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풍요와 빈곤(1)
조선에서는 건전지를 넣고 쓰는 휴대용 확성기가 보편화되었지만, 이곳 파리에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 어디에서나 한 달 정도 일하면 휴대용 확성기를 살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이 아니라면 그런 일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연이 없던 조선처럼 대부분 나라는 임금을 주지 않고 밥만 먹여줘도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조선에서는 개도 물어가지 않는다는 1푼조차 받지 못하고 일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이곳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유럽반도에 사는 모든 이들을 다 먹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곡창 지대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지만, 대기근을 피해갈 순 없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지방에서부터 시작된 역병이 프랑스까지 번졌다.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스페인을 삼키려던 루이 14세의 욕심 때문이었다.
루이 14세가 스페인으로 보낸 프랑스군은 반란군을 진압하기는커녕 만나보지도 못하고 도망쳤다.
피부가 검게 변하여 죽어 있는 사람들이 길가에 널려 있는 것을 본 프랑스군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만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반도 전체가 역병에 휩싸였다.
이상 기후로 지구 전체가 몸살을 앓자 난리가 났다.
먹을 것만 있었다면 역병이 돌더라도 어찌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런데도 루이 14세는 파리를 봉쇄했다.
하지만 결과는 혁명을 불러왔다.
파리 안에 사는 사람들도 굶주렸기에 참지 못한 거였다.
그로 인해 루이 14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혼란을 틈타 정권을 잡으려는 자들이 수도 없이 나타났다.
그래도 왕이 있어야만 한다는 입헌군주파.
이제는 왕 따위는 필요 없다는 공화파,
크게 둘로 나뉜 세력은 서로를 험담하며 정치적 공격은 물론 물리적 암살까지 시도했다.
이를 보다 못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지금 몽마르트 언덕 위 단상에 서 있는 자였다.
"우린 지금까지 속고 있었습니다. 나는 보았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걸. 우리가 사는 지구의 모습이 푸르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배포한 푸른 지구의 모습이 그려진 포스터를 높이 들고 외쳤다.
"바로 이것입니다!"
말로만 들었던 지구의 모습을 포스터로나마 보게 된 사람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거짓이라고 믿지 말라고 떠들었지만, 너무나 선명한 사진이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지구는 아름답고 둥근데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다며 우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기근 동안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되려 각종 이유로 약탈해 갔습니다."
"와···!"
"하지만 조선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은 홍익이란 말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비싼 약품까지 주었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무상 지원해 주었습니다."
"와···!"
연이 타국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했지만, 정이 많은 조선인들은 그 말을 따를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존경하는 폐하의 말이라 어길 수도 없었다.
이때 나선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철도 관련 일을 하는 조선전력공사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친목 단체인 '홍익회'의 이름으로 기아와 역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유럽반도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을 순 없잖아? 우리가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몇 푼씩 모아 그들을 돕자고.'
'폐하께서 관여하지 말라고 했는데 괜찮겠어?'
'관여하지만 않으면 폐하의 황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괜찮아.'
'그래도···.'
조선 백성들은 연이 지나가다 한 말까지 모두 지키려고 노력했다.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고 존경했기에 그것만이 은혜를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처럼 옳은 일을 할 때도 연이 한 말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자 보라고. 내가 은쌍식 사장님의 답변을 받았어.'
'어! 도와도 된다는 말이잖아.'
'그럼! 내가 괜히 나섰겠어.'
이렇게 시작된 홍익회의 구호 활동은 들불처럼 조선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절대 빈곤에서 벗어난 조선 백성들은 풍요로운 시대를 즐기고 있지만, 곤란에 빠진 다른 이들을 모른 체하지 않았다.
"나 자크 쿠로츠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우리의 적은 바로 저기에 있다고."
자크가 의사당이 있는 곳을 가리키자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굶주린 그들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얼떨결에 루이 14세를 죽였지만, 나아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되려 잘났다고 나선 이들에 의해 혼란만 가증되었다.
"나를 따라 저곳으로 갑시다. 저곳에서 아직도 싸우고 있는 의원들을 모두 처단하고 조선과 같은 이상 국가를 세웁시다. 이대로는 못 살겠습니다."
"""와···!"""
"아직 혁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쓸모없는 논쟁으로 우리를 방치하고 있는 저들을 모두 제거해야만 혁명이 끝납니다."
"""와···!"""
"나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자, 갑시다. 나를 따라 우리의 적을 처단하러 갑시다!"
"""처단! 처단! 처단!"""
자크를 따라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시민들은 이판사판이었다.
이대로 굶어 죽을 순 없기에 들고 일어났지만, 자신들을 위해 정치를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들과 같은 농민 출신인 자크 쿠로츠 만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있었다.
조선에서 온 구호품도 의원들이 착복하려 했지만, 자크가 있었기에 막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파리 시민들은 자크를 따르고 지지했다.
하지만 의원들은 자크를 인정하지 않았다.
되려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이 행진이 프랑스 전체를 사회주의를 뛰어넘어 공산주의로 변화시켰다는 걸.
* * *
조선 제국력 15년(1673) 9월.
조선 전역에서 추수가 시작됐다.
2년에 걸친 대기근으로 손을 놓고 있던 농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전보다 넓어진 농지에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모두 수확하려면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수확기(Combine Harvester)를 몰고 있던 이가 부르는 소리에 시동을 껐다.
"뭐해! 빨리 오지 않고. 어서 점심 먹자고."
"벌써 점심때가 됐어요?"
"그럼, 하늘을 봐봐. 해가 중천에 떴잖아. 어서 타라고."
"네, 이장님."
올가는 이장이 몰고 온 견인기(Tractor)에 올라탔다.
견인기에는 다른 농부들도 타고 있었다.
넓어진 농지로 인해 점심을 먹으려면 견인기를 타야 했다.
마을회관까지는 너무 멀었기에 걸어갈 순 없었다.
그래서 이장은 견인기를 타고 다니면서 농부들을 관리하는 게 일이었다.
"어서 오라고. 우리 마을에서 제일 이쁜 올가. 오늘도 고생이 많구나."
"아, 아버지도 나오셨네요. 다치신 곳은 괜찮나요?"
"응. 다 나았다."
"그래도 좀 쉬시지 않고 벌써 나오셨어요?"
"집에 있으면 뭐 하냐. 이렇게 황금으로 물든 들판이 있는데."
"정말 아름답죠?"
"우리 올가만 할까. 그나저나 시집은 언제 갈 거야? 우리 잘 난 아들도 싫다고 차버려 놓고."
대전쟁시대에 부모를 모두 잃은 올가는 어릴 때부터 최 씨 집에서 함께 살았다.
아들만 다섯을 둔 최 씨 집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올가가 오자 달라졌다.
다른 집과 다르게 여자라곤 최씨 부인밖에 없는 집에서 올가가 나타나자 집안에 온기가 돌았다.
"때 되면 가겠죠."
"안 간다는 말은 안 하네."
"제가 안 갔으면 좋겠어요?"
"그건 아니지. 막내 놈과 이어지면 좋겠는데 싫다고 했으니 아쉽구만."
"이젠 그만 하세요. 어떻게 언니랑···. 그럴 순 없어요."
"알았어. 그나저나 수확 끝나면 읍내 좀 나가봐."
"가서 뭐 하게요?"
"튼실한 놈으로 잡아 와. 그럼 내가 멋들어진 집 하나 지워 줄 테니."
"참말이시죠?"
"그럼, 이장하고도 다 이야기됐어. 그러니 잘 좀 꼬셔 보라고."
"노력해 볼게요."
올가는 정식으로 입양된 것이 아니지만, 최 씨를 아버지라 불렀다.
천애 고아인 자신을 이처럼 키워줬기에 친아빠처럼 생각했다.
오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최 씨가 원했지만, 혼인은 할 수 없었다.
"참, 막내 언니는 이번에도 못 온대요?"
"미친놈이지. 무슨 산을 정복한다고 그리 설치는지···."
"언니는 해낼 거에요."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런 소리 마세요. 말이 씨가···."
순간 올가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았다.
부정 탈까 두려웠다.
최 씨 막내아들 진봉이는 산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런데 최 씨네가 사는 우크라이나 지역은 산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진봉이는 꿈을 잃지 않았다.
성인 교육대를 퇴소한 진봉이는 조선 전역을 돌면서 산을 탔다.
그러다가 히말라야에서 등반대를 만났다.
진봉이의 타고난 강한 체력을 눈여겨본 등반대는 그를 바로 영입하고 다시 최고봉에 도전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조선전력공사에서 새로운 등산 장비가 출시됐다.
전문 산악인을 위한 장비였다.
연은 조선 전역에 있는 높은 산을 정복하려는 산악인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바로 명을 내렸다.
'산악인을 위한 장비는 가볍고 튼튼해야 한다. 그러니 초두랄루민을 이용해 장비를 만들도록 해라.'
아연 5.6%, 구리 1.6%, 마그네슘 2.5%, 크롬 0.3%를 알루미늄에 첨가해 만든 초두랄루민은 개발한 지 오래됐다.
그런데 항공기나 군수품을 제작할 때만 쓰고 있었다.
굳이 민간용으로 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전략용으로 구분해 놓았기에 그런 거였다.
하지만 더욱 강한 극초두랄루민(ESD, Extra Super Duralumin)을 개발했기에 초두랄루민을 민간에 푸는 것은 문제 될 게 없었다.
아연 8%, 구리 1.5%, 마그네슘 1.5%에 크롬과 망간 0.25%를 더해 만든 극초두랄루민은 기존 알루미늄의 결점인 응력부식 현상조차 없었기에 이번 홍익 1호에 사용되었다.
아무튼 초두랄루민으로 만든 산악 장비를 구한 등반대는 다시 히말라야 최고봉에 도전했다.
마을 회관에서 점심을 먹고 난 주민들은 차나 커피를 마시며 만물상자를 보고 있었다.
오후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 거였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우크라이나 지방의 우양에서 결성된 우양 등반대가 히말라야 최고봉을 정복했다는 소식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현지에 나가 있는 안우진 기자에게서 듣겠습니다.
"어이, 최 씨. 자네 막내 진봉이도 저 등반대 소속 아니여?"
"우리 막내 등반대가···."
최 씨는 올가를 쳐다보았다.
"맞아요. 막내 언니 등반대 이름이 우양 등반대 맞아요."
"그래? 큰일 했구먼."
"그러게요."
"어릴 때부터 남다르더니 역시 진봉이네. 우양 등반대라면 이곳에선 최고 아닌가."
우크라이나 지방의 핵심 도시인 키이우는 우양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한양과 소양처럼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였기에 그리한 거였다.
-안우진 기자?
-네, 안우진입니다.
-정상을 정복한 등반대로부터 무전 연락이 왔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조금 전 이곳 준비기지로 등반에 성공했다는 무전 연락이 왔습니다.
-그랬군요. 전역에 있는 백성들이 모두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 부탁합니다.
-네, 아시다시피 히말라야산맥 최고봉의 높이는 8848m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죠. 그래서 이 산을 정복하려고 수많은 등반대가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양 등반대가 이번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방금 들어왔습니다.
-혹시 등반에 성공한 대원들 명단을 알 수 있을까요?
-네, 이번 우양 등반대에서 정상 정복을 위해 모두 8명의 대원들이 준비기지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입니다.
"어이구, 진봉이도 있네. 최 씨 한 턱 내야겠구먼."
"자, 잠시만···."
-모두 무사한가요?
-네, 일부 다친 대원들이 준비기지로 복귀하긴 했지만, 모두 무사하다고 합니다.
-그럼 정상까지 몇 명이나 올라간 건가요?"
-단 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혹시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네, 준비기지에서 발표한 내용에는 우크라이나 지역 가니프 농장 출신인 최진봉 대원이라고 합니다. 모두 포기한 상태에서 단독 등반에 도전해 성공했다고 합니다.
"""와···!"""
먹고살 걱정이 없는 조선에서는 이처럼 산을 정복하거나 오지를 탐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장 빨리 이름을 날리는 방법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최 씨! 축하하네!"
"자네 아들 진봉이가 일을 냈어! 일을 냈다고!"
"내 이럴 줄 알았지. 다들 알잖아? 진봉이 이놈은 어릴 때부터 날다람쥐였다고."
"우리 마을의 자랑이지."
한때 동네의 말썽꾸러기였던 진봉이는 마을의 자랑으로 변신했다.
빨리 추수를 해야 하는데 진봉이가 살았던 마을 사람들은 잔치를 벌였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자기 마을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정복했다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