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대기근과 함께하는 문화(6)
행식이를 총리로 임명하고 그에게 국정을 맡겨 놓았다고 연이 편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국방과 외교 그리고 사법은 연이 수장으로 있는 황실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었기에 쉴 틈 없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연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떠오르는 대안이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쌍식이가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도 행식이가 잘 해줘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그래서 좀 쉬려고 했는데 이거···."
"그래도 이번에 정리하면 앞으로는 문제가 줄어들 겁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폐하."
아직 인원조차 제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조선 제국 황실위원회.
표면적으로는 효종과 연, 순이 위원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모든 일은 연이 도맡아서 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더 나은 백성들의 삶을 위해 노력했던 효종은 황태후가 된 인선황후 장씨를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
황후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조선의 영토가 너무나 거대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효종의 이번 여행 목적은 확보한 조선의 영토를 살피는 것이지만, 이상 기온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돌보기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되자 황실 전용 기차를 타고 북으로 떠났다.
"당장 낼 모래가 대학가요제 본선 날인데 반응은 좀 어떻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반응이 뜨겁다 못해 불이 날 지경입니다."
"그래?"
"네, 폐하. 미리 준비해 놓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 정도란 말이지?"
"네, 그러니 이제 병원으로 가시지요."
"알았다."
조선 제국력 11년(1670) 5월.
올해는 음력으로 윤달이 끼어있는 해라 5월이라 해도 봄이 깊었지만, 천기는 미친 듯이 요동쳤다.
경상도에선 서리와 우박이 내렸고, 전라도는 가뭄으로 모내기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조선 백성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5년 동안 먹을 곡식이 조선전력공사 분점 창고에 가득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동요조차 하지 않았다.
"올해와 내년 농사를 짓지 않아도 다 보상해준다는데 뭐하러 논에 나가? 모내기라도 하려고 그래?"
"모내기는 무슨 모내기. 서리와 우박으로 모판을 다 엎어버린 거 몰라서 그러나? 노느니 오리에게 먹을 것이라도 챙겨주러 가는 걸세."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감세."
소빙하기가 정점에 달하자 농식이와 종식이가 합심해서 만들어낸 병충해에 강한 새로운 벼 종자도 소용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서리로 모(벼)가 죽고, 쏟아지는 우박은 모판을 보관해 놓은 창고까지 무너트려 버렸기에 농사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수시로 지진이 일어났다.
누리(풀무치, Migratory Locust) 떼까지 극성을 부렸다.
그러자 농민들은 깔끔하게 농사를 포기했다.
하지만 해로운 해충과 잡초를 먹고 사는 오리는 돌봐야 했다.
오리는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농부에게는 별도로 돈뭉치를 안겨주는 짭짭한 소득원이었다.
따로 할 일도 없었기에 농부들은 소일거리 삼아 오리를 키우고 있었다.
긴 장대를 어깨에 걸친 두 사람은 쩍쩍 갈라진 논을 보고 한숨을 내 쉬었다.
"이것들이 다들 어디로 갔나?"
"저기 둑 밑에 있지 않을까?"
"둑도 다 말라서 거긴 없을 거야."
"그럼 저수지뿐인데. 설마 거기까지 갔을까 봐?"
"지들도 살려면 어쩔 수 없겠지. 서두르자고 못된 족제비라도 만나면 큰일이니."
연은 착호갑사들에게 특명을 내렸다.
가끔이지만 호랑이나 늑대에게 물려갔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강원도와 함경도처럼 사람이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산림이 우거진 곳이 아니라면 호랑이나 늑대를 볼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늘어난 담비와 족제비들.
이상 기온으로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민가까지 내려와 행패를 부렸다.
가끔 멧돼지가 나타났지만, 고기 맛을 안 백성들에 의해 동네잔치의 제물이 되었다.
멧돼지는 운이 좋아야지만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농가에서는 다른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도시에 사는 백성들은 대학가요제 때문에 의견이 갈렸다.
"거, 대학생이면 성균관 유생들과 같잖아. 그런데 그런 유생들을 모아 놓고 노래 대회를 연다고? 내가 우리 폐하를 무조건 따르지만,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생각할 게 뭐가 있나? 요즘 것들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가 자랄 땐 이러지 않았잖아?"
"아니고 밖이고 난 자네 말에 관심이 없네. 생각해보게 우리가 힘들게 살았다고 요즘 것들도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러긴 하지만···."
말을 잇지 못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동료를 바라보는 중년인.
'쯔쯔'하고 혀를 차더니 한마디 했다.
"혹시 집사람 때문인가?"
"그건 아니고, 이놈이 내 라디오를 가지고 도망쳤네."
"뭐? 순식이가 그런 짓을 했어?"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라디오 없으면 못 살잖아."
"그치!"
"그런데 이놈이···. 에잇! 술이나 들세."
차마 아들이라 신고하지 못한 순식이 아버지는 짜증이 났는지 연이어 술을 들이켰다.
이런 일은 조선 전역에서 일어났다.
라디오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지 5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라디오는 비싼 기물이었다.
라디오가 없는 가정을 찾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라디오를 두 대 이상 보유하고 있는 가정도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라디오 방송 선택권을 놓고 다투는 가정이 많았다.
전 같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방송 선택권을 놓고 가장의 권유에 도전하는 가족 구성원이 은근히 많았다.
'아버지, 다른 방송 들으면 안 돼요?'
'안 된다.'
'아버지, 제발요. 새소식 나올 시간은 아직 멀었잖아요. 그때까지만 다른 방송 들을게요.'
'에이, 시끄럽다! 저리 가라!'
황실 소속인 조선방송국은 그러지 않았지만, 민간 방송국들은 더 많은 광고 수익을 위해 자극적인 방송항목들을 많이 내보냈다.
그러다 보니 새소식을 즐겨듣는 아버지와 새로운 방송항목을 찾아 듣는 자식들 사이에 방송 선택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선택권은 언제나 가장인 아버지에게 있었다.
아무리 배운 게 많더라도 자식이 아버지에게 대들 순 없었다.
그랬기에 순식이같이 라디오를 들고 튀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순식이에게 라디오를 강탈당한 순식이 아버지.
함께 자란 동무를 불러내 술을 마시며 짜증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방금 들어 온 소식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기뻐하십시오.
-조금 전, 두 번째 황자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어! 이건···."
"경사네! 경사야. 주모! 소리 좀 키워주쇼."
대학가요제를 이틀 앞두고 두 번째 황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조선 백성 모두에게 흥분을 안겨주었다.
주모는 라디오 소리를 최대로 키우고 꼼꼼히 듣더니 황동으로 만든 조그만 종을 잡고 흔들었다.
"자! 내 오늘 너무 기뻐서 황금종을 울릴게요. 그러니 마음껏 드시고 함께 기뻐합시다. 세상에나 둘째 황자께서 탄생하시다니···."
황후는 큰딸 명화 공주 이후 태자인 순을 낳고 내리 3명이나 되는 공주를 출산했다.
그런데 이번에 아들을 낳았다.
이 소식은 황실의 안정을 원하는 조선 백성 모두에게 경사였다.
그랬기에 주모는 과감히 황금종을 울린 거였다.
"주모, 안주도 공짜요?"
"에이, 그건 아닙니다. 저도 먹고살아야죠."
주모가 눈짓을 하자 말을 꺼낸 이는 급히 입을 열었다.
"그렇죠. 그럼 이 돈 만큼 안주를 내오시오. 다 같이 축하합시다."
"그래요? 그럼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죠. 여기 내 돈도 받으시오."
"여기 내 돈도 있소."
먹고 살기 힘들었을 때도 염치(廉恥)를 챙겼던 조선의 백성들.
먹고 사는 걱정이 없어지자, 인심이 더욱 후해졌다.
동역에서 시작된 이런 문화는 중역을 거쳐 서역, 신역까지 전파됐다.
생김새는 달라도 조선말을 쓰고, 조선의 황제를 섬기는 사람이라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기본이었다.
게다가 유교 탈레반을 자처하는 학생들이 모범을 보였기에 넘치는 곡간만큼 인심도 넘쳐났다.
배가 고파서 자식까지 잡아먹었다는 경신대기근.
그런 대기근은 조선 영토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함께 어울려 즐기는 문화가 퍼지고 있었다.
* * *
작지 않은 영토를 가진 왈라키아 공국.
그동안 오스만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눈치를 보고 살 수밖에 없었다.
연에 의해 두 제국이 망해버린 통에 독립을 선언할 수 있었지만, 그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동안 두 제국의 힘을 믿고 제국의 앞잡이가 되어 공국을 엉망으로 만든 자들.
민생은 돌보지 않고 권력을 잡기 위해 정적 제거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랬기에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지만, 발전할 수 없었다.
연은 이런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전생에서 겪은 아픈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였다.
왜놈과 떼놈들의 침략을 겪은 후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조선이 망한 후, 왜놈들의 핍박을 받다가 끝내 둘로 갈라진 전생의 조국.
연의 기억 속에 갈라진 조국은 합쳐지지 않았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글을 쓰는 한민족(韓民族, Ethnic Koreans)은 서로 총구를 겨누고 화합하지 못했다.
그런 나쁜 기억이 있었기에 연은 왈라키아 공국에 관해 문식이에게 물었다.
연의 기억으론 왈라키아 공국은 루마니아와 몰도바로 나누어져 있어서 자세히 알고 싶어서였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근데 우리완 달라.
"뭐가 다른데?"
-우린 좌우 진영이 나눠 가지는 통에 그리됐지만, 왈라키아 공국은 공산화된 소련 때문에 그리된 거야.
"그래?"
-응. 그런데 어찌하려고?
"너도 알다시피 아직 국경이란 개념조차 별로 없잖아?
-그건 그렇지.
"그러다 보니 국경 주변이 엉망이야. 그래서 이번에 정리 좀 하려고."
-그래? 어떻게 할 건데?
"장벽까지 쌓지는 않고, 무단 월경하면 강하게 처벌하라고 했어."
-잘했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보여줘. 감히 어디서 수작이야.
문식이도 거침이 없었다.
중원 세 나라의 난민들이 조선의 영토인 산동반도를 엉망으로 만든 일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랬기에 되려 더 화를 냈다.
-월경자만 처벌하지 말고, 단속하지 않으면 교역을 끊겠다고 해.
"그래도 될까?"
-안 될 게 뭐가 있어. 지금이면 먹을 풀조차 없을 테니 알아서 기겠지.
문식이의 조언을 들은 연은 이번 기회에 주변국과 관계를 다시 정립하기로 했다.
연은 외교원장 조경과 통상부 장관 서필원을 불렀다.
둘째 황자의 탄생으로 축하 사절들을 접대하기 바쁜 조경과 수많은 나라에서 곡식을 빌려달라는 요청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서필원이 바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다. 폐하.""
"급히 전할 일이 있어 이리 찾았소."
"무슨 일이옵니까?"
"즉시 주변 인접국에 통보하시오. 앞으로 무단으로 조선 땅을 넘어 온 자들은 즉시 처벌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따로 묻겠다고 전하시오."
조경은 서필원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연에게 물었다.
"폐하, 책임을 어디까지 물으실 의향이십니까?"
"교역부터 차단할 생각이오."
"알겠습니다. 폐하.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의 집무실을 나온 조경과 서필원은 서로를 보고 활짝 웃었다.
답답했던 속이 확 풀리는 듯했기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폐하께서 용단을 내리셨으니 강하게 나갑시다."
"알겠습니다. 원장님. 그러지 않아도 꼴 보기 싫었는데, 이번에 끝장을 내겠습니다."
그동안 힘이 있어도 정리하지 못했던 주변국과의 관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자, 두 사람은 신이 났다.
"좋게 좋게 대해주니 놈들이 겁이 없어졌소. 이번에 그 버릇을 확실히 고쳐 놓읍시다."
"그리하겠습니다. 원장님. 이번에는 홍익을 들먹이더라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강한 의지를 표방하는 두 사람으로 인해 중원은 또다시 더 많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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