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예맥기 축구 대회(3)
17세기를 중세가 아닌 근세라고 하지만, 아직 이성의 시대가 아닌 야만의 시대였다.
그래서인지 제후국 축구 경기는 예맥기 경기보다 인기가 월등히 높았다.
축구광들의 관심은 예맥기 대회가 열리는 심양이 아닌 한양으로 쏠렸다.
"넘겨! 넘겨!"
"여기! 여기!"
"달려! 달려!"
"챠! 차아, 빨리 차버려!"
피가 낭자한 선수들의 거친 외침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관중들의 흥분된 함성은 잠실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강력한 디젤 엔진을 장착한 굴삭기와 불도저로 밀어붙인 경강 개발은 뻘밭이나 다름없는 잠실 일대를 환골탈태시켰다.
비단과 명주실을 얻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키우던 곳이 이제는 한양 백성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곳이 되었다.
또한 잠실 경기장 서쪽 편으로 흐르는 경강과 합류되는 탄천(炭川)도 함께 개발됐다.
조선군 훈련을 겸하여 개발하기 시작한 탄천은 중장비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병사들의 힘으로 용인까지 수로와 도로를 건설했다.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와 달리 조선군은 영토 방위와 관리가 목적이었기에 이런 방식의 훈련은 영토개발 계획에 따라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튼 제후국 축구 경기가 인기를 얻자 제후국 왕들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늘 다두 왕국과 준가르 왕국의 경기에 제후국 왕들이 모두 모였다.
"축구가 이리 인기가 많을 줄 몰랐습니다."
"열기가 진짜 대단합니다."
"그래서 우리 왕국도 조선처럼 축구를 국기(國技, National Sports)로 정하려 합니다."
"그래요? 우리 왕국도 그런데, 잘 됐습니다. 정기적으로 교류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럴까요?"
"좋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제후국 왕들이 서로 교류하기로 합의하고 있는데 문식이가 끼어들었다.
"허어! 이러다 괜히 밉보이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지 않습니까? 남의 잔치에 끼어들었는데···, 어찌 되고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흠, 그러긴 하겠습니다."
분위기는 싸해졌다.
왕들도 모르진 않았다.
다만 자국 경기에 조선인들이 열광하니 잠시 생각을 지웠을 뿐이다.
연을 추종하는 칼 10세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문식이에게 물었다.
"제로니모, 좋은 방법은 없겠소?"
"어떤 방법 말입니까?"
"대조선과 우리가 동시에···."
"윈윈하는 방법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잉글리쉬를 아십니까?"
"조금 알고 있습니다."
문식이는 엄지와 검지를 약간 띄어 보였다.
"역시! 학식이 대단하십니다. 태자께서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었군요."
전통 바이킹처럼 거대한 덩치를 가진 칼 10세가 연을 따르는 이유 중 하나는 언어였다.
수많은 인종과 나라로 구성된 신성로마제국.
그곳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언어는 독일어였고, 독일인이 통치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태자는 독일어가 유창했다.
아담 샬에게 배웠다고 들었는데 완벽했다.
억양은 특이했지만, 영어 또한 아주 잘했다.
언어만 보더라도 조선의 태자는 듣던 대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이처럼 자신과 다르게 학식이 대단한 조선의 태자였기에 칼 10세가 연을 따랐던 거다.
"과찬이십니다. 서로 생각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지, 제가 학식이 높아서는 아닐 겁니다."
"그래도 태자께서 가장 자주 찾는 이가 그대 아니오?"
"그렇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칼 10세는 다른 왕들을 쓱 훑어보더니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서로 주고 받는 게 있어 보였다.
그러더니 칼 10세가 문식이에게 물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좋은 방법이라···, 어떤 방법 말씀입니까?"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윈윈하자고."
"아···, 상생(相生)하는 방법 말입니까?"
"그런 어려운 단어는 모르겠고, 다 같이 잘 되는 방법 없습니까?"
"글쎄요···."
문식이가 말을 흐리자 칼 10세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우리끼리 대회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예에?"
"그러지 않습니까? 아파치 왕국만 떨어져 있지, 우리 제후국들은 예맥 대륙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맥기 대회에 동참하려고 했습니다."
"그랬습니까?"
"그랬었죠···."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흔드는 칼 10세의 행동에 문식이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규칙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규칙 때문에 조선 프로 축구 협회에서 거부했습니다."
"그랬습니까?"
"네, 선수들이 다치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예맥 대륙기를 따로 열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예맥기 말고 예맥 대륙기를 열자는 말입니까? 그것도 우리 5개국만요?"
"맞습니다. 그런데···."
칼 10세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하지만 문식이는 무엇이 문제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칼 10세처럼 단순하게 힘만 믿고 설치는 학생들을 수도 없이 보았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문식이는 벽에 걸려 있는 지도를 가리켰다.
"저길 좀 보십시오. 정 중앙에 조선의 발원지인 한반도가 있고 동쪽에 우리 아파치 왕국이 있습니다."
"신대륙 말입니까?"
"네, 신대륙 남쪽이 바로 우리 아파치 왕국입니다."
"대단하군요. 아파치 왕국의 영토가 유럽보다 몇 배나 크다고 하더니 진짜였군요."
"영토만 크면 뭐 합니까? 사람이 살 수 없는 밀림이 전부인데."
"그래도 엄청난 황금과 은덩이가 널려 있는 곳 아닙니까? 그래서 말인데···."
칼 10세는 경청하고 있는 다른 제후국 왕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아파치 왕국은 저곳을 아파치 대륙이라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한답니까? 저곳 또한 예맥 대륙의 일부거늘."
"예에? 아닙니까?"
황소처럼 커다란 눈을 껌벅이는 칼 10세.
문식이의 태세 전환에 머릿속 회전이 멈춘 듯 보였다.
"조선에는 동역, 중역, 서역 그리고 신역이 있습니다. 여기서 신역은 신맥 대륙을 말하는 겁니다. 신맥이 무슨 뜻인 줄은 아시지요?"
"예에?"
조선말을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칼 10세지만, 한자 문화권이 아니었기에 당황하는 칼 10세였다.
그러자 한자를 잘 아는 카마찻 왕이 지원에 나섰다.
"신맥이란 새로운 예맥이란 뜻이죠.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따라서 우리 아파치 왕국이 있는 곳도 예맥 대륙의 일부입니다."
"무슨, 그런, 억지를···."
황당하다는 칼 10세의 표정에도 문식이는 계속 이어 말했다.
"저 지도는 조선의 최첨단 기술로 작성한 거라 들었습니다. 잘 보십시오. 태평양 북쪽으로 예맥과 신맥 대륙이 거의 붙어 있지 않습니까? 아주 오래전에는 한 대륙이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랬기에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간다.
거대한 덩치와 막강한 힘으로 무력에는 자신 있는 칼 10세이지만, 박식하다고 소문난 문식이의 말에 수긍했다.
알지 못하는 지식을 저리 당당하게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오래전, 이 지구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수십 미터나 되는 커다란 공룡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었죠. 그때 지구는 하나의 대륙이었습니다. 바로 예맥 대륙 하나뿐이었습니다."
"정말입니까?"
"정말이고 말고요. 언제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원래 하나였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문식이.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왕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니모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예맥 대륙기에 떨어져 사는 아파치 왕국도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식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연이 있기에 조선과 긴밀이 조약을 맺고 아파치 왕국을 발전시키고 있지만, 훗날이 문제였다.
'나라 간에 의리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문식이기에 조선뿐만 아니라 제후국과도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것만이 자신이 없는 훗날에도 아파치 왕국이 번성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문식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어떤 방법이 좋을까?'
제후국 왕들이 예맥 대륙기를 어떻게 진행할지 의견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생각을 마친 문식이가 입을 열었다.
"잠시 내 말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문식이의 말에 한참 의견을 나누던 왕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여기서 나보다 축구 규칙을 잘 아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건 사실이지요. 그런데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우리 또한 예맥족이라 조선말을 쓰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이번 기회에 전쟁을 없앱시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쟁을 없앤다고요? 어떻게요?"
왕들의 흥미를 끈 문식이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뗐다.
"우리 제후국끼리라도 서로 돕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후국끼리 분쟁이 생기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거야, 대조선에 중재를 부탁하면 될 일 아니오?"
호토고친의 말에 문식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한데 만약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래도 따라야지요. 어쩌겠습니까? 대조선이 있어야 우리 왕국들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불만은 남겠지요. 문제는 불만이 쌓이면 우리의 결속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 간의 분쟁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는지."
"설마! 축구로 해결하자는 말입니까?"
미련해 보이는 곰이 똑똑한 것처럼 칼 10세도 그랬다.
힘만 잘 쓰게 생긴 칼 10세는 문식이가 원하는 바를 바로 인지할 수 있었다.
"맞습니다. 분쟁이 생기면 양쪽 대표팀의 경기로 판단하자는 겁니다."
"음···."
"크흠···."
순간 정적이 오갔다.
참신한 방법이지만, 자국의 이익을 따져 봐야 했기에 왕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전쟁 대신 축구로 분쟁을 해결하자. 좋은 의견입니다. 우리 체코 왕국은 그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정적을 깨고 입을 연 사람은 안톤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종교적 탄압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한 체코 왕국의 안톤은 원래부터 왕이 아니었기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 안톤이 제일 먼저 동참할 뜻을 내비치자 다른 왕국의 왕들도 따라 동의했다.
"하지만 규칙이 문제입니다. 지금 같은 규칙으로는 경기중에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악감정만 커질까 걱정됩니다."
"규칙을 바꾸면 됩니다."
"어떻게요?"
다시 왕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문식이.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우리 제후국들의 축구 경기가 인기를 끌고 있다지만, 오래가지 않을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래가지 않다니요? 이렇게 인기가 높은데···?"
"생각해 보세요? 선수들이 저리 다쳐 나가는데···, 이건 축구가 아니라 전쟁이지요."
전쟁이란 말에 제후국 왕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전장에서 굴렀던 적이 있기에 제후국들의 축구 경기가 전쟁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무기를 들고 상대를 죽이지 않았을 뿐 하는 짓은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축구 경기를 이원화시켰으면 합니다."
"이원화라 어떻게 말입니까?"
"원래 축구와 전투 축구로 나누는 거지요."
문식이는 자신이 생각한 내용을 왕들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하는 축구는 대조선 프로 축구 규칙을 따르고, 전투 축구의 규칙은 조금 변형하자는 겁니까?"
"맞습니다. 나라 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치루는 경기인데 사망자가 나오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규칙을 좀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식이의 말에 왕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규칙을 강화하면 재미가 떨어질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제후국 축구는 인기가 없어질 겁니다."
"맞습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보호구를 착용하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오, 그거 좋은 방법입니다."
"보호구라 그거 좋겠습니다."
* * *
그날 저녁.
문식이와 단둘이 만나 연은 실실 웃으며 문식이를 놀렸다.
"아니, 아파치 대륙이라고 그리 빡빡 우기더니 웬일이야?"
"무릇 현명한 군주는 제 뜻을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것 몰라?"
"그래요? 위대하고 현명하신 제로니모 군주님께서는 잘 아시니 좋겠습니다. 근데 말이 돼?"
"왜 말이 안 돼? 서로 죽고 죽이는 것보다 축구로 해결하는 게 현명한 거지."
"그렇게 현명한 일이면 그냥 하면 되지 왜 나를 찾아왔어?"
"생각해 보니까 잘 이용하면 이 지구에서 전쟁을 끝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으응?! 그게 무슨 말이야? 전쟁을 끝낼 수 있다니?"
한마디 말로 연의 관심을 끈 문식이는 자신이 구상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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