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조선 제국 박람회(6)
조선 제국 박람회 개최일 첫날 밤.
논리적 사고가 뛰어났던 논식이가 두각을 나타냈다.
다른 '식'자 돌림 연구원들과 다르게 지금까지 조용했던 논식이는 발진기가 개발되자 드디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표를 보고 계수기(Timer)의 숫자가 정확한지 다시 한번 점검들 해봐."
"네, 팀장님."
두루섬 서쪽에 있는 곤유도에서 논리 회로팀을 이끌고 뭔가를 조작하던 논식이는 초조한지 시계를 자주 쳐다봤다.
"10분 남았다. 모두 이상 없나?"
"1번부터 10번까지 이상 없습니다."
"11번부터 20번까지 이상 없습니다."
"······."
"91번부터 100번까지 이상 없습니다."
나무는 물론 잡풀까지 깔끔히 베어낸 공터에 설치된 장치는 무려 100개나 되었다.
장치마다 연결된 전선들로 인해 어수선해 보였지만, 모든 선에는 찾음표(Label)가 붙어 있었기에 실수할 일은 없어 보였다.
논식이는 손목을 젖혀 이번에 선물로 받은 '숫자 시계'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빛이 없으면 잘 보이지 않기에 이리저리 손목을 움직였다.
1초마다 바뀌는 숫자가 '7:59:00'을 표시하자 논식이가 외쳤다.
"진봉아! 1분 남았다. 초읽기에 들어가!"
"준비 끝났습니다. 팀장님."
"좋아!"
논식이는 어떻게 은동리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 이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지체 높으신 사장님께서 알려주셨던 논리의 세계.
문자가 아닌 숫자로 표현되는 세상이었다.
'0' 아니면 '1'로 되어 있는 '이진수'로 된 세상은 응용하기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
한동안 소수(素數, Prime Number)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방황한 적도 있었다.
파이(Pie)값을 구한다고 몇 달 동안 나누기만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규식이가 이끄는 반도체 팀에서 새로운 반도체를 개발해 내자 다시 논리 회로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더 복잡한 집적회로(IC, Integrated Circuit)를 구성할 수만 있다면 프로그램할 수 있는 컴퓨터라는 것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지금은 논리 회로를 모아 놓은 IC칩으로 회로를 구성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프로그램을 할 수 있는 고밀도 집적회로가 개발된다면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게 틀림없었다.
"숫자 세기 들어갑니다. 십! 구! 팔! ······."
초읽기를 시작하는 진봉이의 목소리에 모두가 긴장하며 숨을 죽였다.
"삼! 이! 일! 스위치 연결됩니다."
빨간색 발광 다이오드(Diode) 조합으로 표시되는 숫자가 모두 '0'을 가리키자.
첫 번째 장치에 연결된 전자계전기(Relay)가 '딱' 소리와 함께 작동하며 점화 장치에 불이 붙었다.
'펑!' 소리와 함께 '피슈융' 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올라가는 폭죽(爆竹, Firecracker).
-쿠앙!
어두운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하얀 별들을 수 놓았다.
그와 동시에 두루섬에 있는 대관람차에 불이 들어오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다시 하늘 높이 치솟는 폭죽들.
펑! 펑! 터져나가면서 평양탑을 밝히는 불빛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층층이 쌓이며 밝혀졌다.
"""우와아!"""
빨주노초파남보.
평양의 밤하늘이 무지갯빛 다양한 색으로 아름답게 빛나자 평양이 떠나갈 정도로 곳곳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휴! 다행이야···."
자신이 설계하고 직접 납땜해서 만든 전자 회로가 정상 작동하자 논식이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전 세계에서 이번 박람회를 보기 위해 각국의 사신들과 상인들이 몰려왔다는 말을 들었다.
아직 파악조차 못 한 엄청난 수의 조선 백성들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번 박람회 불꽃놀이를 담당하게 된 논식이.
수시로 연에게 연락하여 묻고 묻고 또 물었다.
그럴 때마다 알려주는 새로운 지식들.
'알아서 움직이는 로봇을 꼭 만들어 내고야 말거야.'
논식이의 물음에 연은 여과 없이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알려줬다.
그만큼 논식이에게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논식이는 불꽃놀이를 기획하면서 다양한 폭죽 색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섞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끈질긴 노력 끝에 다양한 색을 표현할 수 있었다.
'구리를 섞으면 연소할 때 청록색을 띤다. 알루미늄은 은색, 나트륨은 노란색, 스트론튬은 빨간색, 칼륨은 보라색, 칼슘은 주황색, 바륨은 황록색, 세슘은 파란색이다. 절대 잊지 말라! 멋지게 보이려면 배합을 잘해야 한다.'
특정 금속은 굉음을 내며 발사 도중 폭발까지 했기에 폭죽에 색을 넣기 위한 실험을 할 때마다 간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성공했다!"
논식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양팔을 높이 치켜들고 '펑! 펑!' 소리와 함께 터져나가는 불꽃을 보며 몇 번이나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이 만든 전자 회로가 아무런 문제 없이 정상 작동하고 있었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평양의 인구는 1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 제국 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과 함께 공사가 시작되자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해마다 홍수로 인해 범람하던 대동강은 단단한 콘크리트로 정비됐다.
강변을 따라 공원과 숙박업소, 식당, 상점들이 들어섰다.
넓은 도로와 함께 하수도, 상수도, 전력선, 전화선까지 연결되면서 평양의 모습이 달라져 갔다.
그런 와중에도 평양의 원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동강 북쪽, 구 평양 시가지(市街地)는 최대한 보존했다.
대신 대동강 남쪽에 새로운 시가지를 조성했다.
10차선 대로를 따라 들어선 상점들과 고층 건물들.
그 뒤쪽으로 반듯한 주택단지들이 들어섰다.
또한 대동강을 따라 새로운 공단도 조성됐다.
'자체적으로 문제없이 도시가 성장하려면 양질의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
연의 명에 따라 평양 인근에 조성된 공단에는 맞춤 중장비 제조 공장 같은 쇠를 다루는 업체가 있었지만, 식품 가공업체가 대체로 많았다.
조선 제국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면서 연은 고민이 많았다.
'기반시설(Infra)은 이 정도면 한동안 문제없을 것 같은데···.'
굶주림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세상.
사고 싶은 기물들이 쏟아져 나오자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질의 일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도 철도와 도로, 주택과 건물을 짓는 일에 많은 인원이 투입되고 있었고, 농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비율도 높았다.
'이대로는 안 돼.'
경제에 관해 별도로 공부해 본 적이 없었지만, 다양한 도시 건설 게임을 해 봤기에 무엇이 필요하고 중요한 건지 파악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연이 옹진반도에 있는 공돌이들과 숙수들에게 창업하라고 권한 이유가.
굴삭기와 불도저 같은 중장비가 도입되면서 필요가 없게 된 수많은 건설 인원들.
그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연은 단순한 제조업과 식품 가공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풀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지.'
조선 백성들의 소득이 점진적으로 증가하자 연은 효종에게 허락을 받고 관광지 개발에 나섰다.
연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라 일컫는 한반도 곳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끊이지 않고 들어오는 수익을 그곳에 과감히 투자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관광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어.'
원인 파악 결과 제일 문제는 숙소와 먹거리였다.
편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게 관광할 수 있도록 도로와 철도를 놓으면서 라디오를 통해 홍보하고 있지만, 잠잘 곳조차 없는 관광지는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행이란 말은 있어도 관광이란 말은 없었던 세상.
백성들의 소득은 올라갔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디오 홍보를 듣고 솥단지부터 바리바리 싸서 떠난 여행은 고행길이나 다름없었다.
'간단한 옷가지와 돈만 있으면 자유롭게 여행하고 관광할 수 있게 해야 해.'
연은 조선 제국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된 금강산부터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수학여행'을 추진하라고 공문을 보냈다.
'추수가 끝난 농한기(農閑期)를 이용해 학생들을 보내라.'
세상이 넓고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이지만, 갑자기 시행된 일이라 말썽이 많았다.
아무리 쇠도 씹어먹고 소화해 낸다는 청소년기 학생들이지만, 밥만 먹고는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없었다.
그것도 설익거나 타버린 밥이 많았기에 학생들의 불만은 무척이나 많았다.
'동시에 수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먹일 수 있는 시설이 없습니다.'
금강산 입구까지 연결된 철도로 기차 여행을 한다고 하지만,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연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여행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거워해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제일 중요한 것은 수천 명이나 되는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에게 똑같은 품질의 음식을 동시에 제공하는 일이었다.
고민하는 연에게 은쌍식이 꺼낸 말이 해결책이 되었다.
'사장님, 그러지 마시고 우리 숙수들을 활용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응? 숙수를 활용하다니?'
'우리 숙수들은 대량으로 음식을 만드는데 도가 텄지 않습니까?'
은쌍식의 말이 맞았다.
옹진반도에는 조선전력공사 직원들과 가족들만 살고 있다.
실질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10만 명이 되지 않았지만, 딸린 가족을 모두 포함하면 그 수가 30만 명이 넘었다.
아침과 저녁은 집에서 먹었지만, 점심은 모두 단체 식당에서 먹기에 숙수들은 대량으로 음식을 조리해내는 일을 매일 같이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음식의 맛과 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연은 숙수들에게도 창업을 독려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공돌이들과 숙수들.
동업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량으로 음식을 만들어 내려면 그에 맞는 설비가 필요했고, 운용할 사람도 있어야 했다.
여기에 연의 아이디어가 첨가되자 식품 가공업체의 창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미리 찐 밥을 만들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에이, 막 한 밥하고 맛이 같나?'
'그럼, 이건 어떨까? 주먹밥을 얇게 펴서 그사이에 고기와 양념을 넣는 건?'
'그건 연구원들이 제일 좋아하는 햄버거잖아.'
돼지고기 뒷다릿살로 만든 햄을 빵 사이에 넣고 만든 음식을 누가 제일 먼저 개발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은동리 연구원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라는 걸 모르는 숙수는 없었다.
서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소시지와 햄은 상온에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기에 동역에서도 흔한 음식이 되었다.
'그거와 이건 다르지.'
'뭐가 다른데?'
'그건 밀가루로 만든 빵이고, 내가 생각한 건 밥이잖아.'
'그렇네. 그럼 밥버거라하면 될 것 같은데?'
'밥버거? 밥버거라. 어감이 좋은데?'
숙수 두 명은 같은 마을에 사는 공돌이를 꼬셔 창업했다.
주먹밥처럼 양념 된 밥 사이에 다진 어육이나 햄을 채소와 함께 넣고 만든 밥버거는 미친 듯이 팔려 나갔다.
주문하면 바로 나오니 시간이 없는 직장인이나 먹고 나도 바로 배가 고파오는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게다가 조선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흰쌀로 만든 음식 아닌가.
은동리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다고 해서 '은동 밥버거'라 이름 지은 식품 가공업체의 소문을 들은 연은 즉시 조선전력공사 모든 분점에서 은동 밥버거를 팔도록 했다.
이로써 세계 최초로 식당 연쇄점이 탄생하게 되었다.
기차 안에서도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는 은동 밥버거는 버스 정류장에도 등장했고, 마을마다 하나씩 간판이 세워졌다.
이를 그냥 보고 있을 조선인들이 아니었다.
비슷한 밥버거를 만들어 파는 이도 있었지만, 잘 나가는 식당은 자기들만의 빠른 요리법을 개발하여 연쇄점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와 더불어 커피나 차만 파는 전문점도 등장했다.
시원하고 달콤한 냉커피를 빨대로 빨아 마시던 태자비.
처음 느끼는 생소한 맛에 기분이 좋은지 밝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기에 연은 태자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민망합니다. 전하."
"민망할 게 뭐가 있소."
"보고 흉볼까 두렵습니다."
"누가 감히!"
연은 눈을 부라리며 주위를 살폈다.
쿡쿡거리며 웃던 태자비를 모시는 궁녀들이 놀라 고개를 급히 돌리자.
연은 뻔뻔하게 말했다.
"그대의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기에 내 손이 나도 모르게 그리한 게요. 그대가 불편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못된 손을 내 잘라버리겠소."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발 그런 말씀을···."
"장난이오. 장난."
태자비의 놀란 모습에 연은 악동처럼 웃었다.
하지만 태자비는 놀람이 가시지 않았는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미안하오. 내가 장난이 심했소,"
"아닙니다. 전하. 장난이었다니 천만다행입니다. 하지만 둘째에게는 그런 장난 치지 마십시오. 놀라 경기 들까 두렵습니다."
두 달 전, 연은 딸딸이 아빠가 되었다.
첫째 명화에 이어 둘째 명선까지 연이어 딸이 태어났지만, 연은 기쁘기만 했다.
수시로 둘째 딸을 보러 온 연은 첫째 명화와 장난치면서 명선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기에 태자비의 걱정은 가라앉지 않았다.
"알았소. 이제 다시는 하지 않을 터이니 너무 그러지 마시오. 그나저나 어떻소?"
"놀랐습니다. 전하."
"그것뿐이요?"
"신기한 것이 너무 많아 딴 세상 같습니다."
박람회 3일째 되는 날.
연은 또다시 박람회장을 방문했다.
첫날은 효종을 안내했고.
둘째 날은 인선왕후를 비롯한 내명부의 어른들을 모시고 왔다.
그리고 오늘은 태자비만 데리고 다시 구경 왔다.
똑같은 구경을 3번이나 계속하고 있지만, 연은 즐겁기만 했다.
이상형인 태자비와 함께 박람회장을 거니니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게 한 명만 사귀지···.'
같은 연구소에 다니던 종민이가 생각났다.
세 명의 여자를 동시에 사귀었던 종민이는 연휴가 끝나면 피골이 상접해서 나타났다.
똑같은 영화를 3번 보고, 똑같은 식당을 3번이나 가면서 지켜왔던 다중 연애.
끝내 들통 나서 모두 헤어졌다.
'아니면 문식이처럼 왕창 두던지.'
아내가 너무나 많았기에 문식이는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아내들끼리 정하도록 하고 결정한 대로 따르는 종마(種馬)가 되어 버렸다.
태자비와 즐거운 하루를 보낸 연은 황실 전용 숙소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다시 나왔다.
만날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겉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내부는 치열하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장님."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그렇지 않으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해야 할 일이지."
타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천명했지만, 세상은 그리 두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