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대기근과 함께하는 문화(4)
17세기 말에 정점을 찍은 소빙하기는 15세기 말부터 시작됐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x선비들의 견제에도 구휼(救恤) 정책을 펴서 백성들의 삶을 돌봤다.
그랬기에 조선에서는 중종 6년(1511)부터 진휼청을 상시 운행하고 있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조선의 인구는 늘어났지만, 양난으로 인해 세계 10대 강국 안에 들어가던 조선은 처참히 망가져 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왕이 죽지 않아 조선이라는 나라는 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망가져 갔다.
무능한데 정치적으로만 똑똑한 선조와 인조.
정적도 아닌데 정적이라 생각하고 모함하여 죽이는 데 모든 힘을 쏟다 보니 조선이라는 나라는 가라앉았다.
백성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상황에 부닥쳤다.
골이 깊을 수록 산이 높다.
바닥을 찍은 조선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주변 정세가 안정되었기에 왕과 신하들만 정신을 차리면 똑똑한 백성들이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되려 백성들을 착취하는 간신들과 척신들에 의해 조선의 왕들은 놀아났다.
그로 인해 조선이라는 나라는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연으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었던 효종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났다.
"언제 보여 줄 거냐?"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버지."
"저 달 말이다. 달까지 사람이 갈 수 있었다며?"
아침 일찍 일어난 연은 효종이 운동 삼아 무예를 닦는 연무장(演武場)을 찾아갔다.
북한산 자락 아래 넓게 펼쳐진 잔디밭 한쪽.
21세기에 청와대 춘추관이라 불리던 곳.
그곳에는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연무장이 있었다.
눈밭을 뛰어서 그런지 거친 트림과 함께 가쁜 숨을 내지르며 고개를 젖히는 말을 쓰다듬고 있던 효종의 말에 연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떠오르는 동녘 햇살을 무시하고 희미하게 떠 있는 달.
유난히도 커 보였다.
"지금 준비 중입니다. 늦어도 10년 안에 달에 위성을 보낼 겁니다."
"흠, 달에 사람이 가는 걸 보려면 오래 살아야겠구나."
"건강하시니,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런데 어쩐 일이냐?"
"상의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주변국 때문이더냐?"
"네, 아버지."
연은 효종과 함께 다과를 들면서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들을 설명했다.
"음···, 네 말인즉슨 조선인을 더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여기서 멈춰야 할지 조언을 달라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조선으로 넘어와 조선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범죄사실이 없는 한 거주증을 발급해 주고 조선에서 살게 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국들의 항의 가 빗발쳤다.
그렇다고 신경 쓸 효종이나 연이 아니었다.
철도를 따라 도시를 조성하고, 농장과 목장은 마을 단위로 만들어 놓았다.
예맥 기병대는 훈련을 겸하여 조선 전역을 순찰하고 다녔고, 주민증이나 거주증이 없으면 바로 체포했다.
그런 조선이기에 어디서나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주변국들은 아니었다.
신분제를 폐기하면 조선의 우방국이 될 수 있고 지원도 받을 수 있지만, 그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되려 신분제를 강화하고 자국 백성들을 감시하고 탄압했다.
그런 그들의 항의를 신경 쓸 연이 아니었기에 조선은 우방국이 아닌 주변국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청나라와 후금, 남명이 대표적인 나라였다.
연에 의해 동서남북 4곳으로 나누어진 중원.
그중 정성공이 이끄는 대명만 성장하고 있었고, 다른 세 나라는 갈수록 망가져 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기름진 땅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고 싸우다 보니 농사를 지을 땅은 사라져 갔다.
게다가 이상기온으로 추수량이 감소하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중원의 백성들이 조선의 영토로 넘어오고 있었다.
"흐음···."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처럼 효종의 몸에서도 김이 피어올랐다.
"아버지, 이러다 고뿔이라도 걸리시면···."
"걱정 마라. 그런 일 없었다. 그나저나 문제구나. 홍익을 천명한 조선인데···, 쉽지 않은 일이구나···."
거대한 영토와 다인종 다민족 국가가 된 조선.
그런 조선을 하나로 묶기 위해 효종은 홍익을 내세웠다.
모든 인간에게 이롭게 하는 정책을 세우고 백성들의 삶을 고루 살폈다.
그랬기에 조선의 모든 백성은 황실을 따랐고, 황실 기업인 조선전력공사를 흠모했다.
그런 조선을 만들어 놓고 인제 와서 말을 바꿀 수는 없는 일.
부자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연아."
"네, 아버지."
"네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지만, 모두 다 보살필 순 없단다. 저길 보렴. 세상을 밝히는 태양이지만, 그늘진 곳은 어찌할 수 없지 않으냐? 그러니 이젠 정리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잘못도 없는데, 욕을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알겠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연은 효종에게 공손히 예를 올리고 연무장을 떠났다.
* * *
왈라키아 공국의 대사인 미르체아는 한양에서 사는 삶이 너무나 즐거웠다.
공국의 수도인 부쿠레슈티만 봐도 온통 오물 냄새로 찌들어 있었지만, 한양은 어느 곳이나 상큼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항상 밝게 웃고 다녔다.
먹을 것은 남아돌았고, 아픈 이도 거의 없었다.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한양에서 살 수 있는 대사로 임명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뇌물을 바쳤던가.
"도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야?"
공국에서 데려온 하녀들이 푸짐하게 아침을 준비해 놓았지만, 어제저녁에 받은 연락 때문에 한숨만 나왔다.
비록 소국이지만 조선과 맞닿아 있는 왈라키아 공국이라 조선과 정식으로 수교를 맺고 대사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떠오르는 태양과 비교되는 조선과 수교는 꿈조차 꿀 수 없었을 거다.
"여기 시원한 물 좀 가져오너라!"
미르체아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찬물을 찾을 정도로 속이 답답했기에 짜증이 난 거였다.
형식적으로는 조선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을 보호하고 무역 거래에서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일하고 있는 미르체아다.
하지만 그가 하는 진짜 임무는 자국민들과 무역으로 발생한 이익을 감시하고 세금을 매기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성을 사고도 남을 재산을 축적해 놓았다.
"젠장!"
손가락 사이로 뽑혀 나온 머리카락을 보고 미르체아는 다시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디 도망갈 수도 없고 미치겠네."
어젯밤에 연락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조선의 외교원 원장인 조경이었다.
그런 이가 직접 연락을 줄 정도이니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황제가 찾는다니 도대체 뭔 일이지?
더구나 만나야 할 상대가 조선의 황제라는 말을 들었다.
한 나라의 대사로써 한양에 기거하고 있지만, 조선의 황제는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황제가 찾는다니 기뻐해야 했지만, 두려웠다.
"에잇! 모르겠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자국민에게 갑질하며 돈을 뜯어낸 적은 있어도 조선인에게는 일절 해를 끼친 적이 없기에 미르체아는 걱정을 잠시 감춰 두었다.
* * *
효종을 만나고 온 연은 즉시 외교원 원장 조경과 통상부 장관 서필원을 불렀다.
관료 중 중신 이상은 경복궁 동쪽 북촌에 주거할 수 있는 관사를 제공했기에 두 사람은 바로 달려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이리와 앉으시오."
""네, 폐하.""
연은 두 사람에게 차를 내오게 하고 말을 꺼냈다.
"두 분을 이렇게 아침부터 부른 이유는 주변국과 관계를 정리하기 위함이오."
"이른 아침부터 부르시다니 무슨 큰일이 있사옵니까?"
조경과 달리 무역 관계만 담당하는 통상부 장관 서필원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에 궁금한지 물었다.
"어제 왈라키아 공국의 왕자 한 명을 사로잡았고, 다른 한 명은 사살했소."
"예에?!"
"그래서 이번에 주변국과 관계를 정리하고자 하오. 그러니 의견이 있으면 바로 알려 주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깜짝 놀란 서필원은 넌지시 조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조경에게 힐책을 하는 거였다.
"조 원장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있소. 그러니 책망하지 마시고 내 말을 잘 듣고 판단해 주세요."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한참 연의 말을 듣고 난 두 사람은 주먹을 움켜주었다.
"이놈들이 감히! 폐하, 무슨 일 때문에 그런 짓을 벌였는지 알 순 없으나 단단히 혼을 내야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 조선은 대국이 되었지만, 그 어떤 나라도 항상 예를 다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토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니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예상과 달리 불같이 화를 내는 두 사람.
연은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그들부터 달래야 했다.
"진정들 하시오. 지금 사로잡은 왕자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있으니 왕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나서 판단합시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왈라키아 공국의 대사는 만날 필요가 없겠습니다."
"아니오. 그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오는 대로 이곳으로 데려오시오."
"네, 폐하.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경과 서필원이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경이 미르체아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긴밀히 불렀기에 연과 마주 앉은 미르체아는 긴장했는지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조경의 설명이 계속되자 급기야 미르체아는 사레에 걸린 것처럼 헛기침을 계속했다.
그런 그에게 물을 주자 벌컥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폐하! 황공하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공국의 내부 문제입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사!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다른 곳도 아닌 우리 조선의 영토까지 쳐들어와 정적을 죽이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원장님, 그렇다 해도 이미 죽은 자 아닙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적당히 처리하고 넘기셔도 될 듯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적당히 처리하라니, 이 나라 조선에선 절대 그럴 수 없소."
조경의 단호한 언질에도 미르체아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잘못하다간 조선과 국교가 단절될 수도 있는 큰 사안이라 봤기 때문이다.
"원장님. 우리 왈라키아 공국은 작디작은 소국입니다. 그런 소국의 일에 대조선이 나설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대사, 작다고 하셨습니까?"
"네, 원장님."
"그런 작은 공국에도 우리 조선은 최선을 다해 예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사라면 어찌하겠습니까?"
"저라면 조공을 받는 것으로 적당히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런···. 쯔쯔쯔."
조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면서 속으로 대사를 욕했다.
'우리 조선도 저런 놈들이 많았기에 양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왈라키아 공국도 곧 망하겠구나.'
조경은 무신이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정도로 정무 감각 또한 탁월했다.
그랬기에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부탁으로 중군장이 되었고 함께 행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이이첨 등의 사간들에 의해 수십 차례나 탄핵을 당했다.
그런데도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효충장의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는 훈호를 하사받았고, 풍양군에 봉해질 수 있었다.
그만큼 조선과 조선의 백성들을 사랑했던 조경이라 왈라키아 공국의 대사인 미르체아의 말에 화가 났다.
그렇지만 대 놓고 화를 낼 순 없는 법.
조경은 넌지시 연에게 말을 건넸다.
"폐하, 대사의 말처럼 소국의 일에 관여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왈라키아 공국과 국교와 통상을 단절하심이 옳을 듯합니다."
"원장님!"
조경의 말에 깜짝 놀란 미르체아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목에 검수의 칼날이 드리워져 있었다.
동시에 조경이 외쳤다.
"이놈! 감이 어느 안전이라고 이리 방자하게 구느냐!"
목에서부터 시작된 따끔하고 서늘한 감촉과 함께 조경의 외침에 놀란 미르체아는 입조차 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왈라키아 공국에서 잘나가는 백작이었던 미르체아였기에 잠시 정신을 놓고 행동했지만, 이곳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아둔하여 잠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됐소. 대사는 자리에 앉아 내 말을 잘 들으시오."
"경청하겠습니다. 폐하."
"그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듣자 하니 부상을 당한 왕자야말로 왈라키아 공국을 이끌만한 인재 같구려."
"맞습니다. 폐하. 3 왕자께서는 이곳 한양에서 수학도 하신 우리 왈라키아 공국의 희망입니다."
연은 조경을 보고 씩 웃더니, 정색을 하고 말을 꺼냈다.
"잘 들으시오. 그대는 3 왕자를 따를 생각은 있소?"
"네?! 폐하 그게···."
"이미 2 왕자는 죽고 첫째만 남았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첫째가 개차반이라니, 그런 자를 따를 생각이오?"
"폐하!"
뇌물로 조선의 대사로 올 수 있었다고 하지만, 미르체아는 기본적으로 영리한 자였다.
따라서 연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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