를 괴롭히면서도 양심의 가책(呵責)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이런 비열한 사회였기에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나돌았지만,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신분사회를 노예제도와 같다고 보는 거네.

'맞아. 신분사회는 노예제도처럼 눈에 띄진 않지. 하지만 '유리 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어. 그게 정상적인 사회는 아니잖아?'

-어쩔 수 없는 것 아냐?

'어쩔 수 없긴?'

-인류 역사가 그렇잖아. 바꿀 수 있겠어? 바꾸더라도 세월이 지나면 원상태로 변해 버릴 것 같은데?

'최대한 막아봐야지.'

-그래서 신분을 밝히지 못 하게 한 거야?

'응. 신분을 알면 계급이 나눠질 수밖에 없잖아.'

연은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노비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제 조선에서는 노비라는 개념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신분사회가 되면 어찌 되겠는가.

다시 효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연은 그런 사회는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를 만들 수 없다고 봤다.

그래서 순이 다니는 초등학교부터 신분을 밝히지 못 하게 했다.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태자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시작된 제도는 조선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부모의 신분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게 학교의 문화가 된 것이다.

* * *

경복궁은 북경에 있는 자금성보다 작았다.

그런데 지속된 증축으로 이제는 훨씬 켜졌다.

태자 순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경복궁 동쪽에 있는 북촌 마을에 있다.

대대로 왕실 종친들이 살고 있는 서쪽 서촌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에 보내야 하지만, 연은 그러지 않았다.

순의 얼굴을 알고 있는 황실 종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유학원 타국의 공주와 왕자들은 서촌초등학교에 많이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칼 10세의 예쁜 딸이자 브리튼 왕국의 막내 공주인 헬레나였다.

헬레나는 말로만 듣던 순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서촌초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나라의 공주와 왕자들보다 늦게 한양에 도착했기에 그녀가 입학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고민 끝에 헬레나는 고위 관리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북촌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순과 동갑인 헬레나는 바이킹의 후손답게 덩치가 컸다.

게다가 순과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거친 성격을 감추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먹부터 나갔다.

운동장을 도는 벌칙을 수도 없이 받았지만,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거친 성격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더 사고 치면 지옥도로 보내버린다는 칼 10세의 엄명을 어길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혈기 왕성한 성격을 누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격투장에서 이루어진 대결은 정당하다는 걸 안 헬레나.

기분이 상하면 누구라도 신경쓰지 않고 결투를 신청했다.

그날도 그랬다.

헬레나는 자신보다 예쁘다고 생각한 여학생에게 시비를 걸었고, 당황하며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를 비웃고 놀렸다.

지나가다 이를 본 순.

참지 못하고 나섰다.

눈여겨보고 있던 여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건 좋은 행동이 아니야. 당장 그만두고 저 애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흥! 너야말로 누군데 간섭이야. 재수 없게."

"그렇게 말하지 마! 보아하니 유학 온 학생 같은데 조선에선 그러면 안 돼."

"웃기고 있네. 내가 뭘 했다고?"

"놀리고 비웃었잖아."

"내가 언제?"

순은 최대한 정중하게 행동했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당하고 있었기에 나선 거였지만, 예의는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헬레나는 막무가내였다.

끝내 참지 못한 연이 한마디 했다.

"네가 사과하지 않는다면 나는 교장 선생님께 이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어."

"흥! 남자 새끼가 쪼잔하게."

"뭐? 나보고 쪼잔하다고 했어?"

"그래. 이 쪼잔한 새끼야. 고자질하려면 해. 누가 겁낼 줄 알고, 흥!"

"이···!"

"어쭈, 겁도 없이 나에게 덤비겠다는 거야?"

결국 말다툼은 무력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연은 국가가 개인의 무력을 빼앗았지만,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역마다 격투장을 두었다.

개인 간의 다툼을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 거다.

그러자 거리에서 폭력이 사라졌다.

서로 다툼이 일어나면 근처 격투장에서 해결하는 게 법칙이 되었다.

이는 모든 학교에 적용되었다.

네모반듯한 격투장에 올라선 두 아이.

머리 보호구를 쏘고 권투장갑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또한 급히 달려 온 체육 선생님이 심판으로 나섰다.

개인 간 폭력이 인사사고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쌍식이 아들 복만이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되지 않았겠지만, 순보다 나이가 많은 복만이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연이 생각해낸 격투장이라 경기 법칙은 권투와 같았다.

발까지 사용하면 다칠 위험이 컸기에 이렇게 정한 거였다.

심판으로 나선 체육 선생님이 손을 들자 웅성거리던 학생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 경기는 두 학생이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경기 후에는 승패를 따지지 말고 서로를 존중해주길 바란다. 알겠나?"

"네!"

"물론이죠."

헬레나는 여자지만, 순보다 한 뼘이나 더 컸다.

또한 이런 결투를 자주 했기에 학생들은 작은 순을 걱정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황후를 닮아 곱상하게 생긴 순의 몸짓은 번개 같았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연의 신변을 책임지는 검수로부터 무술을 배우고 할아버지인 효종으로부터 창 쓰는 법까지 배운 순 아닌가.

순은 거친 헬레나의 주먹질을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그리고 단 한방.

상대의 힘을 이용한 주먹질 한방에 헬레나는 나가떨어진 후 정신을 잃었다.

"""우와···!"""

학생들은 함성을 질렀다.

북촌초등학교에서 악명 높은 헬레나가 코피를 흘린 채 큰 대자로 뻗어 버린 걸 보자 그동안 쌓였던 응어리가 단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기에 소리 높여 순을 불렀다.

순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찾았다.

한쪽에서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자신을 보고 있는 여학생이 눈에 들어오자 주먹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그런 순을 보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여학생.

예뻤다.

순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며 얼굴이 불타는 듯했다.

경기 중에도 뛰지 않던 심장 소리가 귀에서 천둥처럼 들려왔다.

* * *

조선 제국의 수도인 한양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세계 제일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인구 또한 백만 명이 넘어섰다.

원래라면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의 인구가 이처럼 많았어야 한다.

하지만 지속된 전쟁 끝에 대기근과 전염병으로 민란까지 일어나자 청나라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후금과 남명 또한 성난 민심으로 무너져 버렸다.

굶주림과 역병은 병사들도 피해갈 수 없었기에 그들까지 나선 거였다.

이제 중원이라 부르는 곳은 조선의 우방국인 대명과 우후죽순처럼 들고 일어난 수많은 군벌(軍閥, warlord)들의 차지가 되었다.

대명의 신하들은 이 기회를 틈타 세력을 확장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정성공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절대 안 된다!"

"명분 때문에 그러시옵니까?"

"당연하지 않으냐? 명분 없이 타국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조건은 지켜야만 한다. 그래야만 조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너도 알지 않으냐? 조선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도 어찌 됐을지."

"그렇다면 명분을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가당치 않은 말은 꺼내지도 말거라. 너도 알다시피 조선은 밤말과 낮말을 듣는다는 황실 수호 기관이 있다. 그들의 눈과 귀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오나, 너무 아깝습니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나 다름없는데···."

오래전부터 대명은 오대십국 시대에 초나라의 근거지였던 호남성(湖南省)을 노리고 있었다.

동정호(洞庭湖) 남쪽에 있다고 해서 호남성이라 이름 지어진 곳이 엄청난 쌀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명나라의 잔당들이 세운 남명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역 전체가 곡창지대인 호북성(湖北省)을 점령하고 있는 남명은 쉽게 넘볼 수 없었다.

조선처럼 막강한 무기가 있다면 몰라도 막대한 곡물 생산량에서 나오는 인구수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다.

대기근으로 인한 민란이 발생한 거다.

하지만 대명은 군사를 일으킬 수 없었다.

대명 또한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기근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한 대명.

조선에 원조를 요청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급급했다.

조선의 도움으로 이제야 숨통이 트인 대명이기에 원했던 호남성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그동안 서로 명나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던 남명과 대명.

거리낌 없이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남명이 사라져 버렸기에 대명은 남명의 영토였던 호남성으로 쳐들어갈 명분이 부족했다.

섬기는 조선조차 타국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임자 없는 곳이라도 원주민들이 반대하면 넘보지 않았다.

따라서 정성공도 호남성을 삼킬 야심을 버려야 했다.

이미 호남성은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명이 있는 남쪽과 서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명분을 주지 않으면 침략당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대명은 영토를 넓히려는 야욕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대신 경제적 속국으로 만드는 건 어떠냐?"

"조선처럼 말입니까?"

"그렇지. 저들에게 총과 화약을 팔아 돈이라도 벌도록 하자."

"현명하신 예책(睿策)이옵니다."

정성공은 조선이 중원에 했던 대로 따라 하려 했다.

조선이 큰돈을 벌고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 생각했기에 그런 거였다.

조선이 발전하는 만큼 주변국도 발전하고 있었다.

주변국들은 간자를 보내 조선의 기술을 습득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기존에 알고 있는 방식과 너무나 달랐기에 원리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열식발전기를 판매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전기가 무엇이란 걸 알게 된 거다.

또한 삼발이와 사발이를 수입하면서 열을 이용하면 스스로 움직이는 기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하지만 정밀 가공할 수 있는 공작기계가 없기에 똑같이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성냥을 이용한 종이 탄피는 개발할 수 있었다.

조선군조차 쓰지 않은 조1 소총을 입수해 연구한 결과이다.

그래서 정성공은 남아도는 수석총을 군벌들에게 팔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로 인해 중원의 인구가 늘기는커녕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이처럼 유럽반도와 중원이 망가져 가고 있지만, 조선은 미친 듯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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