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대기근과 함께하는 문화(1)
오백 명이 넘는 재판관들과 그보다 많은 청탁했던 백성들을 사형에 처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거 들었나?"
"들었지. 정의롭게 판결해야 하는 재판관이란 놈들이 일법회란 걸 만들어 악용했다며?"
"맞아. 놈들이 백성들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 태황과 폐하께서 만드신 법을 악용하여 황실을 욕보였다고 하네."
"이런, 지옥도에 처박아 버릴 놈들 같으니라고."
"그러게 말이야. 감히 누굴 속이려고 해."
이젠 예맥대륙 동쪽 끝 한반도에 박혀 살았던 조선의 백성들이 아니었다.
중원의 눈치만 보고 살았던 조선의 백성들은 없었다.
예맥 대륙 북부뿐만 아니라 신대륙 북부와 남반구 호주 대륙까지 영토로 삼은 조선의 백성들은 그 누구보다 자존감이 높았다.
세상의 절반을 차지한 조선이기에 백성들 또한 그에 맞는 생각과 의지가 있었다.
그랬기에 재판관들이 행한 일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 지장 좀 찍게나."
"뭔데?"
"놈들을 공개 처형하자는 청원서네."
"그래? 그럼 당연히 찍어야지."
백성들을 사랑했던 효종.
어진 성품에 역적조차 죽이지 않았다.
물론 그런 놈들을 죽이지 않아도 될 만큼 강했고, 모든 백성이 화합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효종에게 애민사상이 있어서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저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애민사상을 정식으로 논했지만, 그전에도 애민사상을 논한 이가 있었다.
통치행위를 현대적으로 조명(照明)했다는 정도전이었다.
아무튼 효종은 단 한 번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지만, 황제가 된 연은 달랐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사형에 처하기로 한 죄인들은 세균 같은 자들이라 그냥 둘 경우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죄인들은 두창 같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해로운 균이라 필히 박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들을 공개 처형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소식이 나가자 백성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마을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광장에 모인 백성들.
그곳에서 사형에 찬성한다는 지장을 찍어 광장에 옆에 있는 관공서에 제출했다.
백성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특히나 똑똑하기로 소문난 조선의 백성들이라 사리 판단을 할 줄 알았다.
이 모든 건 언론이 수작을 부릴 수 없게 초반부터 안전장치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조건만 되면 신문사나 방송국을 세울 수 있는 조선이다.
또한 영토가 너무나 넓었기에 지역에 특화된 신문사나 방송국도 필요했다.
그래서 언론사를 만든다고 하면 조선전력공사에서 창업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단, 조건은 진실만 보도한다는 것이었다.
진실만 보도한다면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았기에 언론사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하지만 진실이 아닌 사익으로 소식을 전한다면 사기죄로 엄벌하기로 했다.
새소식이 나가더라도 사실이 아닌 내용이 발각되면 사주부터 죄를 묻기로 하였기에 지금까지 문제가 없었다.
사주부터 나서서 발표하기 전에 사실 확인을 꼼꼼히 했기에 가짜 뉴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을 광장에 있는 단상에 누군가 올라가더니 모여 있는 백성들에게 물었다.
"생각들 해보게,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줄 꿈이나 꿔봤나?"
"꿈은커녕 생각조차 해본 적 없소이다!"
누군가 큰 소리로 대답하자 단상에 올라선 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꾹 참고 있던 말을 주저리 늘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백성들은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아, 그러지 말고 어르신! 어르신께선 의원 선거에 나가 보시지 그러십니까? 어르신이라면 우리 백성들을 위해 좋은 법을 만들어 주실 게 틀림없습니다."
"맞소! 어르신을 의회로 보냅시다."
"""와···!"""
양난으로 무너진 조선은 끔찍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강한 대국으로 만든 사람이 있었고 그가 누구라는 걸 백성들이 모르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연에 의해 이루어진 놀라운 결과.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었기에 백성들은 연에게 환호했고 열광했다.
"내 그럼, 여러분들을 뜻을 받들어 이 마을 대표로 의회에 출두 한번 해보겠소."
"""와···!"""
"이는 결코 내가 출세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오. 폐하께서 저리 노력하시는데 못된 놈들이 깽판을 치다니. 내 죽더라도 이런 놈들이 설치는 꼴은 볼 수 없소. 그래서 의회에 출두하려 하오!"
"""와···!"""
연이 사행을 집행했던 이유는 본보기였지만, 이 일로 인해 민의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
재판관들의 못된 짓이 낱낱이 공개되자 울분을 참지 못한 백성들이 나섰다.
그리고 그런 백성 중에서 정치에 뜻을 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소. 견제받지 않은 권력은 부패한다고. 그래서 폐하께서도 경행식 총리에게 국정을 맡기고 뒤에서 지켜보시기로 하셨다 하오. 세상에 이런 군주가 어디 있소."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소!"
"맞소!"
"나도 들어본 적 없소!"
백성들의 반응이 뜨거워지자 단상에 오른 이는 더욱 신이 나서 자신의 출사 이유를 밝혔다.
"권력은 마물이라 부자간에도 권력 다툼이 일어나면 피가 난무했지요. 그런데도 권력을 내려놓는 폐하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나서기로 했소. 권력자들이 비리를 저지르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감시하겠소."
"""와···!"""
1년이나 남은 의원 선거지만, 여기저기서 갖가지 이유를 들먹이며 출사표를 던지는 백성들이 많았다.
출사표를 던진 백성들은 대부분 평민이었거나 종살이를 했던 이들이었다.
그냥 있다가는 이 좋은 세상이 망가질까 두려웠던 그들은 자라나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권력자들이 나쁜 짓을 못 하도록 감시하기로 했다.
조선 제국력 10년(1669) 11월.
경상도에 지진과 태풍이 불고 조선 전역에서 자연 이변이 속출하는 가운데.
일법회 재판관들이 근무했던 재판장 앞에서 공개 처형식이 거행되었다.
전처럼 목을 베거나 돌로 쳐죽이지 않고 총살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백성들은 만족했다.
총살당한 이 중에는 황실 종친도 있었기에 대놓고 환호하진 않았지만, 연의 공정성을 믿고 안심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누구라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사고가 깊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첫눈이 내렸다.
세상을 좀먹었던 이들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 * *
남산에 현대식 천문대가 세워진 후.
조선의 천문학은 나날이 발전해 갔다.
해안가 곳곳에 등대가 세워지고, 내륙에는 높은 탑이 세워지면서 각 지역에서 날씨에 관한 정보들을 모을 수 있었다.
황실위원회 직속 기관인 천문원은 별도로 기상청을 두고 이런 정보들을 모아서 분석했다.
-연말을 맞이하여 내년 기상정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기상청 발표에 의하면 내년에는 천재지변이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농업이나 목축업을 하는 농가의 피해가 예상됩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폐하께서 피해를 보더라도 전부 보상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경신 대기근이 바로 앞에 다가오자 연은 기상청을 이용해 백성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기상청에서는 내년과 내 후년, 이 두 해 동안 천재지변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해질 거로 예상했습니다.
-따라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준다고 합니다.
-또한 그 기간에 더 많은 농지와 목축지, 관계 시설 등을 확충한다고 하니 농민 여러분은 관공서로 가셔서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시길 바랍니다.
연은 경신 대기근을 기다리면서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 백성 모두가 5년 동안 먹을 곡식들을 비축해 놓았고, 혹시 모른 전염병을 대비해 약도 충분히 생산해 놓았다.
이렇게 단단히 준비해 놓았기에 연은 다른 일을 기획하고 있었다.
수복이 눈이 쌓인 경복궁을 거닐던 연에게 쌍식이가 다가왔다.
"폐하, 경행식 총리로부터 계획서를 받아 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연은 쌍식이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행식이가 만든 계획서를 검토했다.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던 쌍식이가 슬쩍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기 적힌 게 참말입니까?"
"참말이다."
"그럼 내년부터는 신역까지 바로 갈 수 있겠습니다."
"그건 어려울 거다. 최대 항속거리가 5,000km 정도라 신역까지 바로 갈 순 없다."
"아, 항속거리가 문제네요. 그렇다고 기름통을 더 실을 수도 없고···."
박람회 때 창공이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비행기는 그동안 꾸준히 개선되고 있었다.
전쟁을 억지하기 위해서라도 폭격기를 개발해야 했기에 무거운 폭탄을 왕창 싣고도 멀리 날아가야 했다.
그래서 엔진부터 동체까지 수도 없이 만들어 날렸다.
최종 목표는 10,000km까지 쉬지 않고 날 수 있는 비행기였지만,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1만km까지 날 수 있어야 중간 기착지 없이 태평양을 건널 수 있기에 그리 한 것이지만, 엔진의 내구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백성들과 짐을 싣고 운항하는 여객기라 안전을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연은 적정선에서 개발을 중단하라 말했다.
당장 예맥 대륙 안에서 비행기를 운항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그렇다 해도 동역에서 신역까지 갈 수 있는 노선을 만들어 놓았다.
"더 좋은 엔진이나 제트기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북해도와 북서(앵커리지)를 거쳐야만 신역으로 갈 수 있으니 여기 나온 계획대로 운항 시간을 짜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연은 다시 계획서를 꼼꼼히 살폈다.
행식이가 만든 계획서라 오류를 찾아볼 순 없지만, 그래도 백성들을 태우고 운항하는 여객기라 신중해야 했다.
"신역까지 가는 길은 문제가 없을 것 같고···."
개발한 비행기 엔진을 신뢰할 수 없다면 비상착륙조차 할 수 없는 바다 위를 날아가게 할 순 없지만, 그동안 반복된 실험으로 5천km 정도는 문제가 없다는 게 확인되었다.
그래도 사고가 날 수 있기에 쿠릴 열도와 알류샨 열도 곳곳에 비상 착륙장과 비상대피소까지 지어 놓았다.
"문제는 요금이네···."
연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자, 쌍식이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한 달 월급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한 달 월급? 너무 많지 않나?"
"많지 않을 겁니다. 동역에서 신역까지 3일이면 갈 수 있는데 왕복 요금으로 한 달 월급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왕복 요금? 그럼 그 가격을 기준으로 요금표를 만들도록 해라."
"네, 폐하."
연이 황제에 오르자 쌍식이가 조선전력공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황제라도 총리에게 국정을 맡겼기에 은동리에 있어도 되지만 연은 그리하지 않았다.
첫해부터 궁을 비울 수는 없어서였다.
대신 쌍식이가 매주 한 번씩 연이 있는 경복궁을 방문했다.
"참, 폐하. 황후(皇后)께서 집필하신 책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바로 상영하라고 할까요?"
"그래? 잘 됐구나. 나도 보고 싶으니 이곳에도 필름을 보내라고 해라."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초당 10컷짜리부터 시작한 만화영화는 이제 24컷으로 늘어났다.
그 첫 작이 황후가 집필한 '80일간의 세계 일주'였다.
"그리고 만물상자는 언제부터 판매하면 좋겠습니까?"
"아직 이르니 좀 더 기다리도록 하자.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 완공된 후 판매해도 늦지 않을 거다."
브라운관을 뛰어넘고 바로 액정 모니터로 넘어갔지만, 생산성이 좋지 않았고 반응도 느렸기에 잔상이 심했다.
그래서 조선전력공사 내부에서만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곳곳에 극장이 생기고 상영하는 영화도 많아졌기에 극장에 가서 보면 되지만,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만물상자라 부르는 TV를 개인적으로 갖고 싶어 하는 사람.
새로운 기물이 나오면 누구보다 먼저 사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움직이는 사진을 볼 수 있다는 만물상자야말로 자신의 부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어찌 알았는지 만물상자를 판매하라고 상소를 올리고 있었다.
"그것보다 예절 대회 계획은 어찌 되고 있느냐?"
"예절 대회요? 그건 지금 지역 예선 중입니다. 늦어도 내년 여름에는 본 대회를 개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잘 됐구나. 차질 없도록 단단히 준비 해야 한다. 너도 들었겠지만, 내년에는 세상이 요동칠 게 틀림없다. 그러니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걸 많이 개최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조선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예절 교육은 단순히 예만 따지는 것이 아니었다.
예절에는 문학과 음악, 미술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시를 짓고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만드는 모든 일이 다 예절 교육이었다.
연은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경신 대기근 동안 조선의 문화를 꽃피우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