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대기근과 함께하는 문화(5)
여진족 출신 예맥 기병대 중대장 아타이는 휴가를 신청할 수 없었다.
정기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정찰 임무가 끝나면 짧게나마 고향에 다녀왔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조선전력공사 경비대를 총괄하는 대붕에서 특명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자! 자! 힘들 내자고. 땅이 얼었더라도 깊이 파야 한다."
"중대장님,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대충 세우고 날이 풀리면 그때 다시 설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되지만, 두 번 일할 순 없잖느냐. 그러니 꼼꼼히 박아서 단단히 세우도록 해라."
"알았습니다."
아타이의 말에 대원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이처럼 눈이 많이 쌓인 한겨울에는 대부분 시간을 뜨뜻한 요새 안에서 보내거나 휴가를 내고 고향에 가서 쉬다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국경을 담당하는 예맥 기병대 전체에 비상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꽉 잡아! 손 조심하고."
"너나 조심해. 애먼 내 손 때리지 말고."
2인 1조가 된 대원들은 100m 간격으로 푯말을 세우고 있었다.
푯말에는 그림과 함께 '이곳부터는 조선의 영토이다. 무단 침입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사살한다'고 적혀 있었다.
문구도 문구지만 그림 또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되어 있는 국경 경계선을 넘어가는 자에게 경비대원이 총구를 겨누고 쏘는 매우 직관적인 그림이었다.
"그런데 이 경계선을 넘어오면 무조건 사살해야 하는 거야?"
"명령이 떨어졌으니 해야지 않겠어?"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냐?"
"심해도 할 수 없지. 괜히 봐주다가 우리까지 엮여 들어갈 수 있다고 했으니 눈 딱 감고 쏴버려야지."
"눈 감고 쏘면 괜찮을까?"
"괜찮겠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얼마 전 비상대피소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의 파장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왈라키아 공국의 권력투쟁으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냥 넘길 순 없었다.
2명이나 되는 공국의 왕자가 비명횡사했기에 외교적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후 10일 만에 나타난 왈라키아 공국의 대신들.
중대장 아타이의 안내로 사건의 개요를 듣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런 후, 막무가내로 해당 대원들을 처벌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씨도 먹히지 않는 요구였다.
그 말을 들은 연은 불같이 화를 냈다.
모든 국경에 푯말을 세우고 무단 침입자는 가차 없이 사살하라 명했다.
단순히 화가 나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중원에 있는 세 나라의 백성들이었다.
* * *
조선을 섬기고자 마음먹은 대명의 정성공은 그동안 따랐던 해적들을 하나하나 토사구팽하고 있었다.
신분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위해서였다.
그래야만 이 험난한 정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나라, 후금, 남명 이 세 나라는 그리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무를 숭상하던 청나라와 후금은 무력에 의한 신분제도가 철저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
남명 또한 지방 호족 세력들의 힘이 필요했기에 신분제를 타파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세 나라는 먹을 곡식이 부족했지만, 조선에 식량을 원조해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조선이 대놓고 '우방국이 아니면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겠다'고 공포(公布)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세 나라는 드넓은 곡창지대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추수하는 동안은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추수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정이 달라졌다.
세금도 세금이지만 예년보다 확 줄어든 곡식 수확량 때문이었다.
세 나라는 지속된 전쟁으로 농토가 망가지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민란의 조짐이 보이자 휴전했다.
'우리끼리 싸워봐야 조선만 득이 되오.'
'맞소. 비록 조선이 이 중원을 넘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게 생겼소. 그러니 이만 전쟁을 끝냅시다.'
'무슨 말이오? 아직 결판을 내지 못했는데 전쟁을 끝내다니, 나는 찬성할 수 없소.'
미리 말을 맞췄는지 청나라와 후금의 외교 대신이 전쟁을 끝내자고 했지만, 남명의 대신은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남명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곡창지대인 무한(武漢) 북쪽 지역을 청나라에 빼앗겼고. 또 다른 곡창지대인 항주(杭州) 북쪽 지역은 후금에 빼앗겼기에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남명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 두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말이오?'
'뭐요? 설마···!'
남명의 대신은 놀라 따지려 했다.
하지만 빙긋이 웃고 있는 두 나라의 대신들.
남명의 대신은 그제야 깨달았다.
청나라와 후금이 미리 말을 맞췄다는 걸.
남명의 대신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일을 풀어나갔다.
'두 나라 대신들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우리 남명도 따라야겠지요. 그런데 이건 어떻소?'
'뭘 말이요?'
'무슨 좋은 의견이라도 있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일단 휴전으로 합의합시다. 이 상태로 끝내면 쌓인 문제는 어찌해야 하오. 그러니 일단 휴전한 후에 다시 생각해 봅시다.'
서로 원수같이 지내던 청나라와 후금.
지속된 전쟁과 이상 기온으로 식량 조달이 어려워졌다.
두 나라 사이에 쌓인 원한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에 종전보다는 휴전이 더 좋아 보였다.
그랬기에 어쩔 수 없이 말을 맞춘 청나라와 후금이지만, 휴전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 나라는 종전이 아닌 휴전협정을 맺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뭐라고? 육안(六安)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뭐시! 안경(安庆)에서 민란이 일어났다고?'
'이놈들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어디···, 금화(金花)라고 했나?'
추수가 끝났지만, 곡식을 모두 세금으로 빼앗기자 중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세 나라는 이를 단숨에 진압할 힘이 없었다.
지속된 착취를 참지 못한 민심이 들불처럼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기에 효율적인 진압을 할 수 없었다.
굶어 죽느니 관청이라도 털어 배불리 먹고 죽겠다는 백성들을 막을 수 없었다.
이때 후금의 왕이 된 도르곤이 나섰다.
'민란이 일어난 곳에 세작(細作)들을 보내 소문을 퍼트려라.'
연은 전쟁 주범인 도르곤을 치료까지 해주고 살려서 돌려보냈다.
큰아버지인 소현세자와 아버지인 효종에게 예를 다한 도르곤이었기에 그리 한 거였다.
하지만 도르곤은 당장 살아남아야 했기에 그런 조선을 이용하기로 했다.
자국에서 일어난 민란을 효율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죽을지도 모를 사지로 백성들을 몰아넣었다.
그곳은 바로 산동반도였다.
'산동에 가면 먹을 것이 남아돈다고 하는데 들어 봤어?'
'들어는 봤는데, 그러다 총 맞아 죽으면 어떡해?'
'그럼 이대로 굶어 죽을 텐가? 조선군은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해치지 않는다고 하니 산동으로 가자고.'
세작들의 선동으로 민란을 일으킨 후금의 백성들은 산동반도로 몰려갔다.
이 소식을 들은 청나라 백성들은 산동반도나 북쪽으로 몰려갔고, 남명 백성들은 배를 타고 산동반도나 대만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다 보니 산동반도만 아니라 북쪽 국경까지 굶주린 중원 사람들로 넘쳐났다.
급히 예맥 기병대를 파견하여 월경(越境)을 제지했지만, 다 막아낼 순 없었다.
연은 이 소식을 듣고 고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서역처럼 먹을 것 때문에 국경을 넘어 온 거면 비상대피소에 마련해 놓은 식량을 가지고 돌아갔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들은 달랐다.
중원에서 온 난민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조선으로 들어가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괜찮았다.
조선의 법이 무섭다는 것을 알았기에 중원에서 조선으로 들어 온 사람들은 무척이나 조심하고 얌전히 지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문제가 지속해서 발생했다.
조선 도심 곳곳에서 발견되는 지저분한 그들을 모아 함께 살 곳을 마련해주고 먹을 식량까지 공급해줬지만, 그들은 조선의 법을 따르지 않았다.
제공해준 마을 단위로 모여 살던 중원의 백성들.
자체적으로 법을 정하고 돈거래를 하면서 사형까지 집행했다.
그런 사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었지만, 자기들 마을을 벗어나서는 사고를 치지 않았기에 그냥 모른 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산동반도에 사는 조선 백성 중 반이 넘는 이들이 중원 사람들이다.
원래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던 이들이었기에 조선의 영토가 된 후에도 이들은 조선인으로 받아들여졌다.
대부분 농노였던 이들은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되려 바뀐 세상을 찬양하고 그런 세상을 만든 조선을 따랐다.
하지만 각박한 중원에서 살다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산동반도로 넘어 온 중원인들.
그동안 살면서 배웠던 못된 짓을 버리지 못했다.
그건 바로 '남을 속여 이득을 보는 사기'였다.
조선에서는 살인보다 사기가 더 큰 중죄라는 걸 알면서도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알코올로 가짜 술을 만들어 싸게 팔았다.
그런데 그 술을 마시고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조선의 백성들이 죽은 사건이라 국정원에서 나섰지만, 단 한 명의 범인도 검거할 수 없었다.
사건을 일으킨 범인들은 돈을 챙긴 후 이미 산동반도를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강력히 항의 했지만, 세 나라는 서로 자국민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고 발뺌을 했다.
또한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있기에 설사 범인들이 자국민이라 하더라도 잡을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자국민들을 탄압하지 말라고 되려 조선에 항의했다.
최근에 일어난 이 일로 연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중원으로 쳐들어갈 순 없었다.
경신 대기근이 바로 앞이고 그 기간에 조선의 문화를 꽃피우고자 계획을 세웠기에 전쟁을 일으킬 순 없었다.
또한 아직도 중원에는 8천만 명이 넘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고, 이들을 조선인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명의 백성들은 물론 청나라와 후금의 백성들 또한 조선의 백성들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주 달랐다.
조선 백성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와 달리 중원 백성들은 비리를 봐주면서 서로 얽힌 인간관계를 중시했다.
그랬기에 답이 없었다.
정직한 조선인으로 교화시킬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연은 쌍식이와 머리를 짜냈다.
그중 하나가 국경을 강화하고 월경자는 무조건 사살한다는 방침이었다.
* * *
연은 부상당한 왈라키아 공국의 3 왕자를 만났다.
왕자는 또렷한 조선말로 연에게 예를 올렸다.
"그동안 흠모하던 폐하의 용안을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그대가 세르반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왈라키아 공국의 3 왕자인 세르반은 조선의 발달 된 의술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거다.
몸 곳곳에 네 대나 되는 화살이 박혀 있었기에 죽었는지 알았지만 살아있었고, 의무 대원의 빠른 응급처치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 세르반이었기에 연이 앉으라는 손짓을 했지만, 그대로 서서 연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 폐하께서 이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 은혜 지금으로선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를 주신다면 하늘과 같은 폐하의 은혜를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어디서 알았는지 세르반은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찍으며 간절하게 연에게 부탁했다.
"일단 앉으시오. 그래야 어찌 도와줄지 의견을 나눌 수 있지 않겠소?"
"폐하,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저처럼 미천한 자는 폐하의 용언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흠···, 그렇다면 말을 놓겠다."
"네, 폐하."
그제야 세르반은 연의 건너편에 앉았다.
"조선에서 수학했다 들었다."
"맞습니다. 폐하. 저는 1년 전까지 세종대학교의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국의 앞날이 걱정되어 급히 귀국했습니다."
"흠···."
세르반의 아버지이자 왈라키아 공국의 왕인 마테이 바사랍은 원래라면 일찍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에서 수입한 약으로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자 기다리지 못한 1 왕자와 2 왕자가 손을 잡고 반란을 획책(劃策)했다.
그걸 감지한 3 왕자 세르반이 급히 귀국하여 바로 잡고자 했지만, 되려 암살 위험에 처했다.
그래서 조선으로 급히 도주하려했다.
하지만 2 왕자가 이끄는 병사들에 의해 세르반을 따르던 이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도와주십시오. 폐하. 폐하께서 이끄시는 대조선은 홍익을 추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폐하를 저는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습니다. 폐하, 우리 왈라키아 공국은 조선의 우방국은 아니지만, 정식으로 수교를 맺은 나라 아닙니까? 더구나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폐하께서 이끄시는 대조선은 천국이나 다름없지만, 우리 공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오스만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살아남은 불쌍한 우리 공국의 백성들을 조금이나마 생각해 주십시오."
세르반이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말하는 동안 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더니 단상을 툭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이 그대를 대놓고 도와줄 순 없다. 하지만 그대가 원하는 지원은 해줄 수 있다."
"참말이십니까? 폐하."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면 그대는 짐의 지원을 받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폐하."
다시 넙죽 엎드려 머리를 찍는 세르반.
연은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도 한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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