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진짜 멋진 것
한미(寒微, Humble)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홍범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어릴 때, 원인 모를 병으로 부모님을 잃은 홍범수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 버렸다.
잘 사는 일가친척을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했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린 동생들이 3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동네 이장님이 나서서 부모님 사후 처리를 해줬다.
덕분에 관청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먹고살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신병교육대 입대 날짜가 가까워지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린 동생들을 두고 떠나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가야만 했기에 동생들을 모아 놓고 신신당부했다.
'내가 없더라도 밥 잘 챙겨 먹고 학교 잘 다녀야 한다. 아프면 참지 말고 바로 병원으로 뛰어가고. 알았지?'
'언니나 어디 다치지 말고 잘 댕겨오세요.'
어린 동생들만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내키진 않았지만, 동네 어른들께서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가 잘 돌보겠다'고 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신병 교육이 끝날 때쯤 다시 고민이 생겼다.
다른 교육생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 댔지만, 홍범수는 그럴 수 없었다.
가난했지만, 화목했던 어린 시절.
마지막 숨을 놓기 전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없으면 네가 집안의 가장이다. 그러니 가장으로써 집안을 잘 돌봐야 한다.'
아버지는 떠나고 없지만, 유언이기에 꼭 지키고 싶었다.
때문에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나자는 말에도 응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동생들이랑 함께 살 수 있을까?'
매일 같이 고민에 빠진 홍범수를 보고 친하게 지내던 정찬웅이 말을 걸었다.
'그러지 말고 조선군에 입대하지 그래?'
'그러면 동생들이랑 함께 살 수 없잖아.'
'이곳에 오기 전에 한약방에서 시간제로 일했다며? 의무병으로 지원하고 2년만 참으면 되잖아.'
'의무병이 되면 좋아?'
'당연하지. 의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참말이야?'
조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제도(制度, System)도 수시로 변경되고 있다.
그렇더라도 라디오만 자주 들었다면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홍범수는 시간제로 일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그럼, 참말이고 말고. 의사면 조선전력공사 직원이잖아.'
'맞다. 사택도 나오고.'
'그러니 의사 될 생각해. 의사만 되면 동생들이랑 좋은 곳에서 함께 살 수 있잖아.'
조선이 아닌 곳에서는 조선군과 경비대를 구별하지 않지만, 조선 내부에서는 달랐다.
둘 다 계약하면 의무적으로 2년을 복무해야 하지만, 받는 보수부터 달랐다.
조선군은 신병교육대만 마치면 지원할 수 있지만, 경비대는 조선군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만 응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군은 신입이고 경비대원은 경력이니 보수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비대원은 조선전력공사 직원이라 조선전력공사 분점 근처에 지어진 사택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니 조선전력공사 직원인 경비대원은 모두가 선망하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2년 동안 의무병으로 근무하고, 경비대에 지원해 봐.'
'그러다 떨어지면?'
'열심히 해야지. 예비의사 시험만 합격하면 무조건 붙는데. 그러니 노력해야지.'
홍범수는 정찬웅과 함께 조선군에 지원했다.
그리고 한의원에서 시간제로 일한 경력이 인정되어 의무병이 될 수 있었다.
'고맙다. 다 너 덕분이야.'
'무슨 소리, 앞으로 내 주치의가 될 거잖아.'
'당연하지.'
조선군에서 2년 동안 노력한 덕분에 예비의사 시험에 합격한 홍범수는 또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의대에 가는 게 더 좋지 않아?'
'그건 안 돼. 지금까지 동생들과 떨어져 살았는데···.'
'그러니까 의대에 가라는 거 아니야. 의대에 가면 함께 살 수 있잖아.'
'그러긴 한데···.'
'또 뭐가 걱정이야?'
이제는 둘도 없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된 정찬웅이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의대를 가면 지금 살던 집에서 나가야 하는데?'
'4년만 참으면 되는데?'
'경비대에 가면 분점 근처 사택에서 지낼 수 있어서 그래.'
'또 동생들 생각하는구나. 다 컸는데 뭘 걱정해.'
'그래도···.'
홍범수가 조선군으로 있는 사이 조선전력공사는 조선 전역에 의사가 될 수 있는 의과대학을 세웠다.
경비대 출신 의사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아파도 병원부터 뛰어가는 21세기 사람들과 달리, 이제 막 중세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조선 백성들은 어디 부러지거나 곪지 않으면 병원을 찾지 않았다.
모든 병원은 조선전력공사에서 짓고 운영하고 있기에 병원비는 무료였다.
그런데도 병원을 찾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어설픈 지식 때문이었다.
라디오에서 의학 상식을 정기적으로 안내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가벼운 감기는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는 것보다 자신의 면역력으로 이겨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직 감기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은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빨리 낫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시중에 판매되는 감기약이 치료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호전되게 도움을 줄 뿐이죠. 따라서 자신의 면역력으로 이겨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 말이 어떻게 와전되는지 모르지만, 백성들은 찢어져서 피가 나거나, 어디 부러지거나, 곪았으면 몰라도 견딜 수 있으면 병원에 가지 않았다.
전과 다르게 잘 먹었기에 아픈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병원은 큰 도시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너, 설마!'
'응, 난 고향에 가서 동생들이랑 함께 살 거야.'
21세기보다 더 도시 위주로 개발되고 있는 17세기 조선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양한 편의 시설이 있는 대도시에서 살기를 선호했다.
그건 의사들도 같았다.
읍과 면에 의원을 세우고 그 옆에 넓고 쾌적한 사택까지 지어 무료로 제공하고 있지만, 지원하는 의사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연의 의과대학을 별도로 세운 이유가.
경비대처럼 월급과 사택이 제공되지 않지만, 학비가 전액 무료였기에 의과대학의 인기는 무척이나 높았다.
졸업 후, 5년 동안 의무적으로 소도시에서 근무해야 하지만, 경비대와 달리 위험하지도 않고 집에서 다닐 수 있어서였다.
아무튼 경비대 의무대원이 된 홍범수는 정찬웅을 따라 신역으로 떠났다.
'난, 신역 기병대에 지원할 거야. 같이 가지 않을래? 이젠 동생들 걱정할 필요 없잖아.'
'그건 그런데···, 굳이 신역까지 갈 필요 있을까?'
'생각해봐. 태자께서 영토를 넓혔을 때 어찌 되었는지.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됐잖아. 그러니 눈 딱 감고 5년만 고생하자. 그래야 너 조카도 잘살 거 아냐?'
정찬웅은 친한 친구라 휴가 때면 홍범수의 동생들을 돌봤었다.
그런데 여동생과 눈이 맞아 버렸다.
아무튼 홍범수와 정찬웅은 가족들과 함께 부픈 꿈을 않고 신역으로 떠났다.
* * *
태평양 해류의 영향으로 신맥 대륙 서해안의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북위 47도에 있는 상서(시애틀)지만,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았다.
'의무원님. 힘내십시오. 서두르셔야 합니다.'
'알았다. 그런데 왜 떨어졌데?'
'그게···, 경치가 너무 좋아서 사진을 찍다가···.'
'연대장님께서 미개척지는 무조건 조심하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하게 뭐 있냐. 그나저나 이곳 경치는 정말 멋지구나.'
친구이자 처남인 정찬웅은 중서(샌프란시스코)에 배치되었지만, 홍범수는 상서(시애틀)에 배치됐다.
동생들만 생각하고 살았던 홍범수는 혼기를 놓쳐버려 노총각이 되어 버렸다.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에서 의무대원으로 있기에 주변에서 혼사가 끊이지 않고 들어오고 있지만, 모두 사양했다.
동생들을 모두 혼인시킨 후에 혼인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저곳입니다.'
안내하고 있는 대원이 가리키는 곳에 신맥기병대원들이 모여있었다.
'어디 보자. 에구···, 아주 작살이 낫네.'
사진을 찍으려다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진 대원은 부러진 다리로 인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해 있었다.
홍범수는 이런 경험이 많은지 가방에서 아편으로 만든 진통제를 꺼내 주사를 놓았다.
병원이었다면 다양한 진통제가 있기에 골라서 쓸 수 있지만, 첩첩산중이라 효과가 빠른 모르핀(Morphine)을 사용했다.
부작용으로 메스꺼움과 졸음, 구토, 변비가 발생할 수 있지만, 절벽을 구르면서 다친 곳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
신속한 손놀림으로 부러진 뼈를 맞춘 홍범수는 부목을 대 잘 묶어 놓은 후 고개를 들었다.
'빨리 이송 하도록 하자. 상태가 좋지 않다.'
'네, 의무원님.'
정찰에 나선 신맥 기병대원들이 서둘러 돌아가려 할 때.
소대장이 홍범수에게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저곳에서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부탁할 게 있습니다.'
'그래요? 무슨 부탁입니까?'
'상서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이 사실을 바로 연대장님께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는 이곳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무전병이 바로 저 녀석인데 구르면서 같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홍범수는 이 사실을 바로 알렸다.
잘은 모르지만, 신맥 대원들이 자주 정찰을 나가는 이유가 뭔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연락을 받은 제1 신맥기병대 연대장인 득칠이는 바로 대붕에 무전을 때렸다.
* * *
연은 문식이에게 물었다.
"너 엘로우 스톤 알지?"
"말은 들어봤는데, 어디 있는지는 몰라."
"시애틀, 아니 상서에서 서신맥(로키) 산맥을 넘으면 바로 있어. 그곳에서 야코프의 일행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해서 추적 중이야."
"확실한 거야?"
"응, 8~90% 정도는. 그곳이 사각지대였거든."
야코프를 찾기 위해 신맥기병대를 투입했지만, 지금까지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깊은 산속에 숨어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다.
"그래? 잘됐네. 꼭 사로잡아야 할 건데."
"그래서 발견해도 감시만 하고 있으라고 했어."
"잘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알 수도 있으니 꼭 사로잡아야 해."
문식이는 이렇게 된 원인이 야코프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한 명도 아닌 세 명이나 시간을 넘어올 수는 없을 테니까.
"알았어. 그래서 가볼 생각인데 함께 갈래? 어차피 너도 돌아가야 하잖아."
"나야 좋지. 그런데 아버지가 허락해 주실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언제든 허락해 주신다고 했으니. 너는 은동리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보고 싶다고 했으니 보여줘야지."
"그래도 돼?"
"안 될 게 뭐야. 어차피 봐도 뭐가 뭔지 모를 건데."
"참나!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와."
"알았어. 바로 갈테니까 구경하고 있어."
* * *
민삼이를 따라 은동리에 도착한 문식이는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는 문식이 앞에 은쌍식이 다가왔다.
"폐하,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 그대가 조선전력공사의 이인자인 은쌍식이오?"
"네, 폐하. 태자께서 좋게 봐주셔서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어울리지 않다니. 그대가 있으니 태자가 안심하고 일을 보는 것 아니겠소."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리 가시지요."
은쌍식의 안내를 받으며 은동리 연구소를 구경하던 문식이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이게 말이 돼?'
조선의 수도인 한양만 보더라도 20세기 중반이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은동리는 완전 달랐다.
'이건 무빙워크잖아.'
21세기 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무빙워크웨이가 건물과 건물 사이로 연결되어있는 게 아닌가.
"이건 자동길이라 부릅니다. 연구원들이 빨리 이동할 수 있게 하는 장치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정말 대조선의 기술은 대단합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는 따로 있습니다. 제가 보여드려도 되지만, 사, 아니 태자께서 오셔서 직접 보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뭔지 모르지만 궁금하군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연을 기다리는 동안 살펴본 은동리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니.
문식이는 기가 막혔지만,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이 정도니 그리 당당했던 거구나.'
사방 2km 정도 되는 공간에 꽉 들어찬 수많은 건물들.
깔끔했다.
게다가 외곽 산자락에 지어진 집들은.
"이건 영화에서나 봤던 호화주택들이잖아."
"영화를 아십니까?"
갑작스러운 은쌍식의 물음에 문식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알고 계셨군요. 그러지 않아도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중입니다."
"아, 그래요? 우리 아파치 왕국에도 해줬으면 좋겠군요."
"태자께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 죄송합니다."
"아, 아니오. 태자에게 물어보겠소."
문식이는 연구소 안까지 견학을 시켜준다고 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연의 말마따나 봐봐야 알지도 못할 거니까.
그러는 사이 연이 도착했다.
"구경 잘했어?"
"잘했지. 너무 잘해서 탈이지만. 도대체 어떻게···?"
"내가 말했잖아.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4가지 힘 중 인류가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전자기력이라고."
"전자기력?"
"전기!"
"아···. 결국 발전기부터 만들어서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다는 말이군."
"응."
문식이는 간단하게 대답하는 연을 보고 황당해했지만, 연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 서명하고 나더니 말했다.
"가자!"
"어딜?"
"쌍식이가 말 안 했어?"
"뭘?"
"으응? 진짜 멋진 거 보여준다고 했을 텐데."
"아, 그 말이야 했지. 근데 뭔데?"
"가서 보면 알아."
문식이는 궁금했지만, 연이 문을 열고 나가자 급히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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