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밝혀진 진실(2)
우크라이나 출신인 니콜라이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행상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니콜라이는 기본적으로 언어적 감각이 뛰어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언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덕분에 니콜라이는 조선전력공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제가 꼭 가야 하는 겁니까? 저는 경비대 대원도 아닌데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곳에서 너보다 다양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잖느냐.'
'그래도···.'
니콜라이는 더 좋은 기회를 찾고자 신맥 대륙 상서 분점으로 지원해 왔다.
영업 관리가 자신의 일이었지만, 경비대에서 통역을 하라니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통역 대상이 경비대에서 그토록 찾던 인물 아닌가.
'그리 위험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통역만 해주면 돼. 설마 우리 신맥 경비대를 못 믿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우리 경비대는 천하무적 아닙니까?'
'맞다. 그러니 바로 가자.'
'예에?!'
소속은 달라도 상관의 말이라 니콜라이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자유로울 것 같은 조선전력공사 사내 분위기지만, 상관의 정식 요청을 거부하면 바로 잘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일로 니콜라이는 정식으로 신맥 제1 기병대의 통역 대원으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다.
니콜라이는 무척이나 기뻤다.
모스크바에서 신병 교육을 마치고 조선군에 지원했지만, 체력이 좋지 않아 몇 번이나 떨어졌다.
그런데 조선군도 아닌 경비대라니.
단순히 통역만 하고 올 줄 알았는데 경비대로 소속이 바뀌자 니콜라이는 믿을 수 없었다.
예맥 대륙이었다면 자신처럼 다양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이런 기회가 없었을 텐데,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당당하게 왼쪽 어깨에 '번개' 표시를 부착 한 니콜라이는 가슴을 쫙 폈고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 있을 통역에 앞서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킬 필요가 있어서였다.
"니콜라이, 오늘도 잘 부탁한다."
"멸!"
얼마나 외쳐보고 싶었던 말인가.
경비대 대원들이 힘차게 '멸!'이라 외칠 때마다 속으로 따라 했는데.
"통역 대원 니콜라이 오늘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전처럼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니 걱정하지 말고. 아, 저기 오시네."
니콜라이의 눈에 키는 작지만, 짱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사람이 기병대의 선두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서, 설마···!"
"기수 사령관님 처음 보나?"
"넵! 그렇습니다. 우리 조선에서 말을 가장 잘 타시는 분 아닙니까?"
"말만 잘 타나? 일신 무력과 전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분이시지."
아직 야만의 시대라 개인의 무력은 무척이나 높은 존중을 받았다.
10여 년 전만 해도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했던 조선이었다.
그런데 신의주 대첩 이후 변해갔다.
'나라를 지키는 건 말이 아닌 무력이다'는 걸 깨달은 신하나 백성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대가 니콜라이인가?"
"멸!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그래, 이곳 원주민들 말도 제법 잘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항상 귀를 열어 놓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고 도움을 주기 바란다."
"멸! 명심하겠습니다."
기수의 말에 가슴이 터질 듯한 니콜라이는 기수가 떠난 후에도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 * *
조선 제국력 7년(1666).
연은 야코프를 사로잡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그러니까 여기서 드론을 날리겠다는 말이야? 물도 없는데."
"대신 활주로가 있잖아."
"어디에 활주로가 있어."
"여기 전체가 활주로잖아."
은동리에서 개발한 무인 드론은 수상비행기 형태로 제작됐다.
극비리에 개발하고 있었고, 실험 또한 몰래 해야 했기에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수대 저수지를 활주로 대신 이용 했다.
그걸 봐서 그런지 문식이는 뻘밭 같은 소금호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연이 가리키는 곳은 하얀 소금밭 아닌가.
"괜찮을까?"
"테니스장에 소금 뿌리는 이유가 뭔지 알아?"
"단단하게 하려고?"
"맞아. 저곳은 탱크가 지나가도 끄떡없어."
연이 무인 드론을 날리려고 한 곳은 21세기에 솔트레이크 호수라 불리는 곳이었다.
신맥 기병대가 야코프 일행과 그들을 따르는 원주민들이 사는 곳은 확인 했다.
그 결과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엘로우 스톤에서 솔트레이크시티 사이였다.
곳곳에 널려 있는 물줄기를 따라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그들이 확인되자 연은 대규모 병력을 그곳으로 파견했다.
그것도 거침이 없다는 예맥 기병대를 말이다.
"문제는 통신 거리인데···."
"왜? 100km까지 정찰할 수 있다며?"
"야코프가 있다고 판단되는 곳까지는 300km가 넘어."
"그래? 그럼 어떡해?"
"별수 있나. 중간에 중계기를 세워야지."
아직 조선 말고는 전파를 이용한 무선 통신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없기에 전파 공해라는 건 없었다.
따라서 출력만 높이면 무선으로 드론을 조종할 수 있는 거리는 늘어난다.
하지만 무한정 늘릴 수는 없었다.
조종하는 곳에서는 전력만 충분하면 출력을 늘릴 수 있지만, 무인 드론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드론에서 생산할 수 있는 전력은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또한 해상도는 형편없지만, 영상신호를 전파에 실어 보내려면 높은 주파수를 사용해야 했는데 높은 주파수는 산을 뚫고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연은 50km 단위로 중계기를 세우기로 했다.
연은 작업하는 대원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동시에 영상을 볼 수 있는 모니터를 따로 설치해 놓았다.
"잘 봐봐."
"내가 본다고 아냐?"
"티브이에서 북한 핵시설 보여준 거 생각 안 나?"
"보긴 본 것 같은데···."
"그냥 높이 증류탑이 있는지만 살펴봐."
"알았어."
연은 무인 드론을 조정하는 곳과 연결된 수화기를 들고 이곳저곳 수상한 곳을 지적하며 정찰을 지시했다.
다행히 화창한 날씨라 흑백 영상이지만, 구조물을 파악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저기, 증류탑 같은데?"
"그러네."
상공 3천 미터에서 정찰한 영상이 흑백모니터에 어른거리듯 보였지만, 증류탑이 틀림없었다.
무인 드론으로 위치를 확인 한 연은 그곳으로 즉시 정찰대를 보냈다.
"초창기 옹진반도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그래? 증류탑 연기 색깔은 어때?"
"그게···."
"왜? 내가 말한 것과 달라?"
"네,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달리 흰색이 아니라 많이 어두운색이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연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아직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로켓 기술이 없지만, 연은 다른 방법으로 위치를 얻고 있었다.
그건 바로 전파를 이용한 위치 확인 방법이었다.
인공위성 대신 곳곳에 설치해 놓은 위치 확인용 전파 발신탑.
그곳에서 송출하는 신호의 세기를 이용한 삼각 측정법은 위성에서 송출하는 GPS가 아니더라도 간단하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랬기에 조선전력공사에서 운행하는 선박들은 실시간으로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었고, 지도 또한 더욱 정밀해져 갔다.
* * *
기수를 따라 협상 장소로 도착한 니콜라이는 긴장이 되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전에 한번 본 적이 있기에 당황하진 않았지만, 수많은 총구가 겨누고 있기에 가슴이 쪼그라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서 오시오? 그런데···, 누구···?"
"나는 조선전력공사 예맥 기병대 사령관 기수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조선의 태자가 오는 게 아니었습니까?"
"태자께서는 이곳으로 오시는 중입니다. 아시겠지만, 조선 동역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태평양을 건너야 합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데···?"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야코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을 흐렸다.
햇볕에 타서 그런지 피부색마저 붉었기에 생김새만 아니라면 원주민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태자께서는 무척이나 바쁘신 분입니다. 그대의 요청에 급히 출발했지만, 며칠 더 걸린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죠. 그래서 말인데···."
다시 말을 흐리는 야코프.
기수를 한참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예맥 기병대 사령관이라면 권한이 어느 정도요? 오늘 협상 결과를 지킬 수 있겠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지켜질 겁니다."
"아니라면?"
"태자께서 오고 계시니 판단하시겠죠."
"흠! 역시 최종결정권자는 태자가 맞군요. 태자가 오면 다시 이야기합니다. 두 번 말하는 건 내 취미가 아니니."
"그래요? 따로 전할 말은 없습니까?"
기수의 물음에 야코프는 일어서며 단호히 말했다.
"없소! 태자와 직접 협상할 터이니 그리 아시고, 태자가 오면 다시 연락하시오."
거침없이 뒤돌아서 떠나는 야코프.
흰 천으로 가려 놓은 협상장을 벗어나려 했는데.
그의 눈에 들어 온 장면은 그를 경악게 했다.
"이게 무슨 짓이요!"
"태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함께 가시죠."
"뭐라고요! 이런! 날 납치할 생각이오?"
"납치라니요? 정중히 모시는 겁니다."
"흥! 오늘 중으로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핵 공격이 있을 텐데. 감당할 수 있겠소?"
"핵이요? 그게 뭡니까? 아니 알 필요도 없지요. 뭣들 하느냐! 모셔라!"
1천 명이 넘는 무장 병력과 함께 협상장에 온 야코프는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조선의 기병대 사령관은 핵이 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핵으로 위협하려 했지만, 무시당하고 말았다.
"태자가! 태자가! 말하지 않았소?"
"뭘 말이요?"
"핵! 핵 말이요. 나에게 핵이 있단 말이요?"
"그래서요?"
"그게 터지면 어찌 되는지 알고 이러는 거요!"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갑시다. 그러다 그대의 동료들이 오판 할까 걱정되오."
야코프는 소리쳐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협상장에 야코프가 나오면 바로 잡아 오라는 연의 명령에 기수는 따를 뿐이었다.
조선군의 행동에 야코프를 따라온 수행원들은 겁을 집어먹었는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야코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야코프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협상하기 위해 오늘 만난 곳은 소금호수 북쪽이었다.
넓게 퍼져 있는 하얀 소금 때문에 주변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곳곳에 누렇게 색이 바랜 이름을 알 수 없는 잡초들만 널려 있었다.
따라서 매복은 없을 거로 판단했는데, 아니었다.
예맥 기병대는 사람의 허리까지 올라오는 잡초 사이에 숨어 있었다.
-히이잉!
여기저기서 말 울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조선의 기병대가 황무지를 가득 메우자.
야코프의 병사들은 어쩔 줄 모르며 당황했다.
게 중에는 말을 몰아 돌진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저격수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말과 함께 굴러떨어졌다.
"야코프! 다 죽일 셈이요?"
"이, 이러는 법이 어딨소! 신성한 협상을 이리 무시하다니 천벌을 받을 것이요."
야코프의 거친 항의는 쉴 새 없었다.
니콜라이도 그의 말을 통역하느라 정신없었다.
갑작스레 급변한 상황으로 전투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 순간.
-부우웅!
멀리서 회전날개 소리가 들려왔다.
"야코프! 저길 보시오. 당장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면 모두 죽일 수밖에 없소.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길 바라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본 야코프의 눈에 4대의 복엽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이, 이···!"
야코프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하지만 기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동안 기수가 겪었던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었으니.
-두르르륵!
복엽기에서 발사된 기관총탄이 야코프 병사들 근처에 쏟아졌다.
"경고는 한 번뿐이오. 그러니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하오."
"크흠···."
깊은 침음을 내뱉은 야코프는 기수가 건네주는 마이크를 잡았다.
-모, 모두. 돌아가 있어라.
-나는 아무 일 없을 터이니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황무지에 울려 퍼지자.
그때서야 야코프의 병사들을 포위하고 있던 예맥 기병대가 움직였다.
예맥 기병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포위를 풀고 사라졌다.
야코프와 예맥 기병대가 떠난 자리에는 야코프를 따라온 이들과 병사들만 남았다.
야코프를 따라온 이들은 자신들도 조선군에 납치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야코프만 데리고 떠나버리지 않는가.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요?"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조선에 대적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에겐 핵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사실이 아니요."
"뭐라고요? 사실이 아니라고요?"
"핵을 제조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준비 단계였을 뿐이요. 그래서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도망가자고요. 그때 도망갔으면 이리 잡히지 않았을 텐데···."
"또 도망가면 어디로 간단 말이요?"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야코프의 말만 믿고 따라나선 이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 * *
야코프를 사로잡았다는 연락을 받은 연은 주먹을 쥐고 짧게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문식이가 다가와서 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제 알아볼 일만 남은 건가?"
"그것도 중요하지만, 잘 말해서 우리 편이 되게 해야 해."
"진짜 야코프가 SMR를 만들 수 있어?"
"야코프가 진짜 테일러 사하로프라면 가능할 거야. 문제는 진짜 테일러 사하로프가 맞냐는 건데···."
"아니면 어떡하지?"
"뭐, 시간이 더 걸리겠지."
야코프를 사로잡았지만, 연과 문식이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