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일식이가 간다(3)
어릴 때부터 아버지인 제로니모를 따라 전장에서 살다시피 한 일식이다.
공식이와 달리 삼국지 대체역사 소설도 좋아했던 문식이는 큰아들인 일식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그중 하나가 화공이었다.
'불보다 무서운 건 물이다. 하지만 물을 이용하는 법은 쉽지 않고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문식이는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薩水大捷)과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예로 들었다.
유난히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던 일식이기에 몇 번이고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런데 이곳은 열대 우림 아닌가.
'기름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순간 일식이의 눈에 말라비틀어진 사탕수수 농장이 보였다.
'저거 한번 태워 봐라.'
잘 탔다.
정말 잘 탔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사탕수수로 기름도 짜내고 바이오디젤 연료도 생산하는데.
긴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질끈 묶은 일식이의 야무진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일식이가 이끌고 온 전사들은 3천 명이 넘었다.
그랬기에 그냥 쳐들어가도 되지만, 그러지 않았다.
원주민과 흑인 노예들을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일식이는 치밀하게 작전을 짰다.
'앞으로 우리 아파치 왕국의 백성이 될 이들이다. 그러니 그들을 모두 살릴 방법을 생각해 봐라.'
일식이의 참모로 있던 전사들 또한 제로니모에게 직접 군사교육을 받았기에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사령관님, 다른 건 몰라도 대포가 문제입니다.'
'아닙니다. 사령관님. 대포는 전부 바다를 향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함선부터 파괴해야 합니다.'
'함선을 파괴하려 해도 지키는 병력이 너무 많습니다.'
'그건 유인하면 됩니다.'
'그 전에 노예로 있는 원주민과 흑인들을 빼내야 합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그것으로 병사들을 유인한 후에 함선을 불태우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행된 작전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성공했다.
별다른 위협 세력이 없는 곳이다 보니 성벽조차 없던 리우데자네이루의 경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아파치 전사들은 노예들을 잡기 위해 포르투갈의 병력이 빠져나오자 밀림으로 그들을 유인했다.
고작 500명밖에 안 되는 포르투갈 병사들은 노예들을 잡아 괴롭힐 생각에 비열한 웃음을 머금으며 겁도 없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밀림 속으로 들어온 그들은 적이 누군지도 모른 채 하나씩 사라져버렸다.
자연과 동화돼 살아왔던 아파치 전사들은 밀림에서도 그 능력이 대단했다.
일부러 흔적을 남겨 유인하고, 덫으로 놈들을 죽이고,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공포를 조성했다.
또한 카누에 바싹 마른 사탕수수 줄기를 엮은 다발을 싣고 놈들의 함선으로 이동했다.
아파치 전사들이 카누를 이끌고 함선에 접근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사탕수수 더미가 물 위에 떠다니는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일식이는 놈들의 함선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는 보고를 받고 다음 작전을 시작했다.
'너희들은 어둠을 이용해 이것들을 마을 주변에 쌓아 놓도록 하라.'
바짝 마른 사탕수수 줄기 더미는 넘쳐나도록 많았다.
그것으로 마을을 포위하고 날이 밝자마자 불을 붙였다.
잘 탔다.
활활 너무나 잘 타올랐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희뿌연 연기로 가득 찼다.
일식이가 선두로 나서자 아파치 전사들이 특위의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뒤를 따랐다.
이대로 돌진하여 마을로 진입해도 되지만, 아파치 전사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마을 외곽을 말을 타고 빠르게 돌면서 야자를 짜서 얻은 기름으로 가득 채워진 야자열매를 마을 안으로 집어 던졌다.
"이야호!"
"오로롤롤로!"
괴상한 소리와 함께 마을 전체가 불과 함께 연기로 뒤덮이자 불길을 잡기 위해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섰다.
그 순간 항구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적이다!"
카누를 타고 온 아파치 전사들은 날렵하게 대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슁! 슁!
쇠뇌에서 발사된 손바닥만 한 화살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의 몸 곳곳에 박혔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특공 대원들처럼 손가락으로 신호를 주고받던 아파치 전사들의 활약은 기가 막혔다.
대포를 발사하기 위해 뚫어 놓은 점화 심지 구멍에 쇠뇌에 쓰던 화살을 박아 사용을 못 하게 한 후, 마을 안으로 진입하면서 무기를 들고 있는 자들을 가차 없이 쓰러트렸다.
-쉬우웅!
항구 쪽에서 소리가 나는 화살이 연달아 치솟자 일식이가 말 옆구리에 걸려 있던 창을 번쩍 들었다.
마을 외곽을 돌며 화공과 괴상한 소리로 공포를 조성하던 아파치 전사들이 일식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위대한 아파치 전사들은 나를 따르라!"
"""우와···!"""
괴상한 소리와 함성을 지르던 전사들이 일식이의 뒤를 따라 마을로 진입했다.
치열한 접전을 예상했지만, 적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루이스가 데리고 온 콩키스타도르들은 판금 갑옷조차 입지 않고 불길을 잡기 위해 물통을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말을 탄 아파치 전사들이 마을로 진입하자 이를 본 콩키스타도르들이 대응하려 했지만, 허수아비와 다르지 않았다.
* * *
연의 명을 받은 병수는 간간이 해적선이 보였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고 리우데자네이루로 이동했다.
급한 명령이라 최적의 항해 속도인 시속 30km 넘겨 빠르게 이동했다.
그 결과 예상보다 빠른 10일 만에 리우데자네이루가 있는 구아나바라만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건···!"
병수는 희뿌연 연기로 가득 찬 항구를 보고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흡사 전쟁으로 파괴된 모습 아니가.
그와 달리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던 참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역 함대 사령관이 된 병수를 바라보았다.
"사령관님, 다행입니다."
"무엇이 말이냐?"
"저건 틀림없이 아파치 왕국 군이 공격한 것 아닙니까?"
"그, 그런가?"
"네, 사령관님.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내분이 일어나 싸운 것 아니겠습니까? 어찌 됐든 우리에겐 유리한 겁니다."
"음···. 맞다. 기적을 울려라.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려야겠다."
"네, 사령관님."
-부우웅!
기적소리와 함께 만 안으로 진입한 서역 함대에서 옆구리가 열리고 상륙정이 쏟아져 나왔다.
-대원들에게 알리겠다!
-우리의 목표는 아파치 왕국 세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를 명심하고 작전에 임하도록 하라!
조104 PKP 기관총을 단 상륙정들이 프라이아 도 플라멩고(Praia do Flamengo) 해변으로 상륙하여 마을로 진입했다.
그런데 마을은 한적하기만 했다.
-사령관님, 마을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뭐라고?"
-아, 아닙니다. 마을 광장 쪽에서 함성이 들립니다.
"그래? 즉시 그곳으로 이동하라. 불필요한 접촉은 하지 말고."
-멸!
왠지 걱정이 되는 병수가 깊은 침음을 내뱉자 참모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아파치 왕국의 세자께서 대단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냐?"
"저 함성 소리를 잘 들어 보십시오."
병수는 함교에서 나와 귀를 기울였다.
따라 나온 참모가 손가락으로 자기 귀를 가리켰다.
"제 귀가 특이한 걸 아시잖습니까? 저 함성에 '일식'이라는 말이 자주 섞여 들립니다. 일식은 아파치 왕국 세자의 존함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제가 예상하기로는 저 말이 자주 들리는 걸 보니 이미 이곳은 세자께서 점령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
"네, 사령관님. 내기 하셔도 좋습니다."
"좋아! 내가 저녁을 사는 게 아무래도 좋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참모는 푸짐하고 맛있는 공짜 저녁이 생각나는지 입맛을 다셨다.
조선전력공사 경비대 대원들뿐만 아니라 조선 백성들은 내기를 좋아했다.
의견이 다른 둘 사이에 언쟁하는 것보다 내기하는 것이 다툼을 줄이고 보상까지 챙길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큰돈을 내기에 걸지 않았다.
언쟁을 피하기 위한 내기로 더 큰 다툼이 생길 수 있기에 내기는 저녁 식사값이 최대였다.
누군가 함교 문을 열고 병수를 불렀다.
"사령관님, 대원들이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연과 같은 말투로 반응을 보인 병수는 무전으로 급히 쏟아 내는 대원의 보고를 받고 마을로 진입했다.
아파치 전사들과 함께 원주민과 흑인 노예들에게 둘러싸인 일식이가 마을 광장에 마련된 단상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파치 왕국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따라서 노예란 있을 수 없다!"
"""와···!"""
"너희들 중에 원하는 자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그러니 안심하고 우리를 따르라!"
"""우와···!"""
"혹시라도 괴롭히는 놈이 다시 나타난다면 나에게 말하라! 나! 문일식! 아파치 왕국의 전사이자 사령관이다! 나에게 말만 하면!"
일식이는 창을 움켜쥔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나! 일식이가 간다!"
"""우와아···!"""
훗날 이 연설은 미화되고 미화되어 아름답게 포장된다.
신의 뜻에 따라 스스로 왕이 된 아파치 왕국의 왕인 제로니모의 장자 일식이가 노예를 해방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로 승화되어 버린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은 노예로 고통받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문장이 된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아프리카와 중남미 대륙 곳곳에는 일식이의 동상이 세워지고 그가 행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가장 첫 줄에 쓰인 문장은 '일식이가 간다!'였다.
'일식이가 가는 길에 노예란 없다'란 문장은 아이들의 놀이에도 등장했다.
긴 막대를 창 대신 들고 빗자루를 말 대신 탄 아이들은 '내가 일식이다!' 외치며 병정 놀이를 했다.
* * *
일식이가 무사하고 리우데자네이루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문식이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한 아들님을 두셔서 좋겠습니다. 폐하."
"말은 고맙지만, 그대의 아버지만 하겠소? 아들 잘 둔덕에 세상을 다 가지지 않았소."
"그래봐야 하나뿐입니다. 폐하의 아들은···?"
"크흠···."
너무 많은 자식이 있기에 숫자로 이름을 붙인 문식이는 연의 말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하면 '난봉꾼'이라 놀려대는 공식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꼬면 그대도 하지 그러오."
"싫습니다. 폐하. 저는 하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어디 그런가 봅시다."
"내기하시는 겁니까?"
"좋소! 조선 제국 받고 아파치 왕국 걸면 손해는 아니니."
"그럼 딜은 성사된 겁니다. 폐···하!"
둘은 일식이가 살아있다는 말에 안도가 되는지 오랜만에 쓰잘머리 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 * *
일식이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문식이와 공식이가 아파치 왕국 수도인 서울로 이동하는 사이.
일식이는 사로잡은 루이스를 마을 광장에 세웠다.
"이놈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어찌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죽인단 말이냐! 그러니 이 악마 놈이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않기를 바라며 형을 집행하겠다!"
"""우와···!"""
루이스는 길길이 날뛰며 항변했지만, 돌아오는 건 고통이었다.
오래전에 버린 아파치족의 풍습이 되살아났다.
그것도 덤이 붙어서.
아파치 전사들은 루이스의 입을 꿰맨 다음 얼굴 가죽을 벗기고 코와 귀를 베고 마지막은 불로 태워버렸다.
제로니모가 '살아있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고 했기에 사라졌던 풍습이 루이스에게 다시 재현되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루이스는 원주민과 흑인 노예들의 울분에 찬 함성과 함께 불에 타 사라져 버렸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총독 프란시스코 또한 같은 형을 당했다.
포로로 잡힌 콩키스타도르와 포르투갈 병사들 중에서도 죄질이 명확한 놈들도 똑같이 처형당했다.
타다 남은 그들의 뼈는 구아나바라만 입구 팡지아수카르산 정상에 모아 놓았다.
거대한 바위산 위에 검은 돌에 붉은 글씨로 죄를 기록해 남겨 둔 이곳은 훗날 일식이가 행한 노예 해방 순례길 중에서 제일가는 명소가 된다.
* * *
문식이를 따라 서울로 이동하는 연은 선선한 날씨에 마음까지 상쾌해졌다.
"왜 사람들이 이 높은 곳에 도시를 만들었는지 알겠군."
일화시가 된 멕시코시티는 사람이 살기에 아주 쾌적하고 좋았다.
같은 북반구지만, 겨울인데도 온화하고 산뜻한 날씨는 폭염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 주었다.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은 다 이유가 있지. 나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 이 높은 고원에서 왜 사람들이 몰려 살았을까 궁금했었어."
"다 알고 있는 것 아니었어?"
"내가 역사를 알지 기후를 아는 건 아니잖아?"
"그랬나? 난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지."
피식피식 웃는 공식이를 보고 문식이는 정색하며 물었다.
"농담 그만하고 이곳에 온 진짜 이유가 뭐야? 도대체 뭘 구하려고 하는 거야?"
"말했잖아. 태양전지판 때문이라고?"
"으응? 그게 무슨 말이야? 전에 배터리 어쩌고저쩌고하지 않았어?"
역사는 잘 알지만, 과학과는 거리가 먼 문식이라 공식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공식이가 한 말은 언제나 어쩌고저쩌고였다.
"알았어! 간단히 설명할게. 세계에서 구리가 제일 많은 곳이 어디야?"
"그걸 내가 어찌 아냐?"
이동하는 동안 계속 놀려먹어서 그런지 문식이가 발끈했다.
"그래, 미안하다. 암튼 세상에서 구리가 제일 많은 곳이 칠레야."
"그래? 그런데 태양전지판과 구리가 뭔 상관이야?"
"상관이 있지. 그것도 아주 많이. 생각해봐. 전기를 이용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뭐지? 바로 구리야. 그런데 구리만 있으면 태양 빛으로 전기를 얻어 낼 수 있어."
"정말?"
"그럼! 너희가 가지고 있는 기술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어. 그냥 구리판만 불에 태워 산화시키면 되거든."
"그래?"
연은 문식이에게 구리로 태양전지판을 만드는 방법을 간략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