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아들 순과 함께하는 여정(3)
칼 10세는 무척이나 호전적인 전쟁광이다.
그런데 평화가 지속되자 몸이 근질거렸나 보다.
그래서인지 칼 10세는 문식이에게 차관을 요구하며 대신 스페인에 복수해주겠다고 말했다.
칼 10세의 말에 연을 비롯한 다른 제후국 왕들은 기가 막혀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조건 중 하나인 '명분이 없으면 타국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위반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칼 10세는 명분을 만들어 냈다.
그것도 자국이 아니라 아파치 왕국이 당한 일을 가지고 말이다.
더구나 스페인은 내전으로 인해 이미 망해 버린 곳이 아닌가.
말은 아파치 왕국을 위해 복수해주겠다고 했지만,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스페인을 집어삼키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거였다.
미련한 곰탱이인 줄 알았던 칼 10세의 속에는 여우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칼 10세의 속셈이라 연이 나서려 했다.
그런데 문식이가 연에게 눈을 찡그리며 신호를 보냈다.
문식이는 커다랗게 웃으며 칼 10세에게 말했다.
"과연 듣던 대로 군요. 얼마가 필요하오? 내 그대가 원하는 대로 빌려주겠소. 물론 이자는 대조선 제국보다 싸게 말이오. 그렇다고 스페인을 칠 필요는 없소. 이미 그들은 그들이 모시는 신에 의해 벌을 받고 있으니 말이오. 괜히 넘보다가 전염병이라도 옮겨붙으면 어쩌시려고 그러오?"
프랑스와 달리 온통 고산지대인 스페인은 내전으로 인해 먹을 것조차 부족해졌다.
전쟁과 굶주림이라는 최적의 조건이 만족 되자 전염병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칼 10세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브리튼 왕국은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
브리튼 왕국에 있는 자원이라고는 한반도처럼 석탄과 석회암, 철광석뿐이었다.
석유와 가스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지만, 그건 바다 깊은 곳에 있기에 알지도 못했고, 알아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였다.
문식이의 말에 칼 10세는 유럽식 예를 올리며 감동한 눈빛을 보냈다.
"그동안 뒤에서 무식한 야만인이라고 험담한 걸 사죄하겠소. 내 사죄를 받아 주시겠소?"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문식이는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되려 물었다.
그러자 칼 10세가 문식이의 어깨를 잡고 껄껄 웃었다.
"역시 전사 출신이라 그런지 통이 크시군요. 내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그 누구라도 아파치 왕국을 넘보면 내가 절대 가만있지 않겠소."
문식이 또한 칼 10세의 어깨를 마주 잡고 말했다.
"마음만이라도 고맙소. 언제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시오. 내 힘껏 돕겠소. 그대 같은 영웅을 돕지 않는다면 누굴 돕는단 말이오."
두 거구가 서로를 치켜세워주는 모습에 황당함을 느낀 연이 끼어들었다.
"두 분이 의기투합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가면서 말씀 나누시죠. 서울까지 가는 길은 무척이나 뭡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쿵 짝이 맞은 칼 10세와 문식이는 정답게 술을 펐다.
그 옆에 안톤도 끼어들었다.
체코 왕국 또한 부를 이룰만한 마땅한 자원이 없기에 안톤도 돈이 필요했다.
연에게 빌려 달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염치가 있는 안톤이라 문식이에게 붙었다.
안톤이 이끄는 체코 왕국은 독립하는 과정에서 연에게 엄청난 자금을 지원받았다.
지금도 식량원조를 받고 있는 입장이라 차마 연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안톤까지 술자리에 끼어들자 신이 난 문식이가 다른 왕들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 기차는 최근 개발된 신형입니다. 좀 비싸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어쩐지 빠른데도 무척이나 안락하다고 생각했는데 비싼 거였군요. 부럽습니다."
준가르 왕국의 호토고친은 넓고 쾌척한 새로운 기차가 탐이 났다.
히말라야산맥을 관통하는 철도가 조선과 연결되어 있지만, 산악 지형을 오가는 열차의 특성상 특별히 제작된 협궤열차였다.
또한 오래된 방식이라 이처럼 안락하지 않았다.
"우리 왕국도 이런 기차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왕국에도 자금을 융통해주실 수 있습니까?"
지팡구 왕국의 나카토도 문식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자원이 풍부한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차지한 지팡구 왕국이지만, 당장 쓸 돈은 없었다.
조선에 요청하여 광산을 개발하고 있지만, 그게 언제 돈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백성들을 위한 그대의 마음을 어찌 모른척하겠소. 내 황금으로 빌려드릴 터이니, 나중에 다시 황금으로 갚으시면 되오."
"고맙습니다. 제로니모 전하."
나가토는 잘 알고 있었다.
연과 아파치 왕국의 왕이 아주 친하다는 걸.
게다가 개발되고 있는 금광이 있다는 걸 알고 편의까지 봐주지 않는가.
그래서 문식이에게 '전하'란 호칭을 붙여 감사를 표했다.
이러다 보니 다두 왕국의 카마찻 왕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자국에서 생산되는 고무와 황금 등 천연자원이 많기에 돈을 빌릴 필요는 없지만, 지금 끼어들지 않으면 외톨이가 될 것 같은 분이기라 한마디 거두었다.
"제로니모, 부탁하나 합시다."
"부탁이요? 말해 보시오?"
"우리 왕국에도 유교 탈레반들을 보내주시겠소. 실용 유학이란 학문이 무척이나 유용하다고 들었소."
"아, 그래요? 내 송 선생께 말해 보겠소."
"고맙소. 내 필히 보답하겠소."
연은 시대를 뛰어넘는 강한 무력으로 제후국 왕들을 따르게 했지만, 문식이는 말 몇 마디로 모두의 환심을 샀다.
문식이가 주도하는 술자리라 그런지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갔다.
거나하게 취한 카마찻이 먼저 제안했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의형제를 맺읍시다."
"그건 좀···."
하지만 다른 왕들은 연을 보더니,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연의 나이가 가장 어렸던 거다.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 없다고 생각한 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전 이만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새벽부터 서둘렀더니 피곤합니다."
연이 왜 그런지 정도는 알았기에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술이 취했다고 하지만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현재 세상을 이끄는 정상들의 모임 아닌가.
연이 빠진 후.
6개국 정상들은 의기투합하였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제식 축구 규정을 합의했고, 서로 간에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관세 협약도 맺었다.
물론 가장 부국인 아파치 왕국의 문식이가 주도권을 가지고 진행했다.
훗날 이 회담을 '칠왕열차협약'이라 불렀다.
* * *
문식이가 제후국 왕들을 안내하며 발전된 서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가운데, 연은 일식이의 안내를 받으며 순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볼리비아 지역에 완공된 광산과 공장들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남쪽으로 태평양의 반이나 되는 거리를 항해한 끝에 '아리카(Arica)'에 도착한 연은 그곳에 있는 공장부터 시찰 했다.
"현재 생산량은 얼마나 되느냐?"
"하루에 약 천 개 정도 만들고 있습니다."
연은 리튬이 널려 있는 이곳에 직접 배터리 공장을 짓고 생산하기로 했다.
"하루에 천 개라···, 쉬지 않고 가동한다고 해도 한 달에 3만 개 구나. 공장을 더 짓도록 해라."
"네, 사장님. 그러지 않아도 지금 인산철 배터리(LiFePO4) 공장을 복제 수준으로 계속 짓고 있습니다.
"장하다! 역시, 광식이구나."
"아닙니다. 사장님. 사장님 덕분에 새로운 광물도 발견할 수 있었고, 이런 광물을 어떻게 활용하는 지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리튬 배터리의 한 종류인 인산철 배터리는 양극재로 코발트(Co, 27) 대신 철(Fe, 26)을 사용한다.
인산철 배터리는 코발트와 비교해 밀도가 낮은 철을 양극재로 쓰기에 무게가 무겁고, 부피도 크고, 효율도 떨어지지만, 리튬 이온 배터리보다 훨씬 안전하다.
한 번 불이 붙으면 다 타버리기 전에 불을 끌 수 없는 리튬 이온 배터리는 가볍고 효율도 좋았지만, 너무 위험하다.
그래서 리튬 계열 배터리 중에 저렴한 축에 속하는 인산철 배터리를 보급하기로 했다.
인산철 배터리는 과충전과 과방전 시에도 폭발하지 않고, 강한 외부 충격은 물론 고온에 의한 화재에도 폭발하거나 가스를 내뿜지 않았다.
"사장님, 그런데 왜 이곳부터 '태양전력장치'를 보급하시려 합니까?"
"조선은 도시 위주로 개발하고 있고, 전력도 부족하지 않지만, 이곳은 아니지 않느냐. 또한 리튬값 대신 태양전력장치를 주기로 제로니모 왕과 약속했다."
"아, 그렇습니까? 저는 이 태양전력장치가 중역에 사는 유목민들에게 무척이나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양전력장치는 태양전지판 2장과 인산철 배터리 2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휴대하기 편했기에 이동하면서 쓰기에는 최상이었다.
"아, 광식이 너는 모르고 있었구나. 중역의 사는 유목민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마을 단위로 태양전지판을 설치해 주고 있다."
"그렇습니까? 제가 이곳에 있느라 몰랐습니다."
연은 유목민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다.
말과 염소 떼로 인해 망가져 버리고 있는 몽골 초원.
더는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마을마다 태양전지판을 설치해 전기를 쓸 수 있게 하고, 물을 끌어와 녹지를 계속 생산해 한 곳에서 목축을 할 수 있게 했다.
미국 유학 시절 텍사스 농장을 지나다가 본 것을 따라 한 거였다.
연이 광식이와 공장을 둘러 보고 있는 사이.
순은 일식이와 놀고 있었다.
일식이의 어깨에 올라탄 순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일식이 언니. 왜 사람들이 저렇게 엎드리는 겁니까? 우리 조선에서는 그러지 않는데 말입니다."
"순아. 우리 아파치 왕국도 그러지 않는단다. 다만 위대한 전사에게 예를 표하는 거란다. 유교 탈레반들도 삼촌께 그런 예를 올리지 않더냐?"
"아, 맞습니다. 아바마마께도 그랬습니다. 그럼 언니가 위대한 전사입니까?"
"그럼! 난 이곳뿐만 아니라 하와이라는 곳에서도 인정받는 전사란다."
"하와이요? 거긴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곳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언니가 그곳에서 인정을 받습니까?"
순의 물음에 일식이는 픽 웃으며 팔을 잡고 흔들어 주었다.
말하는 게 너무 귀여워서였다.
일식이는 순 같은 동생을 본 적이 없었다.
양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동생들이 많았지만, 모두 일식이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순은 아니었다.
온몸에 무섭게 문신을 했지만, 순은 일식이를 무서워하기는커녕 따라다니는 것을 즐거워했다.
누나는 많았지만, 형이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만났기에 그런 거였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조선에서는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언니라 불렀다.
그만큼 조선에선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蓆)이란 말은 7살이 되면 이부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임진왜란 이후 와전된 것이다.
호칭만 보더라도 지금의 조선이 21세기 대한민국보다 남녀가 평등했다.
그래서인지 조선의 인구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놀 것이 별로 없는 세상이었기에 즐길 것이 무엇 있겠나.
그런데 변하고 있었다.
서역에서 넘어온 극장이 동역에 자리 잡고.
동역에서 넘어간 마당놀이가 서역의 광장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유원지나 동물원 같은 즐길 거리도 많아졌다.
거기다 실리콘을 이용한 콘돔까지 판매되자 인구 증가 추세가 줄어들고 있었다.
아무튼 아파치 왕국에서 볼일을 마친 연은 태자비와 순을 데리고 북쪽 신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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