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하와이(1)
연은 예를 올리는 일식이를 보고 삼촌 미소를 지었다.
자신보다 1년 먼저 태어난 일식이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귀엽기만 했다.
아파치 왕국의 전사 중의 전사인 일식이라 온몸을 감싸고 있는 잔근육들이 힘을 과시하듯 꿈틀거렸지만, 무섭기는커녕 뿌듯했다.
"어서 오거라. 그래 할 말이 있다고?"
"네, 전하."
"여긴 우리뿐이다. 그러니 그냥 삼촌이라 부르거라."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너의 아버지와 나는 형제와 같으니 나이를 떠나서 넌 내 조카가 틀림없다. 그러니 삼촌이라 부른들 누가 뭐라 하겠느냐?"
"고, 고맙습니다. 사, 삼촌···."
다 죽어가듯 희미하게 들리는 삼촌이란 말.
연은 활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앉아라. 네 말을 듣고 싶구나. 그래 북쪽으로 가고 싶다고?"
"네, 전하. 아, 아니 삼촌."
일식이는 조선의 태자와 아버지 사이가 궁금했다.
만나자마자 단둘이서 며칠 동안 대화를 했다고 들었다.
그랬기에 형제의 예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시로 조선의 태자에게 무전 연락을 하는 아버지의 말에서 둘의 관계는 그 이상으로 보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포로들을 신문하면서 알게 된 조선이라는 나라.
아파치 왕국 정도는 하루면 무너트릴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대제국이었다.
그런 대제국의 태자에게 부탁이 아니라 당당히 요구하는 아버지.
비록 대가로 황금과 은덩이 그리고 자원을 채취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하지만, 일식이가 아는 세상을 살아가는 상식에선 말이 되지 않았다.
힘이 강하면 침략해 정복하고 복속시키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형제라는 조선의 태자는 그리하지 않았다.
되려 아무것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아파치 왕국을 위해 많은 것들을 베풀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아버지에게 관계를 물어봤지만, 지긋이 웃기만 했다.
평소에도 말이 별로 없던 일식이라 더는 묻지 않았지만, 가슴속 한 곳에 궁금함이 쌓여만 갔다.
일식이는 생각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
'우리 아파치 왕국이 대조선에 당당해지려면 주고받는 것이 명확해야 해.'
그래서였다.
조선의 태자가 찾고 있는 야코프란 자를 대신 찾아 주려고 했던 이유가.
그런데 오늘.
조선의 태자가 자신을 삼촌으로 부르라고 하지 않은가.
기뻤다.
그리고 안심이 되었다.
아무리 아버지와 관계가 좋다고 하지만, 세상일이란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아파치 왕국으로서는 따지지 않고 도움을 주는 대조선이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만 했다.
'세상엔 공짜가 없어!'
몇 번이고 되새겨 보지만, 자신을 보고 저리 환하게 웃는 조선의 태자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굳이 그리하지 않아도 된다. 너도 알겠지만, 아파치 대륙 북쪽은 광활하다. 그 넓은 곳에서 야코프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내가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단다."
"설마···? 비행기?"
"비행기를 아느냐?"
"네, 전, 아니 삼촌. 이번 조선 제국 박람회에서 하늘을 나는 기물을 선보였다고 들었습니다."
아파치 왕국의 영토인 중남미 곳곳에서 대공사가 시작되면서 함부르크와 일식시(베라크루즈) 사이에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항로가 생겼다.
그로 인해 조선에서 발행되는 신문이 시간은 지났지만, 정기적으로 아파치 왕국까지 배달되고 있었다.
일식이는 품 안에서 신문을 오려 접어놓은 것을 펼쳐 연에게 보여줬다.
"맞다. 비행기는 이제 막 개발되었으니 조금만 기다리 거라. 문제점을 다 파악했으니 곧 양산을 시작할 거고, 이곳에도 비행기가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다."
"참말입니까?"
"왜, 비행기에 관심 있느냐?"
어린아이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꽉 다문 상태로 빠르게 고갯짓을 하는 일식이를 보자 연은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비행기를 조종하려면 배울 게 많다는 걸 아느냐?"
"그렇습니까?"
연은 일식이가 비행기에 관심을 표하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야코프 찾는 일은 그리 급하지 않으니 날 따라 조선에 가지 않을래? 조선에 가서 조선의 문물도 보고 비행기 조종법도 배우면 좋을 것 같은데···?"
일식이는 대답하지 않고, 아버지인 문식이를 바라보았다.
허락을 원하는 눈빛이었다.
문식이는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지으며 일식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맡은 일은 삼식이와 오식이에게 넘기면 될 것 같구나. 그러니 걱정 말고 삼촌 따라서 조선에 다녀오거라. 발전된 조선의 모습을 봐야 이곳도 그리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
아무리 자식이 많다고 하지만 일식이는 첫아들 아닌가.
그런 첫아들이 어느새 자라 아파치 왕국의 기둥이 되었다.
소중한 아들이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 보다 조선으로 가서 배우고 익혀 돌아오는 것이 아파치 왕국으로서는 여러모로 득이 될 게 틀림없었다.
"고맙습니다. 폐하."
"고마움은 내가 아니라 네 삼촌에게 해야 한다. 네 삼촌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호의를 베풀겠느냐?"
"고맙습니다. 삼촌."
문식이는 100명이나 되는 조선 유학생을 선발했다.
일식이 혼자 보내는 것보다 앞으로 아파치 왕국을 발전시킬 유능한 인재들도 함께 보내기로 한 거였다.
또한 부산에서 아파치 왕국까지 정기적으로 함선을 운항하기로 했다.
대신 아파치 왕국의 항구는 아카풀코가 아니라 서울에서 서쪽으로 200km 떨어진 곳에 새로운 항구를 만들고 그곳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이식시'라 이름 지어진 '푸에르토바야르타'는 아파치 왕국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 중 하나로 변해 간다.
21세기에 유명한 휴양관광지였지만, 조선과 정기적으로 무역하면서 눈부시게 바뀌어 간다.
* * *
조선 기함 1호를 타고 조선으로 가던 일식이는 신기하기만 했다.
같은 아파치 부족이라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억양과 발음 등 말투가 달랐지만, 의사소통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우리가 쓰는 말은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말인데 그게 조선말이었구나.'
어느 날 갑자기 변해버린 아버지 제로니모.
땅을 파서 얻은 광석으로 쇠를 얻고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었다.
전사들을 훈련하고 주변 부족을 정복하면서 세를 넓혔다.
하지만 빈곤한 삶은 변하지 않았다.
곡식을 땅에 심고 거두는 농사를 하기에는 아파치 왕국 주변 땅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겪은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승리했다.
승리의 요인 중 중요한 하나는 의사소통이었다.
제로니모가 가르쳐준 암구호와 조선말은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서로 간에 의사를 확실히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고, 전사의 기본이 되었다.
전사들만 사용한다는 독특한 언어.
자연스럽게 백성들도 따라서 사용하게 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남자아이들의 꿈은 전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전사들의 언어는 빠르게 퍼져나갔고, 어느 순간 아파치 왕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그 언어가 조선말이라니.
아버지가 표류한 조선인에게 배운 말이라 들었지만, 이리 완벽히 같을 줄을 몰랐다.
아파치 왕국에서 선발한 유학생들이 라디오를 들으면서 대원들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던 일식이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 손질했다.
연이 선물로 준 사인검이었다.
천지를 구성하고 있는 오행을 총합하여 순양의 기운을 깃들게 해 사귀를 베고 재앙을 물리친다는 사인검은 무척이나 단단하고 날카롭고 아름다웠다.
또한 28수 별자리가 칼날에 빼곡히 새겨져 있었기에 신비롭기까지 했다.
일식이가 햇빛에 반짝이는 사인검을 들고 감탄하고 있는데.
-위윙! 위윙!
-전 대원은 들어라!
-처음 보는 섬을 발견했다!
-모두 무장하고 대기하라!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명령이 하달되자 대원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오합지졸 같은 조선군은 정색하더니 각자 맡은 위치로 뛰어갔다.
여기저기서 '윙! 윙!' 소리가 울리며 포탑이 한곳을 향해 정렬했고, 갑판에서 노닐던 대원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갑판은 위험할 수 있으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대원 중 한 명이 갑판에서 서성이고 있던 유학생들을 선실로 안내했다.
일식이도 따라 들어가려 했는데.
"일식아! 이곳으로 올라오거라."
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나 들어와 봤던 조선 기함 1호의 함교지만, 일식이는 새로웠다.
반작이는 수많은 작은 불빛들이 일식이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커다란 섬.
가운데 높이 치솟은 황톳빛 산을 타라 흘러내린 검은 산줄기.
아무리 보고 또봐도 사람이 살지 않은 무인도 같았다.
한참 섬을 바라보던 연이 입을 열었다.
"저곳은 하와이제도가 틀림없다. 그러니 이곳에서 며칠 있을 생각을 하고 조사하도록 해라."
"넵! 사장님."
"절대 원주민들에게 먼저 접근하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새로운 지역을 발견했을 때 원주민들을 대하는 방법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조선 제국 초등학교 교육은 단순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게 다였다.
조선글과 아라비아 숫자, 사칙연산과 알파벳, 예의와 도덕 말고는 더 배우는 게 없었다.
아니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위생이었다.
'마마라 부르는 천연두, 학을 떨 만큼 아픈 학질, 서역과 유럽반도의 인구를 반으로 만든 흑사병은 모두 바이러스 때문이다.'
조선은 갑자기 퍼져나가며 사람들을 죽이는 전염병과 위생에 관한 교육을 초등학교 때부터 하고 있었다.
또한 대원들에게도 이런 교육을 수시로 실시하고 있었다.
'우리 몸에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라는 세균이 살고 있다. 우리는 그 바이러스에 저항할 수 있는 항체라는 것이 있지만, 원주민들은 없을 수 있다. 그러니 접근은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오지를 탐험하고 왔을 때 갑자기 아프면 새로운 바이러스에 노출된 것이 틀림없으니 격리하고 지켜봐야 한다. 절대 아픈 몸으로 조선 영토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처럼 철저히 교육했기에 대원들은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상륙함에 올랐다.
하루가 지난 후.
정찰에 나섰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저 섬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섬 북서쪽에 또 다른 섬들이 있는 걸 봤습니다."
"그래?"
"그런데 사장님. 사람들이 산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이 섬이 화산섬이라 그럴 거다. 북서쪽에 있다는 섬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게 틀림없으니 그곳으로 가자."
백두산보다 훨씬 높은 해발 4,208m나 되는 하와이의 화산은 살아 있었다.
시뻘건 용암을 하늘 높이 품어내진 않았지만, 아직도 식지 않은 용암이 산등성이 곳곳에 남아 있었기에 언제 폭발할지 몰랐다.
그래서 연은 더는 하와이섬을 조사하지 않고 바로 북서쪽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저 섬들은 나중에 조사하기로 하고 저 섬으로 곧장 가자."
전생에 연은 하와이를 가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하와이섬 바로 옆에 있는 마우이섬을 들리지 않고 바로 진주만이 있는 오아후섬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생각보다 넓게 퍼져있는 하와이제도.
제도 전체를 따지면 경기도의 3배나 된다.
가장 큰 하와이섬의 크기는 제주도의 5.7배나 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오아후섬도 제주도의 84%정도이다.
그랬기에 하와이섬에서 오아후섬까지 가는 길은 증기터빈 엔진으로도 한나절이나 걸렸다.
제주도에서 부산 가는 것보다 훨씬 멀었다.
연은 눈에 익은 분화구로 된 산을 보고 크게 소리 질렀다.
"이곳은 하와이제도가 맞다. 저 섬이 오아후섬이고, 저곳에 원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을 거니 조심히 정찰 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한쪽에서 연이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일식이는 궁금한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또한 익숙한 것도 있었다.
어찌 된 건지 모르지만, 조선의 태자가 하는 행동은 아주 익숙했다.
그건 바로 아버지인 제로니모가 행했던 것과 같았다.
모두가 처음 와본 곳인데도 조선의 태자는 '저곳이 하와이다'고 단언했다.
마치 아버지인 제로니모 같았다.
또한 병사들이 태자를 보고 '사장님'이라 부르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오아후섬에 상륙한 대원들이 다시 돌아왔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사장님."
"그래? 원주민을 만났느냐?"
"네, 사장님. 그런데···."
"왜? 왕을 만나지 못했느냐?"
"그게 아니라 왕이 없습니다."
"뭐?"
대원들이 오아후에서 만나 원주민들은 원시인이나 다름없었다.
나뭇잎과 꽃으로 단장했지만, 중요 부위만 가린 정도였다.
"무기 또한 돌도끼 정도입니다."
"그래? 아직 왕국이 세워지지 않았구나."
역사를 잘 모르는 연이기에 하와이 왕국이 언제 생겼는지 몰랐다.
그건 문식이도 마찬가지였다.
역사 선생님이었던 문식이지만, 하와이 역사는 관심이 없었기에 알지 못했다.
"선물은 전해 주었느냐?"
"네, 사장님. 너무 경계하는 터라 해변에 선물상자를 놓고 왔습니다."
"잘했다. 낼 다시 가보자 구나."
진주만은 천연의 항구이자 요새였다.
만 안으로 들어가는 수로의 폭은 300m가 넘었고 안쪽은 수많은 배들이 정박하기에 충분했다.
상륙정을 타고 오아후섬에 내린 연은 멀리서 바라 보는 원주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다가왔다.
점점 가까이 다가서는 원주민들.
그들의 손에는 죽창이 들려 있었다.
원주민들이 위협하듯 죽창을 앞세우고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접근하자, 대원들은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 방패로 연을 감쌓다.
연은 밝게 웃으며 검지와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흔들었다.
하와이인들의 인사인 샤카(Shaka)를 표현한 거였다.
"알로하!"
원주민들은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은 다시 한번 '알로하!'라 외쳤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들고 있던 죽창을 집어 던졌다.
-텅! 텅! 텅!
죽창은 폴리카보네이트 방패에 막혀 땅에 떨어졌다.
그런데 연 뒤에 서 있던 일식이가 사인검을 꺼내 들더니 번개처럼 돌진했다.
동시에 검수가 칼을 꺼내 들었지만, 일식이는 벌써 원주민들을 썰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