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91화 (191/275)

191. 조선 제국 박람회(4)

8년 전.

도쿄 북서쪽에 있는 이루마 군에서 살고 있던 고마 히로시(高麗 寛)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주인선에 온 가족을 태우고 대대로 지내 온 이루마 군을 떠나 급히 남쪽으로 향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몽골족 때문이었다.

신풍이라 부르는 가미카제조차 막지 못했는지 열도로 넘어온 몽골족들은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죽이며 열도 전체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다이묘들과 무사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히로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배를 타고 다니며 상행을 했기에 정보가 빠른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열도를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절대 저 몽골 놈들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여길 떠나야 한다.'

일부 가족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한 여정.

계획 따윈 없었다.

'아버지! 조상 대대로 지내 온 고향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들아! 살아남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이리 서두르시는 겁니까?'

히로시마에 다녀온 아버지.

몽골족들이 쳐들어온다며 가산을 정리하고 고향을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고마 나가토(長門)는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악신 같은 몽골족들이 쳐들어왔다고 하지만.

'설마 이곳 예도까지 오겠어?'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을 줄이야.

아무튼 주인선을 타고 대만과 마닐라를 거쳐 대월국에 도착한 고마 일가.

21세기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고 있는 응우옌 왕조에 몸을 기탁(寄託)했다.

그 후 동남아시아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행을 하던 히로시와 나가토는 아유타야 왕국으로 삶의 터전을 다시 옮겼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지역 패권을 노린 버마.

동남아시아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스페인.

이들의 집요한 침략에 아유타야 왕은 일본인 출신 무사들을 환영했다.

그러다 보니 방이푼(日本町)이란 일본인 마을에는 수천 명이나 되는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용병대까지 있었다.

시즈오카 태생의 일개 가마꾼이었던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가 조직해 놓은 것이었다.

주인선을 얻어타고 아유타야 왕국에 도착한 나가마사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행동으로 시암의 영웅이 되었다.

히로시와 나가토 부자 또한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함께 온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뜻밖의 말을 들었다.

'화란(和蘭) 놈들이 자카르타를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데.'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작은 항구도시였던 자카르타를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철수했다.

하로시는 며칠 동안 생각 끝에 나가토를 불렀다.

'아들아! 우리도 나라를 세우자.'

'네? 아버지 무슨 말씀입니까? 나라를 세우자니? 반란이라도 일으키자는 뜻입니까?'

'그건 아니다. 너도 알겠지만, 현재 자카르타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그곳을 점령하여 우리만의 나라를 세우자.'

'그래도···.'

아유타야 왕국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지만, 불안했다.

이대로 전쟁터에 끌려다니다 보면 언제 죽을지 몰랐다.

'이리 죽나 저리 죽나 삶은 한 번뿐이다. 이왕 목숨을 걸었으니 창업(創業)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나라를 세우는 행위인 창업을 하자는 말에 나가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버지를 따라 상행에 나섰고.

아버지를 따라 수도 없이 전쟁에 참여했던 나가토 또한 꿈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욕심이 났다.

'저와 아버지가 동시에 죽는다면 우리 가문은 끝장이 납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이곳에 계십시오.'

나가토는 동남아 일대를 돌면서 산재해 있는 일본인 무사들을 규합(糾合)했다.

그 인원은 무려 3만 명이 넘었다.

지팡구 왕국에서 사신으로 온 고마 나가토.

그의 말을 듣고 난 효종은 침음을 내뱉으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려라면 돌아가라고 호통을 쳤겠지만, 고구려의 후손이라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선 듯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대의 말은 그대와 그대의 왕이 이곳 만반도 출신이란 말인가?"

어느 나라 사신이든지 반존대를 했던 효종이지만, 나가토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만반도 출신이라 밝혔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우리 고마 가문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셨던 보장왕의 아들이신 약광(若光)의 후손들입니다."

"그래? 그런데 나라를 세웠다고?"

"네, 폐하. 이곳에서 남쪽으로 일만 리 떨어진 곳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나라 이름이 지팡구라? 무슨 뜻이지?"

"원래 중원에서 부르던 '지펀구'란 말을 남역에서는 다들 '지팡구'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기 쉽게 지팡구라 했습니다."

뭔가 거창한 뜻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원나라 때,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 Zipangu라 음차해 적은 것이 그대로 정착된 거였다.

정확한 발음은 닛폰(Nippon) 혹은 니혼(Nihon)이었지만, 자국의 일을 처리하기도 바빴던 일본이 따지지 않았기에 훗날 Japan으로 확정되었던 거였다.

히로시와 나가토는 일일이 나라 이름을 알리기가 힘들었기에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이름을 창업한 나라 이름으로 쓰기로 했다.

"아무튼 잘 왔다. 자세한 것은 태자와 상의하도록 하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 * *

조선 제국 박람회 개체 소식을 알리려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던 박문식은 싱가포르 해협을 지나가다 다가오는 상선을 만났다.

'조선에서 왔습니까?'

'그렇소만.'

'우리도 예맥 사람입니다.'

'그래요?'

아무리 봐도 일본인 행색인데 예맥 사람이란 말에 박문식은 흥미가 생겼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이미 망해버린 일본인데 일본인 복장을 한 상인이 나타나 예맥 사람이라 말하니 궁금했다.

사연을 듣고 난 박문식은 그들에게 박람회 소식을 알려줬다.

'어찌 됐든 고생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고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조선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그러니 꼭 참석해서 도움을 요청하길 바랍니다.'

박문식은 방문할 나라가 아직도 많이 남았기에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대신 조선 제국 박람회 일정이 적힌 문서를 건네주었다.

또한 새로운 왕국에 관한 정보를 조서원에 보냈다.

새로운 왕국이 탄생했다는 정보를 들은 조서원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동남아 일대에 거주하던 일본인 용병들과 가족들이 모여 세운 나라라···.'

두 번의 왜란으로 국토가 유린당한 적이 있었기에 신중히 조사했지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단숨에 자카르타를 점령하고 나라를 세웠지만, 주 무기가 냉병기였다.

하지만 지속해서 감시하고 있었다.

은진이가 정리해 놓은 보고서를 검토한 연은 나가토를 만났다.

지팡구 왕국의 세자이자 사신으로 온 나가토는 여느 일본인들과 달랐다.

"기골이 장대한 걸 보니 고구려의 후손이 틀림없구나."

"그리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전하."

"고맙기는, 그런데 박문식을 만났다고?"

"네, 전하. 그분이 아니었으면 대조선을 방문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겁니다."

"성 때문이겠지?"

일본어로 '고마'라 부르지만, 고마는 고려(高麗)와 한자가 같았다.

그래서 고려를 무너트리고 왕조를 세운 조선이기에 히로시와 나가토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성이라···. 하지만 전하께서 원하시면 바꾸겠습니다."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 예맥족이 아니더냐."

"그리 봐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생김새도 다르고 말과 풍습도 다른 서역 사람도 조선말만 할 줄 알면 조선인 취급을 해주고 있다.

광활하다 못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한 조선의 영토를 채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군은 국경선도 지키지도 않았다.

오고 싶은 사람은 오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인력 유출이 심해지자 주변국들은 국경을 지키면서 자국민이 조선의 영토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곳을 택했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조선이 두려웠던 것이더냐?"

"그, 그건···."

"맞구나.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송구합니다. 전하."

이미 조서원의 보고서를 보았기에 연은 히로시와 나가토의 행적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조선에서 한 참 떨어진 자카르타에 왕국을 세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물어봤는데, 눈치를 보니 사실이었다.

"고려건 고구려건 이미 사라져 버린 나라다. 그러니 더는 신경 쓰지 말거라. 대신 같은 예맥족이란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나가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이마를 찍으며 감사를 표했다.

혹시라도 고려의 후손으로 잘못 알고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되려 기골이 장대하다고 칭찬까지 하지 않는가.

'아버지 말씀이 맞았구나.'

조선이 두려워 조선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나라를 세웠지만, 이제 조선을 무시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철로 만든 거대한 배를 타고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는 조선군을 피해 숨어 있을 곳이 없었다.

'인의를 숭상하는 곳이니 무턱대고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모험을 하기로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남산 자락에 있는 사신관 중에서도 좋은 곳을 배정받았고 대우도 극진했다.

"우리 조선에서는 과한 예는 예가 아니란 말이 있다. 그러니 어서 일어나거라."

"네, 전하."

얼굴 곳곳에 칼자국이 있어 험악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나가토는 무척이나 공손했기에 연은 마음에 들었다.

"그래, 자와섬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전하."

"하필이면···."

연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지구 온난화로 기후가 요동치던 21세기.

열도보다 더 빠르게 침몰해가던 곳이 바로 자와섬 아니던가.

'400년 후의 일이니···, 알아서 하겠지.'

이것 또한 그들의 운명이라 생각한 연은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살아남을 방도를 말해줬다.

"앞으로 무역을 하지 않고서는 살기 힘든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돌아가는 즉시 커피와 사탕수수를 재배하여 조선에 팔도록 하거라."

"커피란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검은 차를 말하는 것입니까?"

"알고 있구나. 원두를 줄 터이니 잘 재배해 보거라."

"고, 고맙습니다. 전하!"

아직 커피는 동남아시아에서 재배되고 있지 않았다.

1696년 네덜란드 상인들이 자와섬에 커피나무를 재배하면서 동남아시아 커피 역사가 시작된 거였다.

"참, 커피를 재배하다 보면 커피 열매를 먹는 고양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내치지 말고 잘 키워 보거라."

"네?"

"고양이들이 먹고 배설한 커피콩으로 만든 커피가 맛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하오나?"

"맛만 있으면 뭐든 먹어 치우는 것이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하는구나."

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전생에 단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루왁(Luwak)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반응한 거였다.

"아무튼 같은 예맥족이 나라를 세웠다니 도움을 주고 싶구나. 그러니 커피와 사탕수수를 재배해서 전량 조선에 팔도록 하려무나."

"고맙습니다. 전하!"

다시 바닥에 엎드려 예를 표하려는 나가토를 제지한 연은 은근슬쩍 물었다.

"나라를 세웠다고 해도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며 말해 보거라."

"그, 그것이···."

차마 무기를 달라고 말하지 못한 나가토는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이슬람 세력과 서양 놈들의 견제가 심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무기를 줄까 하는데···."

"고, 고맙습니다. 전하!"

"미리 줄 터이니 앞으로 재배에 성공하면 갚도록 하거라."

"편의를 봐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전하!"

나가토는 감격했다.

꺼내기 힘든 말이라 얼버무렸는데 알아서 챙겨주다니.

'역시 같은 민족인가?'

친하게 지냈던 상인이라도 이익 앞에서는 칼을 꺼내 들었던 세상에서 살아왔던 나가토이기에 다른 판단은 할 수 없었다.

이익을 따지지 않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가문의 사람뿐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대신!"

"예?"

"남쪽에 있는 거대한 섬은 이미 조선의 영토로 확정됐다. 그러니 그곳은 절대 넘봐서는 안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연이 말한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나가토는 따르기로 했다.

감히 조선의 영토를 넘본다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창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전하! 우리 지팡구 왕국은 영원토록 대조선 제국을 따르고 섬기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우리 예맥족끼리는 서로 돕고 살아야만 한다. 그것을 절대 잊지 말도록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나가토를 만나기 전에 고민이 많았던 연이지만, 쉽게 풀어나가기로 했다.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몰라.'

일본이란 나라는 사라졌지만, 일본인은 그대로 남아있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당히 고구려의 후손이라 말하며 나라를 세운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열도 출신이었다.

그것도 사람 죽이는 짓을 밥 먹듯이 하는 사무라이들 아닌가.

고심 끝에 연은 그들을 돕기로 했다.

'도우면 친구가 되지만, 방치하면 어찌 될지 몰라.'

적일수록 더 가까이 두라는 말처럼 연은 그들과 교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후로도 연은 쉴 수가 없었다.

조선 내부 일만 처리하기도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효종을 대신해야만 했다.

각국의 사신들을 만나 요구를 들어주고 분쟁을 중재하다 보니 어느새 박람회 개최일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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