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황제에 오르다
조선 제국력 10년(1669) 5월 25일.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의 시작인 경술년(1670)을 앞두고 효종은 황제에서 태황(太皇)으로 물러났다.
이어 연이 29세의 나이로 조선제국 두 번째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의 온 백성들과 세계 각국에서 온 왕들, 사신들, 상인들, 여행객들의 축하 속에 행사는 한 달 동안 진행되었다.
이 소식은 라디오 전파를 타고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조선에서 생산되어 판매되고 있는 라디오라는 기물.
조선이 아닌 곳에서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양 남산 탑에서 송출되는 단파 라디오 방송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출력이 컸다.
거기다 곳곳에 중계기까지 설치해 놓았기에 깨끗한 음질로 청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선에서 일어나는 새소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까지 알 수 있는 라디오는 무역업을 하는 상인이나 돈 좀 있는 사람이라면 필수품이 되었다.
때문에 연의 즉위식과 행사 진행 과정은 라디오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속속들이 알려졌다.
"세바스찬, 조선 방송 들어 봤어?"
"아니, 잠자느라 못 들었어."
"이런, 그래서 돈이나 벌겠냐?"
"왜,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
"당연히 있지. 이번 조선 황제 즉위식 때 발표된 기물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뭐 돈 될 만한 거 찾았어?"
"헛소리는, 조선에서 나온 기물치고 돈이 안 되는 것 봤어?"
"그런 건 없었지. 그래서 뭐가 돈 될 것 같은데?"
"음···. 5개 정도 돈이 될 것 같지만, 그중에서도 거···, 움직이는 사진···, 뭐라고 하더라···."
이탈리아 로마에 사는 마르코는 친구인 세바스찬과 함께 무역업을 하고 있다.
조선에서 수입한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이탈리아에서 생산된 치즈, 와인, 올리브기름 등을 수출하는 게 주 종목이지만, 때로는 주문을 받고 삼발이나 사발이 같은 자동차도 가져와서 팔았다.
한마디로 돈이 되는 것은 뭐든지 하는 소규모 무역 상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조선에서 송출하는 라디오 방송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맞아! 영사기. 영사기를 가져오면 돈이 될 것 같은데?"
"그게 뭔데?"
"말했잖아. 움직이는 사진이라고."
"사진이 움직여?"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러니 당장 한양으로 가자."
"지금 말이야?"
"내가 새소식을 듣고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하얀 벽에 영사기를 쏘면 사진들이 움직인다고 해. 그러니 가져와서 돈 받고 보여주면 어떨까?"
"그게 진짜야?"
"진짜겠지. 언제 조선에서 거짓말하는 것 봤어?"
"없었지. 조선에서 거짓말하다가 걸리면 탄광으로 끌려가는데 누가 그런 짓을 하겠어?"
이곳 로마에서도 조선에 가서 거짓말을 하다가 탄광으로 끌려간 상인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상거래를 하면서 속고 속이는 건 기본이라 생각했기에 잘못이 없다고 하소연하였지만, 일절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조선에 갔으면 조선 법을 따르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너무 억울했다.
상인들은 조선 법을 몰랐다며 잘못을 인정하고 간절히 선처를 구했다.
다행히 모르고 했다는 걸 인정받아 풀려난 상인들.
이제는 조선에 가면 흥정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갈 거야? 말 거야? 안 간다면 나라도 혼자 갈 거다."
"잠시만 기다려줘! 바로 챙겨 나올게."
"시간 없으니 서둘러!"
전 같으면 알프스산맥을 넘어 기수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한양에 가야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조선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 흑해로 가는 뱃길이 열렸다.
크림반도에 있는 세바스토폴까지만 가면 그곳에서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서둘러 항구로 간 세바스찬과 마르코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같은 상인이 한둘이 아니구나."
"그래도 천만다행이네. 기다리지 않고 배를 탈 수 있어서."
"고마워. 다 마르코 너 덕분이야. 네가 서두르지 않았다면 배를 놓쳤을 거야."
"고마운지는 알아?"
"당연하지! 그것도 모르면 사람이 아니지."
연은 지중해 연안 도시들과 교역할 목적으로 흑해에 주둔하고 있던 전함을 정기적으로 운행하도록 했다.
컨테이너선처럼 생긴 통통한 조선전력공사의 전함은 엄청난 물량을 실을 수 있었다.
무장까지 완벽했기에 지중해에서 설치고 있는 해적들이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빠르고 안전하고 운임도 쌌기에 수많은 상인들과 여행자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전함을 타기 위해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두른 덕분에 바로 출발하는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좀만 늦었으면 10일은 더 기다릴 뻔했네."
"그러게, 매일 다니면 정말 좋을 텐데."
"세바스찬! 정신 좀 차려. 배가 자주 다니면 경쟁자가 더 많아지는 거 몰라?"
"아, 그렇지! 미안."
마르코와 세바스찬은 조선에서 발행한 지폐 뭉치를 확인한 후, 품속에 꼭 집어넣고 배에 올라탔다.
도난을 당하더라도 다시 찾을 수 있게 표시까지 해 놓았기에 안심할 수 있었지만, 조사하느라 하선 시간이 지체되면 다른 상인들에게 원망을 들을 수도 있어서 조심하는 거였다.
"마르코, 그런데 조선은 법이 너무 무섭지 않아?"
"무섭긴 뭐가 무서워.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게 보살펴 주는데."
"그래도 좀 심한 것 같아."
"잠이 덜 깼나? 무슨 헛소리를 하고 그래? 생각해봐 놀아도 먹고 살게 해주는데 도둑질을 하면 그게 사람이야? 그런 놈은 혼나야지."
단순한 좀도둑질이라도 무척이나 엄격하게 처벌하고 있는 조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좀 있었지만, 그들의 말은 무시되었다.
배고파서 훔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둘은 훗날 이탈리아 극장계의 대부가 된다.
* * *
제위(帝位)에 오른 후, 한 달 동안 수많은 나라에서 온 왕과 사신들을 만나느라 연은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사람을 상대한다는 게 이처럼 힘들 줄은 몰랐다.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 연이 만났던 사람들은 이해관계가 얽혀있었기에 미리 조사를 하고 만났다.
그랬기에 긴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축하하러 온 이들 중 대부분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누군지 대충이나마 들었지만 너무나 많았기에 혼란이 올 정도였다.
그래도 축하하러 온 사절이라 예의상 만나야 했고, 제국을 표방하고 있었기에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그랬기에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정식 일정이 끝나자 연은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경복궁 대전에 모인 대신들.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모두 엎드려 연에게 예를 올렸다.
"모두 일어나시오. 앞으로는 이리하지 마시오."
"아닙니다. 폐하. 어찌 폐하께 올리는 예를 가벼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들의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오. 저 바닥이 깨끗해 보여도 무척이나 더럽소. 그러니 앞으로 예는 간단히 하도록 하시오."
"하오나, 폐하···."
대신 중 한 명이 나서려고 했지만, 연은 손을 내저었다.
"예는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걸 논하자고 그대들을 부른 게 아니오. 그러니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네, 폐하."
대신들이 일어나 자리에 앉자 연이 말을 꺼냈다.
"태황께서 이렇게 짐에게 선위하신 이유는 우리 조선의 기틀을 더욱 확실히 잡기 위함이오. 아시다시피 조선의 영토는 너무나 넓소. 통신이 발달해서 관리 할 수 있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소. 그 이유를 아시오?"
연의 물음에 대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뜻을 알고자 했지만, 나서는 이는 없었다.
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어 말했다.
"그 이유는 다름에 있소. 사람이 모두 다르듯 사는 지역에 따라 풍습 또한 모두 다르오. 그러니 그 다름에 따라 일을 해나가야 하오. 그래야만 우리 조선에 분란이 없을 거라 보오."
"폐하, 그 말씀은 중역과 서역에서도 시장 선거를 하자는 것입니까?"
"그렇소."
간단한 연의 대답에 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역에서만 시행한 시장 선거가 예상보다 성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잘 들으시오.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중역과 서역의 시장 선거에 앞서 '제국 의회'를 구성하고자 하오."
"폐하,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아니오. 조사 결과 백성들이 선거에 대한 이해가 깊었소.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의회를 구성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법을 만들고자 하오. 그러니 준비들 하시오."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뭔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대신들이 합창하듯 따르겠다고 외쳤다.
그럴 수밖에.
제국 의회의 의원이 되면.
한 지역의 대표가 되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고 뜻을 표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었다.
또한 대신들은 이런 일이 올 줄 알고 대비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미리 봐둔 지역에 공을 들이고 있던 대신들.
당선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희망이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대신들을 보고 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꺼냈다.
"이에 앞서 정리 좀 해야겠소."
"폐하, 정리라니 무엇을 뜻하시는 것이옵니까?"
참 선비 김육을 따랐던 허적이 나서서 물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의원이 되면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입법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오. 따라서 잘못된 법이 입법되어 확정될 수도 있소.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입법의 정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상위 기관을 마련코자 하오."
"그 말씀은 상원부터 시작하시겠다는 것이옵니까?"
"맞소. 상원을 먼저 구성하고, 하원을 추진하도록 하겠소."
연은 오래전부터 의회 구성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러다 문식이를 만나게 되자 그와 논의 끝에 전혀 새로운 양원 구성을 생각해 냈다.
'그러니까 법을 만들어도 다른 의원들 도움이 없으면 입법조차 할 수 없고 통과될 확률이 너무 낮으니, 단독 입법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이야?'
'그렇지. 검사는 단독 수사권이 있는데 의원이 단독 입법권이 없다면 말이 되지 않잖아?'
'그러긴 하지. 의원 혼자서 단독으로 입법할 수 없으니 패거리 정치를 할 수밖에 없지.'
이런 부분에서는 문식이와 연은 장단이 잘 맞았다.
여야로 나누어서 민생은 저버리고 패거리 정치만 일삼는 꼴을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독 입법은 누가 검토하지?'
'상원에서 하게 하면 되지 않겠어?'
'상원? 미국처럼 말이야? 그건 다른데?"
'맞아. 내가 생각한 상원은 미국의 상원과 많이 달라.'
연이 생각한 상원은 하원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외교와 국방은 황실에서 주도할 거야. 그러니 상원에서 할 일이 없어. 대신 하원을 감시하게 하면 좋지 않을까?'
'음···. 생각해 볼 문젠데.'
그후로도 연은 문식이와 의회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의원의 임기를 5년으로 두 번까지 할 수 있게 하고, 그 후로는 상원에 출마할 수 있게 한다고?'
'응, 그렇게 하는 게 정상 아니야?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고 고등학생이 될 순 없잖아?'
'그러긴 하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만 나불대는 무식한 놈들에게 입법을 검토하게 할 순 없지.'
그래서 결정 내린 상원의 권한은 단순했다.
"모두 잘 들으시오. 앞으로 구성될 상원은 하원에서 입법한 법안과 예산을 검토하고 승인하는 매우 중대한 곳이오. 하지만 하원을 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원을 구성할 수밖에 없소. 따라서 첫 상원의원에 출마할 이들은 철저한 조사를 거쳐 자격을 따질 것이오."
"폐하, 그 말씀은 자격부터 검증받아야 상원의원에 출마할 수 있다는 뜻이옵니까?"
"그렇소."
"하오나, 그 자격을 누가 따진단 말입니까?"
허적의 물음에 연은 씩 웃었다.
미리 허적에게 뜻을 알리고 말을 맞춰 놓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잘 해내고 있었다.
"그래서 감사원을 두기로 했소. 짐은 모든 관리들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감사원에 줄 생각이오."
"의원들도 말입니까?"
"그렇소. 백성들에 의해 선출된 의원이라도 감사원의 감독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폐하, 뜻은 좋으나 감사원이 비리를 저지른다면 누가 탓할 수 있습니까?"
"그건 황실 위원회에서 할 거요."
"황실 위원회요?"
"그렇소. 앞으로 이 나라 조선은 기본이 되는 백성들에 의해 정치할 사람들을 뽑고 운영하게 할 것이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비리를 저지른다면 누가 그걸 지적이나 할 수 있겠소. 그래서 황실에 위원회를 두고 감시할 생각이오."
이에 허적은 고개를 숙이며 목청을 높였다.
"폐하! 참으로 옳으신 생각이시옵니다. 그러지 않아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무엇을 걱정한단 말이오?"
"이 나라 조선을 이렇게 만드신 분은 다름 아니라 폐하이시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나라의 운영에 관여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허적의 말에 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음···. 영상대감. 앞으로 짐은 물론 황실에서도 나라의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폐하께서 나라의 운영에 관여하지 않으신다면 이 나라의 운명이 어찌 될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허적의 말에 대신들도 따라나섰다.
"폐하, 그건 아니 되옵니다. 방금 하신 황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거두어주십시오. 폐하!"""
하지만 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앞으로 짐과 황실은 백성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오. 또한 정치인들과 관리들을 감시하는 역할만 하겠소."
"""폐하!"""
대신들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급하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
"잘 들으시오. 지금 시작해도 제대로 돌아가게 구성하려면 몇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소. 짐은 여기 있는 대신들이 모두 그 완성을 보길 바라고 있소."
"""폐하!"""
연은 자신의 대에서 민의에 의한 정치 체계를 완성하고 싶었다.
'어차피 세상은 그렇게 흘러갈 거야. 그러니 서둘러야지.'
그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의회부터 구성하려고 했지만, 대신들은 극구 반대했다.
연을 따르는 것만이 출세의 지름길이라 보았던 대신들.
연이 나서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으면 같은 대신들끼리 '진검승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미처 준비하지 못한 대신일수록 더 크게 반대의 뜻을 표했다.
"진정들 하시오."
"폐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거두어주십시오. 폐하!"""
지속된 대신들의 반대에도 연은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들어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당당한 걸음으로 대전에 들어서는 이.
바로 행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