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밝혀진 진실(4)
"단지 기억 덩어리가 이 안에 들어박힌 것 아냐?"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묻는 문식이의 말에 연과 야코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환생 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왜 말이 없지? 수학 천재라며? 계산도 틀리지 않았다며? 그럼 다 예상할 수 있는 것 아냐? 설마,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인 거야? 그러다 지구가, 아니 태양계가 사라졌으면 어떨 뻔했어? 말 좀 해봐!"
한쪽에서 잘 듣고 있던 문식이가 이렇게 야코프를 다그치며 급발진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야코프의 행동이 수상쩍었기 때문이다.
연과 함께 다니다 보니 문식이는 수시로 들어오는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야코프의 행동이 앞뒤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강제로 끌려오긴 전까지 야코프는 발악에 가까운 저항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야코프는 상서까지 오는 동안 아주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초대받고 가는 것처럼 말이다.
문식이가 누군가.
선생조차 무시하는 분위기에서 수많은 학생을 상대해 왔지 않는가.
매일같이 선생을 놀리거나 속이려는 청소년기 학생들과 함께 지낸 세월은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스스로 왕이 되면서 수많은 부족과 정략혼인을 무리 없이 진행했을 정도로 수완이 좋은 문식이였다.
그랬기에 문식이는 야코프가 하는 행동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의심스러운 부분을 연에게 말하지도 않고 말이다.
"왜 말이 없어? 할 말이 있을 것 아냐? 지구를 멸망시킬 짓을 하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거야?"
"미안,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세계 10대 부자에 오른 후, 단 한 번도 그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던 닐 게이트 미크로웨어 회장.
온갖 악행으로 부를 쌓은 후, 자선사업과 지구 온난화를 해결한다며 설치고 다녔다.
자신의 악행을 덮으려고 한 짓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인류를 생각한 행동이기에 존경까진 아니더라도 칭찬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동방예의지국이라 자처하는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인물이 극히 드물었으니까.
아무튼 닐 게이트는 SMR를 개발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주 사막에 입자가속기(LHC, Large Hadron Collider)를 지었다.
그곳에서 연구를 하던 테일러 사하로프.
입자가속기를 이용해 블랙홀을 만들었다.
시공을 뛰어넘기 위해서였다.
일반적으로 입자가속기를 이용한 입자 충돌 실험을 할 때, 발생하는 극히 작은 블랙홀은 순식간에 사라지기에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테일러가 만들어낸 블랙홀은 그보다 수만 배나 컸기에 잘못하면 지구 차체가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사라졌을지 알 수 없다.
문식이의 유일한 낙은 불타는 금요일에 공식이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주워들은 지식이 있기에 문식이는 2036년에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왔다는 존 티토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까지 한 존 티토는 유럽 원자핵 연구소 세른(CERN)에서 2개의 마이크로 블랙홀을 이용해 타임머신을 실용화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식이와 공식이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시대는 그보다 훨씬 뒤였으니까.
그런데도 전부 거짓이라 치부할 순 없었다.
존 티토가 말하기를 자신이 살았던 세상은 세계선이 다른 곳이라 했으니.
그런 것까지 알지 못한 문식이는 야코프를 향해 사정없이 다그쳤다.
"이거 미친놈 아냐? 세계적인 과학자라는 놈이 인류가 파멸할지도 모를 짓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다니."
문식이의 지속된 윽박에 야코프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보다 못한 연이 나섰다.
"문식아, 그만해. 이미 벌어진 일이잖아."
그 순간 문식이가 연을 보며 한쪽 눈을 짧게 끔벅였다.
"이놈 그냥 죽이잖고. 또 뭔 사고를 칠지 모르잖아. 아니 그냥 두다간 이세계까지 소멸시킬지도 몰라."
"그래?! 그럼 큰일인데."
"그러니까 포기하자고. 이놈 없어도 SMR 따위는 만들 수 있잖아."
"뭐, 쉽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좀 오래 걸리겠지."
"그게 낫지 또 사고 치면 이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어떡할 거야?"
"설마? 또 그런 사고를 치려고···."
"한 번 한 놈이 두 번은 못 하겠어?"
"그, 그건···. 그런지."
연은 말을 더듬으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문식이와 살아 온 세월이 있기에 그가 지금 하는 행동이 뭘 원하는지 파악했기 때문이다.
연은 일어서면서 문식이에게 말했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주자고. 죽이는 건 언제든지 가능하니."
"그럴 순 없지. 이놈은 극히 위험한 놈이야. 생각해봐. 이놈이 떠난 후 이놈을 따르는 놈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잡혀 온 놈이라고."
"그래?"
"무슨 짓을 하려고 잡혀 온 건지 모르잖아."
"이런!"
예맥 기병대는 협상장에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떠난 건 아니었다.
야코프의 추종자들이 사는 곳을 포위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추종자들의 행동이 수상쩍었다.
지도자가 잡혀갔는데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평소처럼 그냥 지냈던 거였다.
연도 보고를 받았기에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하며 야코프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잡혀 온 거야?"
그제서야 고개를 쳐든 야코프가 담담히 말했다.
"특별한 목적은 없었어. 그냥 우리끼리 살 수 있게 협상하려고 했을 뿐이야."
"정말이야?"
"내가 왜 그랬겠어? 그러지 않았다면 몰살당할지도 모르는데."
야코프는 조선군에게 발각되었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더는 조선군을 피해 도망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길! 5년만, 아니 3년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야코프는 핵폭탄을 만들 순 없지만, 좀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원자력 발전소를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발전용 원자로는 순도가 3% 정도인 우라늄-235만 있으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다.
조선군을 찾아와 협상하자고 한 이유가.
원자로를 가동할 수 없었기에 협박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야코프는 조선군을 먼저 찾아갔다.
또한 납치될 위험이 있는지 알면서도 순순히 협상장에 나타났다.
잡혀갈 것을 알고 행동 한 거였다.
비록 숨어지내고 있지만,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고 살았던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정보를 얻기 위해 원주민들로 구성한 정찰병을 수시로 내보내고 있었다.
그랬기에 야코프는 알고 있었다.
조선에서 비행기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을.
'젠장! 대체 어떤 놈이 따라온 거지?'
야코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도 이 정도로 급속하게 발전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아파치 왕국과 조선이 친하게 지낸다는 말을 들었다.
또한 아파치 왕국의 왕 이름이 제로니모란 말을 들었다.
제로니모란 가톨릭 성인의 이름인데 원주민이 쓰다니.
'한 놈이 아니라 두 놈이었군,'
야코프는 조선군을 피해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비행기까지 개발되었기에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한들 더는 숨어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코프는 행동에 나섰다.
'일이 이렇게 돼서 어쩔 수 없소. 내가 가서 설득해 보겠소.'
'안 됩니다. 그러다 죽기라도 한다면 우린 어떻게 합니까?'
추종자들이 결사 반대했지만, 야코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막을 수 없소. 아직 조선군이 별다른 행동을 안 하고 있지만, 맘만 먹으면 우린 전멸당할 게 뻔하오. 그러니 내가 가서 협상하는 게 최선이요.'
추종자들을 설득한 야코프는 잡힐지도 모르는 협상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흥! 나를 만만히 봤군. 도대체 목적이 뭐지?"
"나와 내 일행들이 안심하고 살 곳. 그거면 돼."
"그래? 좋아. 내가 너와 너의 추종자들이 살 곳을 제공한다면 너는 나에게 뭘 줄 수 있지?"
"내가 가지고 있는 SMR 기술을 모두 주지. 어차피 내 처지에 그걸 만들 순 없으니."
원자력 발전소야 어찌어찌 만들 수 있다지만, 빛과 거의 같은 속도로 반응하는 핵분열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 수는 없었다.
받쳐줄 만한 기반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너에게 줄게. 그러니 나와 내 일행들이 살 곳을 준다고 약속해줘. 그럼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모두 넘겨줄게."
"흠···. 좀 생각해 볼 문제군."
연은 바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야코프는 이미 잡아 놓은 물고기 아닌가.
야코프와 대화를 마친 연은 문식이와 따로 시간을 가졌다.
문식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쩔 생각이야?"
"성정(性情)은 나쁘지 않은데···."
"그건 맞아. 그래도 위험한 건 사실이야."
"그런데 SMR은 탐이 나거든."
"왜 여차하면 네가 만들면 되잖아?"
"불가능해."
"아까는 가능하다고 했잖아. 아···, 뻥이었구나."
"응. 야코프 같은 천재 수학자가 있다면 몰라도 불가능해."
"그래?"
연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은쌍식에게 들었는데, 조선에도 천재 수학자가 있다며?"
"있지. 강미순이라고 경행식의 부인이야."
"행정을 모두 맡아 처리한다는 행식이 말이야?"
"응. 하지만 내가 아는 수준에서 좀 더 발전한 정도야."
"너 수준이 어때서?"
"잘해야 수학과 졸업생 정도? 그 수준이라 양자 이론을 해석해서 공식을 만들 수 없어."
"이런···."
문식이와 공식이가 살았던 21세기 중반에도 핵융합 기술은 10분을 넘기지 못했다.
엄청난 에너지 덩어리인 플라스마에 닫는 순간 모든 것이 녹아 사라지기에 자력을 이용해서 플라스마를 토카막(Tokamak) 속에 가둘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방법도 몇 가지 있지만 '자기 가둠' 방식만큼 연구가 진척된 것은 없었다.
그랬기에 연은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하고 나온 거였다.
"꼭 SMR이 있어야 해?"
"결국은 있어야겠지. 그래야 우주로 진출할 수 있으니···."
"그렇구나···."
대체 역사소설에 심취하여 술자리에서 왕이 된다면 어떻게 할지 떠들어댔는데, 문식이와 공식이는 많이 달랐다.
문식이와 공식이가 서로 장단이 잘 맞는 사이라고 하지만, 사람이기에 서로의 생각과 꿈은 전혀 달랐다.
'우리 한민족이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을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거야?'
'그럼 뭐해? 언젠가는 지구가 끝장날 건데.'
현실적인 문식이와 달리 이상주의자인 공식이는 아주 먼 미래까지 생각했다.
'19세기에 마이클 패러데이가 모터를 만들었잖아. 그런데 실용화되기까지는 아주 오래 걸렸지.'
'그랬어?'
'생각해봐. 우리나라에서도 전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냐고? 끽해야 반백 년 조금 넘을 정도야. 그것도 전 국민이 사용한 걸로 기준을 잡으면 반백 년도 안돼. 그러니 나처럼 전기 관련 지식이 있는 사람이 과거로 가서 발전시키면 어떻게 되겠니?'
'어떻게 되는데?'
'지금쯤이면 화성이 아니라 태양계도 벗어났겠지.'
'에이, 과장이 넘 심하다. 태양계를 어떻게 벗어나? 무슨 구름처럼 수많은 소행성들이 잔뜩 있다며?'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그때뿐이었다.
현실은 쓸쓸한 노총각이었으니.
"아무튼 난 한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와 상의 좀 해야 해. 너는 어떡할래?'
"어떡하긴 나도 서울로 돌아가야지."
"그래? 그럼 일단 야코프는 내가 데려간다."
"알았어. 변경되는 것 있으면 바로 알려줘."
"응."
문식이와 헤어진 연은 야코프를 데리고 한양으로 떠났다.
* * *
한양까지 가는 동안 연은 야코프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배를 이렇게 빨리 만들 수 있지."
야코프는 미래에서나 봤던 거대한 크기의 조선 기함 1호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간단해. 연구원 수를 늘리면 돼."
"뭐? 단지 연구원 수를 늘려서 이런 것을 만들었다고?"
"응. 조선전력공사 연구소의 연구 인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
"끽해야 몇백 명이겠지."
야코프의 말에 연은 피식 웃었다.
"2만 명이 넘어."
"뭐? 그게 말이 돼? 사용인까지 포함한 것 아냐?"
"사용인까지 포함하면 10만 명이 넘어."
"진짜야?"
"조선의 인구가 몇 명이나 되는 줄은 알아?"
"한 5천만 정도?"
"1억이 넘어."
"도대체 어디까지 흡수한 거야? 지금 전 세계 인구가 많아 봐야 5억 좀 넘을 것 같은데 1억이라고?"
연은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 * *
한양에 도착한 연은 바로 효종을 찾았다.
"아버지, 소자 다녀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갔던 일은 잘 해결하고 왔느냐?"
"그게···?"
"왜? 너와 같은 자가 아니더냐?"
"같은 자는 맞지만, 협상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렇구나···. 잘 해결했으면 좋겠다."
"노력하겠습니다. 아버지."
효종은 알고 있었다.
연이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랬기에 조선 제국의 미래인 태자가 자주 자리를 비워도 뭐라 하지 않았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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