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대기근과 함께하는 문화(9)
생각보다 많은 원주민들이 동토에 살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연은 그들을 위해 특명을 내렸다.
'도움을 주고 지원은 하되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동토에 숨어 사는 원주민들이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그냥 두면 나중에 큰 문제가 될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보살펴야 한다.'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세월이 지나다 보면 불만 세력이 될 수도 있기에 관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비상대피소를 만들고 곡식과 생필품을 쌓아 놓았다.
그렇다고 원주민들이 무작정 곡식과 생필품을 가져가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가치만큼 모피를 두고 곡식과 생필품을 가져갔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비상대피소지만, 모피를 얻기 위해 시베리아를 개척하면서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학살했던 루스 차르국의 용병들처럼 하지 않았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갔던 거였다.
그랬기에 예맥 기병대와 원주민들 사이에 신뢰가 쌓여갔다.
그러다 보니 비상대피소는 곡식과 생필품을 모피와 교환하는 장이 되었다.
-흠, 괜찮은 방법인데. 그런데 어떻게 도시로 나오게 할 수 있었어?
'원주민들도 사람이잖아. 아이들은 당연히 호기심이 많고.'
-오···, 그걸 이용했군.
'맞아. 사람이란 먹고 살 걱정이 없으면 너그러워지잖아?'
-그건 그렇지.
'또한 더 나은 삶을 찾는 게 사람이잖아?'
-그것도 그렇지.
'그래서 사진을 뿌렸지.'
-오호! 현혹했군.
'응. 나이 먹은 원주민들은 몰라도 젊은 원주민들은 사진을 보고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한 거고, 그들과 친해진 기병대가 관심 있는 원주민들을 데리고 근처 도시까지 안내해 줬지.'
-호기심을 이용한 거군. 그런데 시베리아에 범죄자들은 없었어?
'원주민들 말로는 루스 차르국 놈들이 물러간 후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데.'
-그래?
'응, 기병대가 아니면 아무도 동토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거든.'
-그렇다고 말 들을 놈만 있는 건 아닌데···.
'혼자라면 몰라도 떼거리가 돌아다닐 수는 없는 곳이잖아. 그런 곳에 혼자 들어가 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흠···, 알았다.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역사를 잘 아는 문식이지만, 연으로 인해 너무나 틀어져 버린 역사이기에 그 지식을 써먹을 때가 없었다.
되려 연에게 얻은 정보로 아파치 왕국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 * *
30년 전.
자신이 조선 시대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인지한 연은 막막했다.
왕손으로 태어난 연이지만, 수없이 들었던 헬조선에서 환생했다는 것 자체가 슬픔이었다.
하지만 연은 그런 슬픔을 게임으로 승화시키고자 마음먹었다.
달리 할 일도 없었지만, 새로 얻은 삶을 그냥 아무렇게나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꿈을 꾸었다.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헬조선이라 부르며 비하했던 조선을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낙원으로 만들어 가는 꿈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연은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고, 최적의 방법을 찾아냈다.
그건 바로 전기와 공작기계였다.
연은 전기를 가장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열식 발전기를 개발하고 그걸 바탕으로 더 좋은 기물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다 보니 타국과 격차가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옹진반도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조선전력공사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옹진반도.
그곳에 사는 연구원과 공돌이들.
쉬지 않고 노력한 끝에 첨단 문명을 이루었다.
하지만 옹진반도를 벗어나면 주변환경부터 달랐다.
21세기 초입보다 더 발전된 모습을 가진 옹진반도와 달리 나름대로 발전했다고 평가하는 조선은 20세기 초반과 같았다.
그것도 동역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조선 전역에 기차와 자동차가 다니고, 전기와 수도가 놓이고, 각종 전자제품이 판매되고 있지만, 그것뿐이었다.
중역과 서역, 신역은 아직도 근세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였다.
연이 대기근 동안 문화를 꽃피우려 한 이유가.
라디오 방송을 이용한 홍보로 조선 백성들을 하나로 묶고 있지만, 문화까지 동화된 건 아니었다.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게 사람이다.
태어난 환경과 자라온 환경까지 모두 다르니 하나로 묶는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그림을 감상하면서 같은 문화로 동질화시키려고 한 거였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되도록 대회를 열고 큰 상금을 걸면서 관심을 끌었던 거다.
규식이와 논식이가 이끄는 전자연구소.
천재 핵물리학자였던 야코프의 도움으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8bit 중앙처리장치(CPU)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엄청난 기술적 진보를 이루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조선에선 연이 주도한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백성들이 존재했다.
연은 그들까지 조선의 품 안에 넣고자 했다.
그래서 시베리아 동토에 사는 원주민들까지 챙기고 있었다.
이제 절반 정도 꿈을 완성했다고 생각한 연은 더욱 박차를 가 했다.
굶주린 사람이 없고, 집 없는 사람도 없고, 헐벗은 사람도 없는 조선을 이미 만들었기에 추후 일도 자신 있었다.
수많은 대체역사 소설을 보고 문식이와 토론도 했던 연이지만, 소설에서 나온 대로 따라 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한 대로 모든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처럼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연이 꿈꾸던 세상은 아직 멀었기에 더 노력해야만 했다.
조선 제국력 11년(1670) 12월 말.
소빙하기가 정점에 달한 경술년이 끝나가는 시점이지만, 조선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방송제와 영화제가 열리고 있어서였다.
부산 동부를 가르는 수영강(水營江) 동쪽.
21세기에 센텀시티라 불리던 곳.
그곳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21세기처럼 높은 빌딩은 없었지만, 거대한 공연장과 극장 그리고 백성들의 쉼터가 될 커다란 공원이 있었다.
공원을 따라 지어진 수많은 숙박시설과 음식점들.
그곳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두 사람이 심심한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귀신이 있을까? 신도 없다는 데."
"신이 없긴 왜 없어?"
"신이라 주장하면 모두 쏴 죽인다고 하잖아. 그런데 아직까지 총 맞고 살았다는 사람을 본 적 있어? 없지?"
"그러긴 한데, 그래도 신은 있어. 신이 없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서 왔겠어?"
"그거야 알 수 없지. 그나저나 이번에 대상을 누가 받을 것 같아?"
"황후께서 제작하신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포함하지 않는다고 하니, 흥부전이 아닐까?"
"그래? 난 심청전이 더 재밌던데."
"심청전도 재밌긴 하지만, 좀 슬프잖아.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는 흥부전이 더 낫지."
이번 영화제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입장권을 거금을 주고 구입한 두 사람은 곧 열린 행사 결과가 궁금한지 서로 묻고 답했다.
"그런데 황후께서 오실까? 황자를 출산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몸도 좋지 않으실 건데."
"주최자이신데 오시겠지. 그런데 본 적 있어?"
"사진으로만 봤지."
"그럼 오늘 볼 수 있겠네. 무척이나 키가 크시다고 하던데."
"키만 크시나 서역 사람들처럼 눈도 크시지."
"그래?"
"사진 안 봤어?"
"본적 없는데."
"여기 봐봐. 폐하와 함께 찍으신 사진이야."
"진짜네. 폐하께서도 크시다고 하던데, 황후께서도 만만치 않으시네."
"잘 어울리시지?"
"당연하지! 이 나라 조선을 이렇게 만드신 분이신데."
"그치! 그런데 내년에 만물상자가 시판된다며?"
"나도 들었어. 이젠 극장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 된다고 하더라고."
"얼마나 할까?"
"모르지. 그래도 비싸진 않을 거야. 모든 백성이 일해서 살 수 있는 가격으로 판매한다고 했으니···."
"그래? 참말로 사는 게 즐겁구먼. 이렇게 앞날을 기대하면서 살 줄은 몰랐는데···."
망각의 동물이라는 사람.
그랬기에 힘들었던 시절이 얼마 전인데도 잊어버렸는지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앞으로 변화될 조선에 관심이 많았다.
연말이면 조선전력공사에서 해마다 출시할 기물들을 발표했다.
그랬기에 새로 출시될 기물들은 언제나 화재의 중심이 되었다.
연이 신상품을 출시할 때 고려하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가격이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살 수 없으면 그림의 떡이다. 그러니 백성들이 일해서 살 수 있는 가격으로 출시할 수 있을 때까지 생산 시설을 늘리고 기다려야 한다.'
21세기라면 조선전력공사는 파산하고 말았을 거다.
엄청난 연구비와 경비대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조선의 모든 영토를 가지고 있고, 도시 자체가 조선전력공사의 소유였기에 조선이 망하기 전까지는 절대 망할 일이 없었다.
원자잿값이라고 해봐야 인건비다.
대량생산 시설만 구축해 놓으면 아무리 좋은 기물이라도 연구비를 빼고 생산비만 계산해서 싼값에 팔 수 있었다.
21세기라면 막대한 연구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파산했을 조선전력공사는 없었다.
대신 엄청난 돈을 쓸어 담는 조선전력공사만 존재했다.
그랬기에 연은 돈을 풀어야만 했다.
돈이 넘치거나 돈맥경화에 걸리지 않게 조절하면서.
또한 연은 황실에도 변화를 주었다.
전 같으면 내명부(內命婦)라 일컫는 여인들만의 세상을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태황후와 누나들이 운영하는 유치원과 황후가 담당하는 유아원에 이어 이번 부산영화제의 주체자로 황후를 등장시켰다.
21세기에도 그랬지만, 황실 가족의 움직임은 조선 백성들뿐만 아니라 주변국에서도 관심이 대단했다.
영화제에 황후가 나타난다는 말을 듣고 조선의 우방국도 움직였다.
다두 왕국뿐만 아니라 신대륙에 있는 아파치 왕국에서도 왕비와 공주들이 참석했다.
이로 인해 단순히 조선의 문화를 하나로 묶기 위해 시작했던 문화 축제가 전 세계적인 축제로 변화되었다.
이처럼 슬기롭게 대기근을 넘기고 있는 조선과 우방국이지만, 그렇지 못한 곳이 있었다.
중원과 유럽반도였다.
한때 동양과 서양의 중심이었던 중원과 유럽반도.
이제는 전쟁으로 인한 약탈과 학살의 중심지가 되었다.
* * *
조선 제국력 12년(1671) 3월.
원래라면 현종이 된 연이 흰옷을 금하라고 명을 내렸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신역에서 유행한 청바지가 동역까지 전파되면서 바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색과 다채로운 문양이 그려진 윗도리도 입고 다니는 이들이 많아졌다.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깔 맞춤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청바지와 청윗도리를 입고 키타를 메고 다니는 젊은이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대학가요제의 영향이 생각보다 컸던 거였다.
이처럼 대기근 기간에도 조선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을 추구해 가고 있었지만, 태자가 된 순은 그러지 못했다.
연에 의해 태자를 교육하는 시강원(侍講院)은 폐지되었지만, 순은 자유롭지 못했다.
아직까지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황실의 문화때문이었다.
"아바마마, 꼭 혼인을 해야 하는 겁니까?"
"하···! 나도 원치 않지만, 황실의 법도가 그리하니 어쩔 수 없구나."
"그럼 저도 아바마마처럼 색시를 제가 선택해도 되겠습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이냐? 색시를 고르다니?"
"할마마마께 들었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직접 어마마마를 선택하셨다고 저에게 말해주셨습니다."
"그래?"
연은 음흉스러운 표정으로 모른 체하며 넘기려 했지만, 순의 한마디에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제가 선택할 수 없다면, 아파치 왕국의 제로니모 왕처럼 수많은 부인을 둘 것입니다."
"으응? 그게 무슨 말이냐? 이 아비를 협박하는 것이냐?"
협박이란 말에 순은 작은 손을 활짝 펴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바마마 그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원하는 비를 선택하지 못하면 대신 많은 부인을 얻는 게 확률적으로 유리할 것 같아서 한 말입니다."
"크흠···."
전생에 장가조차 가본 적이 없던 연은 이마를 짚고 침음을 흘렸다.
황실의 법도에 따라 11세가 된 태자 순은 혼인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태자비를 간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이 찾아와서 하는 말을 들으니 기가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나는 그런 적 없었다'는 말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확률까지 따지고 들자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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