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조선 제국 박람회(2)
조선 제국 박람회에 출품할 기물들을 살펴보던 연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이것들을 다 우리 공돌이들이 개발한 것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사장님."
자신 있게 대답하는 은쌍식의 말에 연은 활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이 기물들이 풀리기 시작하면 원했던 세상이 더욱 가까워지는 게 아니겠는가.
21세기와 비교할 순 없지만, 20세기와 비교하면.
'중반은 되겠군.'
어쩌면 20세기 후반으로 봐도 될 정도로 공돌이들이 박람회를 위해 개발한 기물들은 기대 이상이었다.
"여기 옹진반도에서 일하는 우리 공돌이들 실력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공돌이들이 만든 새로운 개발품들은 참신했다.
쿼츠를 이용해 단순하게 만든 벽시계부터 시간이 되면 뻐꾸기가 나와 울거나 토끼가 방아를 찍는 벽시계도 있었다.
그중에는 연이 아파치 왕국으로 떠나기 전에 '개발 장려 항목'으로 지정하고 게시판에 적어 놓은 제품도 보였다.
"이건 비데(Bidet) 아니냐?"
"네, 비데요?"
새로운 단어가 나오자 은쌍식은 품 안에서 수첩과 연필부터 꺼내 들었다.
조선에서 가장 똑똑하고 영리하다는 은동리의 연구원들.
그들에게 목에 힘을 주고 근엄한 목소리로 새로운 단어와 뜻을 알려주며 아는 체하는 일은 은쌍식의 낙이었다.
"이 좌변기에 달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 그러지 않아도 이걸 개발한 이가 제품명으로 어떤 이름을 붙일지 몰라 아직 명칭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어릴 때 이름을 개똥이 소똥이로 부르는 조선이지만, 좌변기에 달린 것을 '똥 닦는 기계'라 말하며 팔 수는 없었다.
"그럼 앞으로 비···?"
"서역에서는 비데라 하더구나."
연은 만능키인 서역을 팔아먹었다.
지금까지 서역에 가본 적이 없던 은쌍식이라 근거 없는 연의 말이 진실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연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보는 은쌍식은 수첩에 이름을 빠르게 적었다.
"그런데 이런 게 필요 있습니까? 그냥 신문지로 닦아도 되는데."
"그러다 똥꼬 찢어진다."
"에?"
은쌍식이 놀란 반응을 보였지만, 연은 비데를 보며 씩 웃었다.
"잘 만들었구나."
표준화된 조선의 수도꼭지에 연결해 튀어나온 단추만 누르고 있으면 작동되는 비데는 간결하고 튼튼해 보였다.
'앞으로 산뜻하게 뒤처리를 할 수 있겠군.'
21세기에 다들 쓰는 고가의 전자식 비데는 사실 쓰잘머리 없었다.
온열 시트, 온수 세척, 온풍기, 자동 오픈 등등 온갖 잡다한 기능이 다 붙어 있었지만, 막상 쓰는 기능은 하나 뿐이었다.
또한 고장도 잘 났기에 공식이와 문식이는 2만 원짜리 수동식 비데를 사용했다.
수도와 직결해서 쓰는 수동식 비데는 비록 찬물만 나왔지만, 그 어떤 고가의 전자식 비데보다 세척력이 우수했다.
'온풍기로 말리는 것보다 그냥 휴지로 톡톡 닦아 쓰는 게 더 좋지.'
고가의 전자식 비데를 샀다가 고장 난 후 수리도 못 받고 버린 기억이 있기에 연은 수동식 비데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고장 날 염려도 없고, 고장 나면 그냥 버려도 돼.'
전기를 신봉하는 연이지만, 한 번 고생한 적이 있었기에 오작동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수동식 비데를 보자 반가웠다.
이미 조선에서는 도기로 만든 변기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변기들은 대부분이 쪼그려 앉는 방식이었다.
크기가 큰 좌변기는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격이 비싼 좌변기는 도시 외곽 고급주택단지나 관공서에서만 쓰고 있었다.
물론 연도 좌변기를 쓰고 있지만, 뒤처리하는데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어! 이건!""전로(電爐, Induction)라 합니다. 전기를 좀 많이 먹기는 하지만 정말 편한 기물입니다. 어디서든 전기만 공급되면 빠르게 물을 끓일 수 있습니다."
은쌍식이 자신 있게 소개하는 기물은 전기곤로였다.
모기향처럼 말려있는 전기곤로 옆에는 석영관으로 만든 전기히터도 보였다.
"오, 이것도 전기를 이용한 제품이구나."
"그렇습니다. 사장님. '전기난로'라 하는데 전로를 만든 공돌이가 만든 것입니다."
"그래? 대단한 이로구나. 누군가 보고 싶다."
"면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래. 이런 편리한 제품을 개발한 이에게는 꼭 포상해야 한다. 원한다면 상사를 차려 주도록 하거라."
출품한 제품 중에는 단순하게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선풍기 망도 있었지만, 더 나가 세로형 선풍기도 개발되어 있었다.
공돌이들이 개발한 제품은 대부분 전기를 이용한 것이었다.
곳곳에 짓고 있던 수력 발전소가 하나씩 완공되자 전력이 남아돌았다.
그래서 연이 전기용품 개발을 적극 장려하고 있었다.
열풍 조리기, 머리 전기인두, 온열기, 전기장판, 전기온수기 등등.
단순히 구리 선을 꼬아 만든 제품이지만, 전기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개발할 수 없는 제품들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만···."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만 은쌍식.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말해 보거라."
"숙수들이 가게를 차린다고 너무 많이 그만두었습니다."
조선전력공사에서 근무하는 연구원들과 공돌이들은 최상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가라고 해도 나갈 사람이 없지만, 다른 직원들은 아니었다.
퇴사를 하려고 해도 계약에 묶여있는 그들과 달리 숙수들은 특별한 계약이 없었다.
옹진반도에서 있었던 일만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항에 서명만 하면 가게나 상사를 차릴 수 있는 금전적 지원까지 하고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으냐.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라. 우리만 맛있는 걸 먹을 순 없지 않으냐. 백성들도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같은 사람이 할 일이다."
"그러긴 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숙수도 그만두고 이번 박람회에 나가겠다고 해서 좀 그렇습니다."
"오! 면식이가 드디어 상사를 차리겠다고 한 거냐?"
"네, 사장님."
숙수 중 유일하게 '식'자 돌림을 하사받은 면식이.
면 요리를 좋아하는 은쌍식이 가장 좋아하는 숙수였다.
물론 연도 좋아했다.
그랬기에 식자 돌림까지 하사한 것 아닌가.
면식이는 연이 말만 하면 뭐든 만들어 냈기에 식자 돌림 이름을 받기에 충분했다.
짜장면, 짬봉, 탕수육, 떡볶이, 오징어튀김, 쫄면, 냉면 등.
연이 맛과 모양과 형태를 설명만 하면 면식이는 서너 번 착오 끝에 뚝딱 해결해 냈다.
그러더니 드디어 라면도 개발해 냈다.
연은 은동리에서 면의 대가라 불리는 면식이에게 누구나 쉽게 끓여 먹을 수 있는 라면에 관해서 설명했다.
몇 년 동안 라면 개발에 몰두한 면식이.
기름에 튀긴 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양념이라는 걸 알아냈다.
하지만 양념을 오래 보존하면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이때 도움을 준 이들이 바로 연구원들이었다.
언제나 맛있는 면 요리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면식이가 고민하는 것을 보고 연구원들이 나섰다.
그래서 냉동 건조 스프를 개발할 수 있었다.
온도가 낮을수록 습기가 빠져나가는 현상을 이용해 수분을 빼고 말린 양념.
전투식량처럼 진공 포장을 하면 오래돼도 변하지 않았고, 맛 또한 좋았다.
가루로 된 양념이라 분념(粉念)이라 이름 지은 라면 스프가 개발되자, 연은 면식이를 불러 의견을 제시했다.
'이걸 대량 생산해서 팔아 볼 생각은 없느냐?'
'전하, 말씀을 고맙습니다. 그런데 소인같이 미천한 놈이 어떻게 사업을 하겠습니까? 소인은 전하와 연구원들에게 맛있는 것을 만들어 주는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이랬던 면식이가 연이 서역에서 오랫동안 기거하자 마음이 바뀌었다.
소양까지 가서 연에게 요리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 라면은 사장님께서 말씀해주셔서 만들 수 있었지. 좋아하시는 데 만들어 보내야겠어.'
자신에게 '식'자 돌림 이름을 하사해 준 연을 위해 라면을 대량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면식이가 결심을 하자 옹진반도 연구원들과 공돌이들이 나섰다.
라면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자동화 시설을 설계하고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줬다.
드디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라면.
'옹진탕면'이라 이름을 붙였다.
연을 위해 개발한 라면이라 연의 이름을 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세계 최초 냉동 건조 스프가 첨가된 옹진탕면은 딱 그 맛이었다.
라면을 먹어 봤다면 누구나 아는 그 맛.
감칠맛이 넘치도록 풍부한 그 맛.
다시다에 들어 있는 그 맛.
바로 글루탐산모노나트륨(Monosodium Glutamate) 맛이었다.
"앞으로 이 라면은 백성들의 간식은 물론 비상식량이 될 수도 있으니 싸게 팔도록 해라."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장님."
이리하여, 라면은 쌀, 밀과 함께 가격이 고정되었다.
어차피 면식이가 사장인 옹진라면상사는 조선전력공사에서 5할을 투자하고 나머지는 조선은행에서 대출해주었기에 폭리를 취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가게나 상사를 차려 독립한 은동리의 숙수들이 많았다.
연이 창업을 권장했기에 숙수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만의 가게나 상사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님, 굳이 이렇게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우리가 다 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조선 경제의 80% 이상을 담당하고 있지 않으냐. 계속 이렇게 한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겠느냐?"
"그, 그것이···?"
"단순히 생각해 봐도 문제가 있지 않으냐?"
연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은쌍식.
뭔가 떠오르는 듯 감탄을 내뱉었다.
"사장님께서 전에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네, 사장님. 돈은 돌아야 돈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우리가 모든 것을 하게 되면 돈이 돌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맞다. 고인물은 썩듯이 돈도 돌지 않으면 나라가 썩는다. 그리니 전략적인 것이 아니면 백성들이 만들어 팔 수 있게 공개해야 하는 거다."
"맞습니다. 사장님. 이제야 이해됐습니다. 특허 등록자에게 포상하고 특허를 공개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는데 제가 생각지 못했습니다."
21세기 특허제도는 개판이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해서 개발해도 일반인은 그 결실을 얻기가 힘들었다.
공돌이들이 개발한 기물같이 단순한 응용이라도 개발자의 노력과 참신한 아이디어가 깃들어 있는다.
하지만 그걸 자신의 것으로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연은 유럽에서 행하는 특허제도를 근본부터 완전히 다르게 바꿔 버렸다.
'개발자는 개발만 하게 하는 게 제일 좋지.'
새로운 생각으로 제품을 개발해도 돈이 없으면 특허조차 등록하기 힘들고, 사업을 하다가 망하기 일쑤인 21세기의 특허제도.
나라가 다르면 베껴서 만들어 팔아도 제재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대기업은 참신한 특허 개발품을 어떻게 해서든 헐값에 인수하려고 별짓을 다 했다.
대기업은 자체 보유하고 있는 변호사와 변리사들을 이용해 우회특허를 출원하거나, 상대의 특허가 폐지되도록 손을 썼다.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를 망하게 하고 직원들을 빼돌리는 짓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특허 분쟁은 오직 당사자들만의 일이었다.
돈을 받고 특허를 등록해주고 관리하는 특허청은 분쟁이 일어났을 때 해주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특허뿐만 아니지. 나라에서 운영하는 관청이라는 게 다들 엉망이지.'
특허의 존재 이유가 신기술이 사장되는 걸 방지하는 목적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제대로 운용되고 있지 않았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기술이 노출될까 봐 공개하지 않고 전수자에게만 전수했던 시절.
전수를 못하고 사라지는 기술을 양성화하기 위해 특허제도를 시행했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현대적인 특허제도는 1449년 영국에서 시작됐다.
헨리 6세가 왕실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돈을 받고 특허권을 남용한 거다.
때문에 1623년 영국 의회는 왕실의 특허 발행 권한을 축소하였고, 최초로 특허법이 정식으로 만들어졌다.
그 후로 특허제도는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미가 탈색되었다.
특허에 관해 알지 못하는 판검사들.
그들의 손은 돈 많은 대기업의 편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내용으로 분쟁이 생겼는지 판단할 수 없으니 분쟁자들이 고용한 변호사들의 말만 믿을 수밖에.
그러다 보니 특허를 받아놓고도 억울하게 패하거나 무효 처분을 받아 패가망신한 사람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그런 대기업도 다국적기업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특허 같지도 않은 특허로 수조 원을 청구하는 다국적기업.
대기업은 그런 다국적기업에게는 중소기업이나 개인을 상대할 때와 다르게 엄청난 돈을 주고 합의했다.
'개발자를 보호하고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특허제도가 사실은 개발자를 힘들게 하고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있지. 좋은 제품은 정당한 대가만 지급하면 누구나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아.'
더 빨리 조선이 발전하고 조선의 모든 백성이 풍요롭게 살기를 바라는 연의 마음이 담긴 조선의 특허제도.
그로 인해 조선의 특허제품들은 싼 가격에 판매될 수 있었다.
누구나 적은 비용만 지급하면 만들어 팔 수 있기에 특허제품이라고 비쌀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조선에서는 특허청에서 보상금을 주고 소유권을 관리하기에 거대 상단이 수작을 부릴 수도 없었다.
연이 개발된 전시품들을 하나하나씩 살펴보고 있는데 민삼이가 달려와 은쌍식에게 뭔가를 보고 했다.
한참을 듣고 난 은쌍식.
"사장님, 오늘 평양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응? 무슨 일 있느냐?"
"한양에서 급히 오시라는 서찰입니다."
은쌍식이 넘겨준 서신을 읽던 연은 인상을 썼다.
"이것들이 우리 조선이 국제기구인 줄 아나?"
서신은 나라 간의 분쟁에 관한 거였다.
박람회를 계기로 조선에 온 사신들이 자국과 전쟁 중인 나라를 비판하며 중재해줄 것을 조선에 요청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지팡구 왕국? 이건 또 뭐야?"
오래전에 만화에서 봤던 이름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