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밝혀진 진실(3)
상서는 북위 42도에 있는 백두산 보다 훨씬 북쪽인 북위 47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도 영하로 떨어지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태평양 연안에 위치해 있어 시계 방향으로 태평양을 순환하는 해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대신 겨울이면 눈과 비가 무척이나 많이 내린다.
"말로만 들었던 비 내리는 시애틀 진짜였네."
"이제 겨울이 지났으니 화창한 하늘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래? 아직도 우중충한데?"
"오전에만 그래. 오후가 되면 날이 갤 거야."
연은 하늘을 한번 바라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전하, 위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 아파치 왕국의 폐하께서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걱정 말고 대기하고 있거라."
"네, 전하."
조선 제일 검이자 연을 상시 호위하는 검수는 고개를 숙이더니 뒤로 물러났다.
아파치 왕국의 왕인 제로니모 또한 전사였기에 야코프가 수작을 부리더라도 감당할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말이 별로 없는 검수의 유일한 낙은 연을 따라다니는 거였다.
연이 하는 일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신기했기에 모시는 주군임을 떠나서 함께 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찌 보면 연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는 검수일 거다.
그런데도 검수는 입을 함부로 놀리는 일이 없었기에 연이 가장 믿는 심복 중 하나가 됐다.
지금도 아파치 왕국의 제로니모 왕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검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 그토록 찾았던 야코프를 검거했기에 앞으로 벌어질 일에 기대감이 무척이나 높았다.
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긴 의자에 누워 있던 야코프가 벌떡 일어났다.
한참 동안 연과 문식이를 노려보던 야코프는 다시 자리에 눕더니 입을 열었다.
"이곳이 시애틀 맞지? 커피가 생각나는군."
영어였다.
그것도 러시아 발음이 섞여 있지 않고 발음이 뭉개지는 미국식 영어였다.
연의 씩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한 잔 줄까?"
"좋지."
커피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는 야코프에게 연이 다가갔다.
"테일러 사하로프라···. 진짜야?"
"혹시나 했는데 나를 알고 있군."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기억력이 좋아져서 한번 본 것은 잊지 않거든. 그 이유를 너는 알고 있을 것 같은데···."
확 돌아선 야코프는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물었다.
"코리안?"
"응."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지? 계산은 틀리지 않았는데···."
연은 입을 열려다 말았다.
자신과 문식이가 이렇게 된 이유가 야코프라는 걸 확실할 수 있었기에 그가 하는 말을 듣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야코프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뭔가를 생각하던 야코프가 조금 남은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더니.
"축하해!"
"뭘?"
"세계를 정복한걸."
"정복? 난 그런 걸 한 적이 없는데?"
"흥! 내가 숨어다녔다고 귀까지 막고 산 건 아니야."
연을 입을 쭉 내밀고 양손을 펼쳤다.
인정할 수 없다는 표현이었다.
연은 주제를 바꾸기 위해 야코프가 벌인 일을 따졌다.
"왜 그랬지?"
"뭘?"
"전쟁?"
"아, 그거!"
야코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비어있는 커피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다시 채워진 커피를 마시며 뭔가를 생각하는 야코프.
연은 차분히 기다렸지만, 문식이는 아니었다.
"도대체 뭔 짓을 했기에 이리된 거야!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래? 그래도 왕이 됐잖아. 그럼 좋은 거 아냐?"
"그렇게 좋은 거면 너도 왕이 되지 그랬어?"
"그러려고 했지. 너희 둘만 아니면 그렇게 했을 거야."
"뭐하고? 우리 때문이라고?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역사를 좋아했던 문식이도 나름대로 영어를 공부했다.
역사자료를 찾아보려면 영어는 필수였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발음이지만, 문식이는 거칠게 항의했다.
그런데도 야코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미안! 미안!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뭔가 계산 착오가 있었나 봐."
"아까부터 계산! 계산! 하는데 도대체 뭘 계산한다는 거야?"
문식이의 거친 외침에 야코프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양자 이동."
"양자 이동? 그게 뭐야?"
"저기 있는 위대한 정복자에게 물어보는 게 빠를 거야."
야코프의 말에 문식이는 연을 보았지만, 연은 '양자 이동'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거, 나만 바보 된 것 같네. 젠장!"
문식이는 소외된 느낌이 들었는지 투덜거렸다.
그러자 야코프자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앉지. 그래?"
연이 넋이 나간 것처럼 행동하자 문식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야코프 옆에 앉았다.
그러자 야코프가 물었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나도 물어볼 게 있는데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너희 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라고! 이런···!"
되려 물어보는 야코프의 행동에 문식이는 욕을 한바탕해 주고 싶었지만, 영어로 내뱉을 쓸만한 욕을 알지 못했기에 '퍽! 퍽!' 거리고 말았다.
"그걸 알아야 내가 실수한 게 뭔지 알 수 있거든. 그리니 부탁해."
다시 한번 넋이 나가 있는 연을 본 문식이는 더듬거리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말해줬다.
굳이 감출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왜 이렇게 된 건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뭐가?"
"내 계산은 틀리지 않았어. 단지 출력이 너무 센 게 문제가 된 거였어."
"출력?"
문식이가 의아해 야코프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생각에서 깨어난 연이 했다.
"양자 이동을 시키려면 엄청난 전력이 필요하거든."
"응? 정신 차린 거야?"
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 하나를 들고 둘 앞에 다가와 앉으며 야코프에게 물었다.
"네가 대단한 건 알겠는데 왜 그랬지? 이유가 있었을 것 아냐?"
"이유? 알잖아. 내 조국 러시아가 어떻게 됐는지."
"그래서 바꿔 보려고?"
"그랬지. 너만 아니었으면···."
야코프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계속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행동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기분이 좋지 않아서였다.
"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는데 나 때문에 망가져서?"
"미안. 사실 세계를 정복할 마음은 없었어. 단지 비열한 놈 하나가 내 조국 러시아를 엉망으로 만드는 게 싫었을 뿐이야."
"그래? 그런데 왜 전쟁은 일으켰어?"
"다 죽어도 마땅한 놈들이니까."
"그러긴 하지."
자신의 말에 긍정을 내비치는 연의 말에 야코프의 눈이 반짝였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알잖아. 내가 어떻게 했는지."
"맞아. 혹시나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하더군. 맘에 들어."
야코프는 팔짱을 끼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 갈수록 적어지는 세상에서 살아왔던 연과 문식이는 사죄할 줄 아는 야코프를 사람으로 인정했기에 그런 야코프를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대전쟁시대를 일으킨 야코프지만, 미친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야코프는 연과 문식이를 보더니 씩 웃었다.
그러더니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지나온 삶을 줄줄이 꺼냈다.
20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후손인 테일러는 수학의 천재였다.
러시아 수학 경시대회에서 우승하고 영재 교육 프로그램까지 이수한 테일러는 국제 수학 연맹에서 4년마다 개최하는 세계 수학자 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 ICM)에서 주목을 받고 필즈상까지 수상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테일러의 마음이 바뀌었다.
우크라이나 출신 어머니가 충격을 받고 쓰러진 후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때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졸지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오직 테일러만 보고 사셨다.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테일러가 자랑스러웠기에 어머니는 재가(再嫁)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테일러에게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어머니의 고향에 사시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돌아가셨다.
필즈상을 받고 유명해지자 세계 곳곳에서 테일러를 찾는 사람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영입을 원하는 곳은 세계 최고의 갑부 중 한 명인 닐 게이트의 '미크로웨어'였다.
'사하로프 박사님, 우리 회사로 오신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러시아를 너무나 사랑했던 테일러는 미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미크로웨어의 요청은 받아들였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테일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치료하기 위해 급히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자리를 잡은 테일러는 '소형 모듈러 원자로(SMR)'를 구축하는 연구를 했다.
한번 가동하면 멈추기 힘든 기존의 핵발전은 핵폭탄만큼 위험하지만, SMR은 그러지 않았다.
작동을 중지하면 무기한으로 자체 냉각하기에 별도의 조치나 추가로 물 또는 전원을 공급할 필요도 없었다.
크기 또한 작았기에 개발만 되면 인류의 에너지 걱정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개발을 완성했다.
세상은 SMR을 상용화한 미크로웨어에 열광했지만, 테일러는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어머니의 병은 고쳤지만, 치료하는 과정에서 몸이 쇠약해진 어머니가 얼마나 살지 몰랐기에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조국 러시아가 처참히 망가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는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세상을 힘들게 했던 러시아의 독재자.
그는 사라졌지만, 그 여파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러시아는 끝도 없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어머니까지 돌아가시자 테일러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SMR를 개발하면서 심취하게 된 양자역학은 기존의 물리법칙과 완전히 달랐다.
'입자가 파동이 되고 파동이 입자가 될 수 있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다시 말해 물질이 빛이 되고 빛이 물질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건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테일러는 입자 대신 파동을 이용하면 시공을 초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연구에 들어갔다.
그리고 파동을 이용한 테일러만의 차원 이동방정식을 완성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입자는 시공을 넘나들 수 없구나.'
몇 번이나 검토하고 실험을 해봤지만, 물질은 차원을 이동할 수 없었다.
입자를 파동으로 바꾸고 전송하는 것까진 가능했지만, 전송받은 파동을 다시 입자로 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받는 쪽에서도 똑같은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장치가 시공을 뛰어넘은 곳에서 존재할 순 없었다.
포기를 하려던 순간 테일러는 오래된 신문 기사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신문 기사의 내용은 중국에서 실험한 양자 순간이동이었다.
2016년 중국은 세계 최초로 양자 위성 '묵자호'를 쏘아 올렸다.
묵자호 안에는 양자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구에서 1,203km나 떨어진 곳에 있는 묵자호와 양자 이동을 이용한 통신을 실험하기 위해서 였다.
중국 연구진은 광자의 양자 얽힘 상태를 이용해 묵자호까지 양자 정보를 보내는 실험을 했고, 실험은 성공했다.
수억 광년 떨어진 곳과도 지연 없이 통신할 수 있는 실험이 성공했지만, 일반인들은 관심이 없었다.
실험은 성공했지만, 상용화는 요원(遙遠)했기 때문이다.
이런 양자 순간이동 기술 실험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고 계속 성공하지만, 찰나와 같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테일러는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굳이 몸이 갈 필요는 없지. 기억만 가도 충분할 거야.'
그래서 다시 연구한 것이 양자 이동이었다.
지구에서 달까지는 빛의 속도로 1.28초 걸린다.
화성까지는 22.3분, 목성은 51.4분이나 소요된다.
따라서 화성을 개척한다 해도 화성까지 실시간 통신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양자 이동을 이용한 통신은 0초가 걸리기에 시간 지연 따위는 있을 수 없고 실시간 통신이 가능하다.
광자는 둘로 쪼개져도 여전히 얽혀있기에 한쪽이 변하면 다른 쪽도 변한다.
따라서 쪼개진 광자 한쪽을 멀리 보낼 수만 있다면 거리에 상관없이 시간 지연도 없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거다.
테일러는 이 원리를 이용해 기억을 시공 너머로 보내는 방법을 연구했고 답을 얻었다.
한참 야코프의 사연을 듣던 문식이는 머리가 아파 왔다.
사연이 외계어처럼 들렸던 거다.
"오케이, 오케이. 알았어. 그러니까, 네가 한 짓으로 우리가 이곳에 떨어진 게 맞네. 그것도 기억을 그대로 가진 체. 그런데 말이야. 너 말대로 사람의 기억을 빛으로 만들어서 전송하는 게 가능하다고 해?"
"가능한 게 아니라 증명됐잖아. 너와 내가 이렇게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잖아."
연이 말하자, 문식이가 정색하며 인상을 썼다.
"공식아, 어려운 이야기는 나중에 둘이서 하고 지금은 좀 가만있어 줄래? 난 좀 따질 게 있으니."
"어, 알았어."
문식이가 왜 그런지 알기에 연은 한발 물러났다.
연 또한 누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면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연이 입을 다물자 문식이가 야코프에게 다시 물었다.
"니 말이 다 맞다고 쳐! 그럼 말이야.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 있어?"
"응?!"
갑작스러운 문식이의 질문에 야코프는 당황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답을 줄 수 없었다.
"단지 기억만 넘어왔고, 그게 비슷한 수용체에 수용된다고 했잖아. 그럼 우리 영혼은 어디에 있는 거야?"
문식이의 거듭된 질문에 야코프는 연을 바라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