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조선 제국 박람회(1)
조선 제국력 1년(1659) 5월.
아파치 왕국에서 반년을 보낸 연은 급히 한양으로 돌아왔다.
태자비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은 하와이를 들렀다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역 함대가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하와이를 찾기로 했지만,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포기할 수밖에.
남역 함대 사령관인 을수의 보고를 받은 연은 바로 한양으로 가자고 말했다.
'레이다가 있다면 몰라도 이건 해운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수준이군.'
정확한 위치를 모르기에 태평양에서 하와이를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파치 왕국 서해안에 있는 아카풀코에서 출발한 지 20만에 한양에 도착한 연은 바로 태자비를 찾았다.
"미안하오. 빨리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소. 이해해달라고 말하지는 않겠소. 대신 이 말을 하고 싶소. 사랑하오."
전생에서도 연애 한번 해보지 못했지만, 딸을 둔 아빠가 되어서인지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닙니다. 전하. 나라를 위해 하시는 일인데 어찌 아녀자가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늦지 않게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만삭이 된 태자비는 연에게 잡힌 손이 부끄러운지 슬그머니 빼려고 했다.
하지만 연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더욱 꽉 주고 예쁜 태자비에게 입을 맞추려고 하는 순간.
"응애, 응애."
큰딸 명화가 배가 고픈지 울기 시작했다.
태자비가 급히 딸을 안고 젖을 먹였다.
그 모습을 본 연은 입맛을 다시며 한마디 했다.
"어허, 우리 명화는 효녀 되기는 그른 것 같소."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이리 예쁜 우리 딸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을 닮아 예쁜 건 확실하오만, 눈치가 없소. 이리 눈치가 없는 걸 보니 날 닮은 게 틀림없소."
딸에게 순위를 빼앗긴 연은 태자비의 배에 귀를 대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둘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알콩달콩 태자비와 보내는 시간은 삼 일을 넘기지 못했다.
평양에서 개최하는 '조선 제국 박람회'에 출품할 기물들을 선정해야 했기에 서둘러 은동리로 가야만 했다.
"미안하오. 자꾸 미안하단 말만 해서 정말 미안하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찌 전하께서 잘못한 것이 있단 말입니까? 전하처럼 그런 말을 하는 지아비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소. 내 늦지 않게 빨리 갔다 오겠소."
"어서 가십시오. 중요한 나랏일인데 저 때문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그 원망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연은 얼굴만큼 예쁘게 말하는 태자비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사정이기에 아쉬움을 달래며 경복궁 지하까지 연결된 기차를 타고 바로 은동리로 떠났다.
* * *
한양은 세계 곳곳에서 온 사신들로 언제나 붐볐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주변국은 물론 멀리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 온 사신들이 도착했다.
온갖 신기한 물품을 만들어 파는 조선에서 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사신과 상인들은 서둘러 출발했다.
그런데 그들은 몰랐다.
조선에서 사파비 제국 부셰르까지 정기적으로 왕복 운행하는 조선전력공사의 상선이 빠르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박람회 개최일보다 2달 반이나 빠르게 한양에 도착했다.
사신관 숙소는 한정되어 있기에 상인들은 사신과 헤어져 평양으로 향했다.
어차피 박람회가 열리는 곳이라 굳이 한양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한양에는 볼 것도 많고 야경 또한 신비롭기에 상인들은 수시로 평양에서 한양을 오가고 있었다.
"워메! 저 사람은 어쩌다가 저리됐을꼬."
한 아주머니가 기차 안에서 에티오피아에서 온 상인들을 보고 불쌍한지 혀를 찼다.
한양 저잣거리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보았지만, 저리 시커먼 사람은 처음 봤기에 오해를 했다.
그 말을 들은 통역관이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분들은 원래 그렇습니다. 일년내내 여름이라 저리된 것이라 합니다."
"그래유? 다행이구먼유. 어디 아파서 그런 줄만 알았어유.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 왔답니까유?"
"에티오피아라고 아십니까?"
"에디오···, 뭐유?"
아주머니는 처음 들어 보는 말을 따라 하려 했지만, 혀가 굴러가지 않았다.
"아주머니, 혹시 커피는 아십니까?"
"거 정신을 맑게 해준다는 시커먼 물이 커피 맞는가유?"
"네, 맞습니다. 커피 원산지가 저분들이 온 에티오피아입니다."
"그래유?"
아주머니는 아는 것이 나오자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네, 우리 조선 백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커피 원두가 바로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입니다. 이분들은 바로 그 커피를 팔기 위해 조선에 온 상인들이고요."
아프리카 대륙은 인류의 발원지이자 커피의 원산지이다.
그렇다고 아프리카 대륙 어디서나 커피를 재배할 순 없다.
아프리카에서도 에티오피아, 콩고, 라이베리아에서만 커피가 발견되었듯이 커피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온도가 가장 중요하다.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인 아라비카의 경우 18~23℃.
콩고가 원산지이고 병충해에 강한 로부스타는 24~30℃에서 잘 자란다.
온도가 극명하게 다른 곳에서 자라는 두 커피는 맛과 향이 차이가 났다.
아라비카는 부드러운 신맛이 나지만, 로부스타는 쓴맛이 난다.
하지만 일장일단이 있기에 두 종을 교배해서 '아라부스타'란 신품종이 탄생했다.
맛과 향이 뛰어난 아라비카와 생산성과 병충해에 강한 로부스타가 짬뽕 된 아라부스타가 바로 콜롬비아 커피다.
아무튼 에티오피아 상인들처럼 조선에서 물품을 팔거나 사려는 사람들로 인해 한양과 평양을 오가는 기차는 언제나 외국인들로 넘쳐났다.
"그런데 평양이 고향이십니까?"
"제 억양을 들어 보시면 아실 건데유. 평양은 탑이 완공되었다고 해서 구경 가는 거에유."
TV나 라디오에서 표준말을 듣는다고 사투리가 고쳐지는 게 아니듯이 아주머니의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아···, 평양탑 구경 가시는 거군요. 저기 보이십니까? 저분들도 평양탑을 구경하고 싶다고 나선 이집트에서 온 사신들입니다."
"아이구야! 높으신 분들이네유."
조선전력공사에서 운행하는 객차는 다양했다.
예맥대륙을 횡단하는 객차의 경우 대부분 침대칸이지만, 이처럼 짧게 운행되는 구간은 원칸, 전칸, 푼칸으로 되어 있었다.
원래 이름은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이지만, 푯값에 따라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조선 화폐는 쌀과 밀에 고정되어 있기에 물가 폭등은 없었지만, 소득이 높아지자 일등석과 이등석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그래서 표를 사지 못한 사신과 상인들은 삼등석에 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객차 폭이 넓기에 앉은 자리는 여유가 있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평양탑을 구경하기 위해 평양으로 몰려들었다.
* * *
은동리에 도착한 연은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무 아래 그늘진 곳에서 토론하던 연구원들의 말에 외래어가 너무 많이 섞여 있었던 거였다.
"민삼아, 언제부터 이렇게 외래어를 많이 쓰게 되었냐?"
전부 자신이 즐겨 쓰던 말이지만, 다른 이들이 말하기에 신기해서 물어봤다.
"저도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쌍식님 때문이었습니다."
"으응?"
"전하께서 안 계시는 동안 쌍식님께서 관리하셨는데 수첩에 적어 놓은 외래어를 자주 쓰셨다고 합니다."
"아···, 그래서였구나."
쌍식이는 연이 새로운 단어를 말할 때마다 수첩에 적어 놓고 외웠다.
조선전력공사의 이인자가 된 쌍식이지만, 노비 출신이라 그런지 연이 말한 새로운 단어를 즐겨 썼다.
그러다 보니 연구원들 또한 외래어를 자연스럽게 쓰게 된 것이다.
이와 달리 백성들은 동역에서 서역까지 교류가 활발해지자 말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연도 모르는 새로운 단어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외래어는 빵, 고무, 가방 등이 있었다.
가방은 네덜란드 말이었고, 빵은 포르투갈, 고무는 프랑스에서 넘어온 말이었다.
아무튼 은동리 본사에 도착은 연은 황당한 일을 당했다.
연을 본 은쌍식이 '사장님'을 외치며 뛰어오더니 예를 올리고 가볍게 껴안는 게 아닌가.
"이건 어디서 배웠냐?"
허그(Hug)는 '편안하게 하고 위안을 준다'는 노르웨이 Hugga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은쌍식이 허그를 하자 연이 궁금해서 물었다.
"아, 이건 서역 노르웨이에서 온 사람들이 친밀함을 표한다고 해서 따라 한 겁니다."
"그래? 노르웨이 사람들이 이곳까지 왔어?"
"네, 사장님. 그들은 타고난 뱃사람입니다. 이곳 서해안에서 고기 잡는 사람 중 절반은 그곳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거친 북해와 대서양에서 고기를 잡고 살았던 노르웨이 사람들은 작은 고기라도 비싸게 팔리는 동역으로 몰려왔다.
목재 다루는 기술이 탁월한 핀란드인들도 동역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고 난 연은 시찰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 태양전지판 공장부터 가보시겠습니까?"
"아니다. 시계 공장부터 가도록 하자. 준비는 끝났겠지?"
"네, 사장님. 지금 생산 중입니다."
"잘 됐구나. 보고 싶으니 빨리 가보자."
연이 없는 사이에 '수정진동자'가 개발됐다.
쿼츠(Quartz)로 알려진 수정은 조각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전기를 가하면 고정된 진동수가 나온다.
연구원들은 연이 알려준 대로 수정 조각을 잘라 32.768Hz의 일정한 진동수가 나오는 수정진동자를 만들어 냈다.
게다가 규산 나트륨을 산성화하여 인공석영까지 제조해 냈다.
또한 전자시계의 표시장치로 쓸 액정까지 개발해 냈다.
1888년 오스트리아 식물학자 프리드리히 리차드 라이니처가 식물의 콜레스테롤 성분을 분석하다가 발견한 이 물질은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상온에서는 투명한 액체지만, 145도로 가열하면 불투명해지고, 179도가 넘어가면 다시 투명한 액체가 된다.
그래서 액체 결정(Liquid Crystal)이라 부르는데 표시장치가 전구밖에 없는 세상에서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연이 시계 공장부터 가자고 한 이유도 전자시계 때문이 아니었다.
전자시계에 표시되는 액정 부분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연이 4개 제국과 전쟁으로 서역으로 떠나기 전부터 개발하고 있던 액정은 반응이 느렸지만, 시계로 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배터리는 얼마나 가지?"
"실험 결과 10개월에서 14개월 정도 갔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구나. 생산원가는 얼마나 되느냐?"
"인건비만 따졌을 때 약 5전 정도 합니다."
"그래? 잘 됐구나. 아주 잘 됐어."
이번 박람회 때 대표 상품으로 내놓아도 엄청난 인기를 끌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원가였다.
전기세와 원자잿값을 더한다 해도 10전이 넘지 않기에 50전에 팔며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저건 뭐냐?"
연은 영롱한 빛을 발하는 커다란 보라색 수정으로 된 시계를 보고 눈이 확 커졌다.
"아, 저것 말입니까? 저건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인공수정에 열을 가하여 만든 자수정입니다."
"오···! 장하다! 장해! 정말 장하구나!"
연의 입에서 '장하다'는 말이 나오자 자수정을 개발한 연구원은 숨이 막히는지 꺽꺽거렸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은동리에 있는 연구원들과 옹진반도의 공돌이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닌가.
"네가 개발했느냐?"
숨이 넘어갈 정도로 흥분한 연구원은 연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누가 시원한 물 좀 가져오너라."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난 연구원은 연신 연에게 사죄를 했다.
"아니다. 정말 장하다. 네가 수정진동자에 이어 자수정까지 개발했다니 정말 장하구나. 내 너를 정식이라 부르겠다."
"고, 고맙습니다. 전하!"
이연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은동리 연구소에 취직한 정진갑은 이제 정정식이가 되었다.
연은 수정진동자와 자수정을 개발했기에 수식이 또는 자식이란 이름을 하사 하려 했지만, 어감이 좋지 않아 정식으로 했다.
쟁쟁한 식자 돌림 연구원들 사이에서 배우고 익히며 자신 또한 식자 이름을 하사받겠다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큰소리를 쳤단 정진갑.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이처럼 기쁜 날, 잔치를 벌여야 하는데 박람회 이후로 미뤄야겠다. 괜찮겠느냐?"
"넵! 사장님!"
정식이는 당당하게 연을 사장님이라 불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연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는 정식이는 당당해 졌다.
바로 옆에서 얼굴을 보고, 마주 보고 대화를 하고, 식자 돌림 이름까지 얻어서 그런지 정식이의 입은 찢어질 듯이 귀에 걸렸다.
다음으로 연이 방문한 곳은 엔진 개발 연구소였다.
내연 기관을 건너뛰고 바로 전기자동차로 넘어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평안도 룡연에서 희토류인 네오디뮴을 얻을 수 있었기에 강력한 영구자석 모터를 개발할 수 있었지만, 배터리가 문제였다.
연이 도착하자 엔진 개발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별처럼 생긴 방사형 성형(Radial) 엔진을 가동했다.
-푸드드듯! 부우웅!
간단할수록 고장이 적기에 전면부를 들어낸 성형 엔진은 바람만으로 엔진의 열을 식힐 수 있는 공랭식 엔진이었다.
"잘 돌아가는구나. 부착 해서 실험해 봤느냐?"
"네, 사장님. 지금까지 큰 고장은 없었습니다."
스테펜 볼저가 개발한 성형 엔진은 자동차 엔진과 다르게 5, 7, 9기통으로 되어 있다.
360도 모든 방향에서 피스톤이 움직이기에 짝수로 기통을 제작하면 서로 엉켜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걸 사점이라 말하는데 사점 발생을 막기 위해 모든 성형 엔진은 홀수 기통으로 되어 있다.
또한 9기통보다 많으면 서로 간섭되어 각이 나오지 않기에 만들지 않는다.
"그럼, 바로 시연을 보여 줄 수 있느냐?"
"이미 준비해 놓았습니다. 사장님."
연은 연구원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날개가 위아래로 달린 복엽기(複葉機, Biplane)가 준비돼 있었다.
"멋지구나!"
대충 구조와 모양을 그려주긴 했는데, 그것보다 훨씬 멋들어지게 만든 복엽기가 당당하게 활주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헐렁한 옷차림으로 낙하산을 맨 조종사가 연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멸! 시험비행사 김창공! 전하를 뵙습니다!"
운 좋게 조선군 병사에서 조선전력공사 대원이 된 창공이는 또다시 운 좋게 시험비행사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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