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날아오르기(3)
조선 제국력 13년(1672) 1월 1일.
지옥 같았던 경술년과 신해년이 지나고 임자년(壬子年) 새해가 밝았다.
연은 새해를 맞이하여 신년사(新年辭)를 발표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조선의 황제인 나는 무척이나 자랑스럽습니다.
-이상 기후로 인한 재난이 조선 전역에서 발생했지만, 슬기로운 국민 여러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연은 전과 달리.
'백성'을 '국민'이라 부르고, '짐'을 '나'라 칭했다.
또한 존댓말로 신년사를 발표했다.
그런데도 만물상자를 보고 있던 백성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만물상자를 통해 용어에 관한 홍보했기 때문이다.
연은 스스로 존엄(尊嚴, Dignity)을 내려놓았다.
문식이와 통화 중 느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 그거 알아? 계몽주의 시대에 자연권(自然權)의 연장이라고 하는 '존엄'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타고 남을 말하는 거야. 그래서 자연권을 천부인권(天賦人權)이라고도 해.
'그래? 난 존엄하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나 쓰는 말인 줄 알았지.
-그건 아니야. 인권(人權, Human Rights)은 자연권에서 성장한 말이야. 다시 말해, 인권이나 자연권이나 존엄이나 다 같은 말이야.
'진짜야?'
-응. 너도 알다시피 그래서 인권이 오용되는 경우가 많았어, 미국도 인권이라 말할 수 있는 자연권을 보호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아. 대신 '적법절차에 의해 보호된다'고 하지. 그런데도 보호받을 가치가 없는 것들에게도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지랄하잖아.
'그건 그래.'
-그러니 너부터 존엄을 내려놓는 게 어때?
'존엄을 내려놓는다···.'
처음에는 무슨 뜻으로 문식이가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끝도 없이 살인과 방화와 강간 같은 흉악 범죄가 발생하자 생각을 바꿨다.
이런 흉악 범죄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한 번 발생하면 조선 전역이 들끓었다.
그래서 연은 이번 신년사에 그에 대한 대책도 내놓았다.
-우리 조선은 어려울 때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정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한밤중에 나다녀도 위험하지 않은 곳입니다.
-하지만 몇몇 흉악범들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밤이 되면 인적이 끊기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조선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황제로서 이를 간과할 수 없기에 특별 조치를 발표합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흉악범들은 죄상이 확실히 밝혀지면 국민의 뜻에 따라 강력히 처벌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조선 제국에서는 사기에 연루되지 않으면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지옥도에 던져 놓고 방치했다.
아직도 연의 머릿속에 '인권'이란 말이 남아있어서였다.
연은 자신부터 존엄을 내려놓았다.
그랬기에 그런 자들의 인권을 따지지 않고 극형에 처한다고 발표하고, 바로 형을 집행했다.
이에 백성들은 하나같이 만세를 불렀다.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조선에서 범죄라니.
백성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끊이지 않고 흉악 범죄가 발생했고, 원하는 대로 처벌하지 않자 백성들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구, 속이 다 시원하네. 저런 놈들을 살려주고 공짜 밥까지 먹여준다고 했을 때 어찌나 화가 나던지."
"그러게. 저런 쓰레기들은 진작 처형했어야 해."
"역시 폐하께선 화끈하셔. 전에 법관들도 일거에 목을 쳤잖아."
"그치! 법 조항 몇 개 안다고 으스대며 온갖 나쁜 짓을 다 한 놈들은 진작에 죽였어야 해. 이제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만 좀 진정해."
연은 천여 명이나 되는 사법 관련 범죄자들을 일거에 처형한 후 법관 임용 시험부터 바꿔버렸다.
'아무리 똑똑한 이라도 모든 법을 다 알고 기억할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 법관 임용 시험은 법전을 보고 치를 수 있도록 하라.'
연은 더 나가 대학교 입학시험도 '오픈 북(Open Book)'으로 시행하라고 명했다.
사람이란 망각의 동물이기에 기억을 보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선에선 단순 암기보다는 원리와 이해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학문이 발전하고 있었다.
원리를 알고 이해해야만 책에서 내용을 찾고 답을 적을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폐하께서 하신 말씀 중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던 데···."
"달에 간다는 것 말인가?"
"맞아. 어떻게 사람이 달에 갈 수 있다는지···."
"폐하께서 말씀하셨으니 기다려 보자고. 앞으로 10년 안에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으니."
"아무리 폐하라지만 그건 좀 믿기 힘든데."
"아 쫌! 믿고 기다려 보라니까. 이제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잖아. 더 높이 날면 달까지 가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런가?"
연이 신년사에서 이런 발표를 한 이유는 2차 대전 후 미국과 소련처럼 '문레이스'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백성들이 과학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조선이지만, 갈수록 옹진반도와 격차가 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짬을 내 은동리에 방문 한 연은 깜짝 놀랐다.
쌍식이로부터 수시로 듣고 있었지만, 연은 놀랄 만큼 변해버린 은동리를 보자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쌍식아, 몇 곳에서만 쓰는 게 아니었느냐?'
'아닙니다. 폐하. 이제 옹진반도에서 컴퓨터를 쓰지 않는 사람은 찾기 힘들 겁니다.'
'참말이더냐?'
'네, 폐하.'
전생에 연은 통신 반도체 분야의 전문가였지만, CPU와 운영체제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논문들을 관심 있게 챙겨봤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연은 논식이와 규식이에게 컴퓨터에 관한 기본 원리를 설명해주고 과제를 목록으로 만들어 전해 주었다.
그런 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문제점을 해결해 주었다.
하지만 황제에 오른 후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매일 같이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럴 수 없었다.
'전에 나에게 보내준 컴퓨터는 구식이구나.'
'죄송합니다. 말씀이 없으셔서···.'
논에 물꼬를 트면 처음에는 물이 적게 흐르지만, 관성이 붙으면 엄청난 양의 물이 흐르게 된다.
과학기술도 처음에는 힘들지만, 컴퓨터라는 물꼬가 트이자 미친 듯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천재 핵물리학자인 야코프가 붙자 그 물길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연이 기반을 잘 닦아 놓았기에 그런 거지만, 그래도 정도가 심했다.
그래서였다.
연이 조선 백성들에게 달에 관해 말한 이유가.
연은 10년이라는 기한을 정해 놓았다.
하지만 조선의 기술은 생각보다 훨씬 발달해 있었다.
그랬기에 그보다 더 빨리 사람을 달에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은 그 전에 조선 백성들의 과학 지식을 끌어 올리려고 했다.
그래야만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즐길 수 있을 테니까.
그로 인해 조선의 과학이 더욱 빠르게 발전할 수 있을 거니까.
연이 발표한 신년사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곳곳에서 논란이 되었지만, 연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실력으로 증명하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연은 문식이에게 연락이 오기 전에 먼저 수화기를 들었다.
-정말 가능한 거야?
"당연하지. 그나저나 시간 낼 수 있어?"
-왜?
"보여주려고."
-뭘?
"위성을 쏟아 올릴 준비가 끝났거든."
문식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수화기 너머로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려왔다.
-언제까지 가면 돼?
"이달 안으로 결정하면 돼. 다음 달에 대만 남쪽 끝에서 첫 위성을 쏟아 올릴 예정이거든."
-정말이야?
"응."
-미사일은 몰라도 위성 같은 로켓을 쏘아 올리는 건 어렵다며?
"그야 그렇지. 고체 연료보다 액체 연료가 제어하기 더 힘드니."
-그런데 그걸 해낸 거야?
"응, 컴퓨터가 있어서 계산을 빨리할 수 있었어."
-와···! 이거 완전히 미친 거네.
"뭐가 미쳐?"
-지금은 17세기야. 17세기라고.
"그래서?"
-그래서라니? 하···! 말을 말자. 아무튼 뭔 일이 있어도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우주로 쏘아 올리는 로켓 발사는 적도와 가까운 곳에서 할수록 더 유리하다.
자전하는 지구의 원심력이 극지방보다 더 크게 작용하기에 상대적으로 중력의 영향을 덜 받는다.
그래서 연은 대만 남쪽에 우주기지를 건설했다.
더 남쪽인 해남도에 세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만과 달리 해남도에는 백성들을 위한 휴양 시설이 많았고, 대명과도 가까웠기에 보안과 안전에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 *
조선 제국력 13년(1672) 2월 30일.
조선 백성들은 모두 만물상자 앞에 모여 있었다.
조선에 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조선에서 송출하는 라디오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단파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모두 귀를 기울였다.
한 달 전부터 내보내기 시작한 조선 방송국의 홍보 방송.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을 주관하는 곳이 조선전력공사이고, 추진자가 연이라는 말을 듣자 상황이 달라졌다.
만물상자 앞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긴장한 체 말이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옆 사람에게 물었다.
"참말일까?"
"참말이겠지."
"그럴까?"
"그러겠지."
"무슨 대답이 그래?"
"난 뼛속부터 조선사람이라 폐하 말씀은 무조건 믿어."
"나는 아닌가?"
"그럼 조용히 좀 해. 나도 가슴 뛰어서 미치겠어."
이제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금까지 사고가 난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안심하고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하늘을 난다는 건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대기권을 이탈하여 지구 밖으로 뭔가를 보낸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것도 달까지 사람을 보내기 위해 시작하는 첫 발사 실험이라고 하자 사람들의 관심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광고가 끝나고 선식이가 화면에 등장하자.
"모두 조용! 시작한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대만 남쪽 끝에 있는 조선전력공사 대만 우주기지입니다.
-지금부터 저는 여기서 모든 과정을 생중계하겠습니다.
-저 또한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보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우리 조선의 기술로 만든 시설들입니다.
-웅장하지 않습니까?
선식이 대신 우주기지가 화면에 나오자 사람들은 동시에 '와'하고 감탄했다.
딱 봐도 대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TV를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TV로 인해 조선 백성들의 생활방식이 많이 변했다.
대량 생산 시설을 완공한 후에 출시했기에 물량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구입할 수 있는 양은 아니었다.
그래서 연은 마을광장이나 마을회관에서 시청할 수 있도록 TV를 설치해 놓았다.
"저 끝에 보이는 것이 로켓이라고 하는 거 맞아?"
"맞겠지."
"에이, 너 오늘따라 왜 그래?"
"조용히 좀 해줄래. 나 흥분돼서 미치겠어. 너 나 알잖아. 밤하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거야···."
좀 전부터 옆 사람에게 묻던 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동네 이장이 들고 있던 곰방대로 머리통을 때리면서 눈치를 줬기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죄송···."
"쉿!"
이장이 눈까지 흘기자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장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노려보고 있어서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집중하고 있는 만물상자 화면.
중년이 된 선식이가 홍보 자료를 토대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배웠던 기술을 이용하면 저런 로켓을 타고 달뿐만 아니라 저 멀리 우주로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과학만이 우주를 정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걸 모두가 아실 겁니다.
-하지만 예절도 중요하다고 폐하께서 말씀하셨으니 악기 하나 정도는 연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식이는 잠시 시계를 확인하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앞으로 역사적인 순간이 2분 남았습니다.
-저와 함께 모두 숫자세기를 하며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합시다.
30초가 남자.
선식이는 더 큰 소리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마을회관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따라서 함께 숫자를 외쳤다.
그리고 10초가 남자.
화면은 대만 우주기지에 세워져 있는 로켓에 집중됐다.
-십, 구, 팔, 칠, 육, 오, 사, 삼, 이, 일, 발사!
엄청난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로켓을 보고 선식이가 외쳤다.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참말로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선식이의 두 눈에선 감격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동시에 조선 전역에서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