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풍요와 빈곤(2)
프랑스는 삼부회(三部會, États généraux)란 이름으로 귀족, 성직자, 평민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토론의 장이 있었다.
1302년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각 신분을 대표하는 이들을 소집한 거였다.
하지만 왕권이 강화되자 1614년 이후로는 삼부회가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루이 14세가 죽고 나자 다시 삼부회가 소집됐다.
자크 쿠로츠를 따라 삼부회 의원들이 있는 루브르궁(Palais du Louvre)으로 진격한 파리의 시민들.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의원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게 중 한 시민이 들고 있던 포크처럼 생긴 농기구로 코를 골며 정신없이 자고 있는 의원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시민은 농기구를 들어 두툼하게 튀어 오른 의원의 배를 냅다 후려갈겼다.
"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뜬 의원.
흉흉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를 보고 겁이 났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뭐냐?"
"시민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뭐 하는 겁니까?"
"뭐하긴, 먹을 것이 없어서 술 좀 마신 것뿐이다. 그런데 네놈들이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의원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 후려갈긴 몽둥이를 맞고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우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의원이 쓰러지자, 참고 있던 성난 민심이 들고 일어났다.
군중심리(群衆心理, Crowd Psychology)가 작용한 거였다.
의사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 온 시민들은 여기저기 누워 있는 의원들에게 분노의 폭력을 휘둘렀다.
그동안 억제되어 있던 개개인의 욕구가 익명성 함께 폭발한 거였다.
자크가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흥분할 때로 흥분한 시민들을 말릴 수가 없었다.
노도와 같이 몰아치는 폭력적인 상황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굶주릴 대로 굶주린 파리의 시민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루이 14세가 죽고 난 후, 둘로 갈라진 의원들.
시민들에게 진정하라 안심하라 말해 놓고 서로의 이권을 더 차지하기 위해 논쟁만 벌이고 있었다.
파리 시민들은 그런 논쟁에 관심이 없었다.
왕을 다시 세우든, 왕 없이 나라를 통치하든, 시민들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파리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등과 붙어버린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먹을 것이었다.
순식간에 의원들을 모두 죽인 시민들.
그중 한 사람이 자크에게 다가와 말했다.
"나는 알베르라 합니다. 자크님의 명성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뭘 말이요?"
"지금 우리 프랑스는 저기 보이는 것처럼 왕도 의원도 모두 죽고 없습니다. 나는 자크님만이 혼란에 빠진 우리 프랑스를 구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 나서 주십시오."
"나보다 알베르 그대가 더 잘할 것 같소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나를 도와주십시오. 자크님께서 도와만 주신다면 내가 앞장서겠습니다."
자크는 침음을 흘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민들은 열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한참 생각에 빠진 자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명성을 이용할 생각이오?"
"우리 시민들이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럼 내 뜻에 따르겠소?"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하겠습니다."
"알았소. 알베르 당신을 돕겠소. 함께 이 난국을 헤쳐나갑시다."
손을 마주 잡은 자크와 알베르.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을 높이 들어 올리자.
"""와···! 자크! 자크! 자크!"""
파리 시민들은 열렬히 자크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환호했다.
자크는 시민들이 뽑은 대표들과 함께 즉시 회의를 가졌다.
"시급한 것은 먹을 것이오. 즉시 파리 봉쇄를 풀고 먹을 것을 가져오도록 합시다."
"그러다 전염병이 돌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당장 죽게 생겼는데 그게 문제입니까?"
"그것보다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저택을 터는 건 어떠십니까?"
"그건···."
자크는 망설였다.
이미 훗날을 생각하지 않고 의원직에 있던 귀족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명망 있는 평민들을 모두 죽였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은 이미 벌어진 거였다.
그렇다고 다른 귀족들과 성직자들까지 모두 죽인다면 어찌 되겠는가.
고심에 빠진 자크가 말이 없자 알베르가 나섰다.
"자크님, 혹시 글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렇소. 글을 아는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모두 죽이면 우리 프랑스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거요."
"역시 그랬군요."
"뭐가 말이요?"
"어차피 우리 같은 시민들은 글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글을 아는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살려두면 다시 그들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보시지 않았습니까? 글을 아는 이들이 삼부회를 다시 소집하였지만, 논쟁만 하고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술까지 처먹고 널브려 자고 있지 않았습니까?"
자크도 직접 보았기에 알베르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프랑스 글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차라리 조선글을 도입하면 어떻겠습니까? 조선글은 바보라도 한 달이면 깨우치는 글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달? 정상인이라면 일주일이면 읽고 쓸 수 있는 게 조선글이 맞소. 하지만 우리 프랑스의 말을 표현할 순 없소."
"그렇습니까? 모든 언어를 표현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배워서 잘 알고 있소. 대충은 표현할 수 있지만, 우리 프랑스만의 독특한 발음은 표현할 수 없소."
그러자 알베르가 씩 웃었다.
"어차피 알지 못한 프랑스 글보다 대충이라도 읽고 쓸 수 있는 조선글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흠···. 그건 나중에 생각해 봅시다. 일단 굶주린 시민들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저택을 터는 것은 말리지 마십시오."
자크는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삼부회의 의원들이 시민들에게 맞아 죽은 이유가 현실을 외면하고 논쟁만 했던 것 아닌가.
"좋소. 하지만 죽이지는 마시오."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자크님. 아시다시피 굶주린 시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크님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프랑스는 모두가 인정하는 풍요로운 땅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굶주리다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요?"
"우리도 조선처럼 공동으로 생산해서 다 같이 나눠 먹었으면 합니다."
"좋은 생각이오. 알베르 당신의 뜻에 따르겠소."
조선 사회는 생각보다 아주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지만, 알베르와 자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단순히 들은 정보만 가지고 조선을 이해했기에 이런 황당한 말을 꺼내고 합의한 거였다.
* * *
조선 제국력 15년(1673) 10월.
연은 조선 전역에서 풍년이 들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명을 내렸다.
'묵은 곡식은 술로 만들고 백성들에게는 새 곡식을 팔도록 하라.'
대기근 동안 농지를 더 넓혀 놓았고, 농기계를 더 많이 보급해 놓았다.
대풍(大豐)까지 들자 수확량이 넘쳐났다.
조선전력공사 분점 창고도 확충해 놓았지만, 보관할 수 없을 정도로 곡식이 물밀듯이 들어오자 그리 명 한 거였다.
조선 전역에서 풍년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연은 태자 순을 만나고 있었다.
"아바마마, 소자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저리 많이 지원해주면서 관여하지 않는 것입니까?"
"순아, 용변을 보기 전과 보고 난 후가 다르지 않으냐?"
대기근 동안 창고에 쌓아 두었던 곡식들이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다시 가득 찼다.
술을 빚져도 남아도는 곡식을 처리하기 위해 주변국에 무상으로 보내고 있다.
하지만 조선은 어떤 생색도 내지 않았다.
그게 궁금해 물었는데 엉뚱한 답변을 듣자 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그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이란 간사해서 급할 때와 그러지 않을 때 다른 모습을 보인단다. 급할 때는 무슨 말을 해도 인정하지만, 지나고 나면 달라지는 게 사람이라 관여해봐야 좋은 소릴 듣지 못할 거다."
"어찌 사람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참말입니까?"
황후를 닮아 눈이 큰 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눈을 떴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조선 백성들은 순박하고 착하단다. 인심도 좋고, 자진해서 베풀 줄도 아는 선량한 백성들이지. 그런데 말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이 꼭 있단다. 명심하거라. 그런 자가 있더라도 죄가 없으면 처벌하면 안 된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자들은 당장···, 아니 지옥도로 보내야 합니다."
"죄를 범하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조선이라는 거대한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그런 자들도 필요하단다."
"참말입니까?"
연은 다양성에 대해 순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모두가 획일화된 사고를 하고 있다면 어찌 되겠느냐? 이처럼 다양성이 있어야만 조선이라는 거대한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단다. 하지만 조심하거라. 다른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기에 사회가 발전할 수 있지만, 그들로 인해 사회가 망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는 꼭 명심하고 조심해야 한다."
"네, 아바마마.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13살이 된 순은 연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그 뜻을 알 수 있었기에 다짐했다.
'아무리 다양성이 중요하더라도 선을 넘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순은 아직 어렸기에 보고 들은 것이 적었다.
그래서 순이 생각하는 선은 단순했다.
조선에서는 사람을 해치는 맹수뿐만 아니라 주거지로 침입하는 모든 야생 동물은 사냥할 수 있는 게 법이다.
연이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다.
미국 유학 시절 들었던 말이 있어서였다.
'저놈들 참 신기하단 말이야. 사냥철만 되면 사라졌다가 사냥철이 딱 끝나는 날이 되면 다시 나타나니.'
학교에서 사귄 사냥을 좋아하는 친구 아버지가 한 말인데 진짜 그랬다.
그래서 연은 동물 보호구역을 지정하고 그곳에서 사냥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아닌 곳에서는 사냥을 허락했다.
그러자 어찌 알았는지 맹수뿐만 아니라 작은 짐승들조차 민가로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물론 있었지만, 동네 사냥꾼들에 의해 제거되었기에 백성들은 그리 알고 있었던 거다.
순이 생각한 선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랬기에 순이 다스리는 조선에서는 법이라는 선을 넘는 자들이 극히 드물었다.
연처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처리하지 않고 그때마다 가차 없이 강하게 처벌했기에 소시오패스는 물론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는 자라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순이 떠난 후 연은 벽에 걸린 사진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히말라야 최고봉을 정복한 최진봉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미리 말하지 않기를 잘했구나.'
연은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에베레스트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에베레스트는 영국의 탐험가이자 측량사였던 조지 에버리스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덕분에 지구에서 최고 높은 산은 '최진봉' 산으로 불리게 됐다.
-똑똑.
내관이 들어와 연에게 말했다.
"폐하, 전화를 받아 보셔야겠습니다."
"누구요?"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듣는다고 하였습니다."
"알겠소. 나가보시오."
"네, 폐하."
연은 바로 수화기를 들고 물었다.
급한 일이 틀림없다고 생각해서다.
"은진이냐?"
-네, 폐하.
"무슨 일이냐?"
-폐하, 아무래도 프랑스에서 전에 말씀하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에 말한 일이라니?"
-공산주의가 태동하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연은 조서원의 수장인 은진이에게 당부해 놓은 게 있었다.
그건 바로 '공동 생산, 공동 분배'를 외치는 공산주의였다.
말이 좋아 공동 생산 공동 분배지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고 지배하는 건 자유민주주의와 같지만,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공산주의는 절대 안 된다. 공산주의는 다 같이 가난하게 살자는 건인데 그것조차 거짓말이다.'
연은 공산주의에 대해서 은진이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바로 알려달라 했다.
은진이로부터 프랑스 상황을 자세히 들은 연은 고심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막상 우려했던 일이 터지자, 연은 생각이 깊어졌다.
'나서자니 휘말릴 수밖에 없고···, 참으로 난처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