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85화 (185/275)

185. 일식이가 간다(2) - 지도

1494년 6월 6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서로 전쟁할 것처럼 보이자 중재에 나섰다.

이때 맺은 조약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다.

신대륙을 인도로 착각하고 침략과 학살, 약탈과 강간을 자행하던 두 나라.

아프리카 세네갈 다카르 서쪽 바다 앞에 있는 카보베르데 군도와 카리브해 북쪽 히스파니올라섬 사이에 있는 대서양 한복판을 남북으로 갈라 사이좋게 나눠 가진다.

서쪽은 스페인의 영토로.

동쪽은 포르투갈의 영토로.

그랬기에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중동, 동남아시아에서 부를 쌓았다.

그런데.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와 달리 신대륙에는 석기시대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살면서 금은보화가 넘쳐났다.

이를 두고만 불 수 없었던 포르투갈이 잔머리를 굴렸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르면 이곳은 서경 43도 37분 동쪽입니다. 그러니 우리 포르투갈이 점령해도 되는 곳입니다.'

1500년 포르투갈의 항해사 카브랄이 발견한 브라질은 이런 이유로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됐다.

하지만 남미 대륙 서쪽과 달리 동쪽 브라질 부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울창한 열대 우림만 존재했다.

실망한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포기하고 인도에 집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브라질로 넘어가 식민지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세파르드 유대인들로서 종교 탄압을 피해 브라질로 건너갔다.

플랜테이션(Plantation) 농장을 짓고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에서 사 온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며 농장주로 잘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포르투갈의 왕 주앙 3세가 전장에서 24세의 나이로 죽어버렸다.

자식도 없이 죽은 주앙 3세의 뒤를 이어 그의 손자인 세바스티앙이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그 또한 2년 만에 죽었다.

가톨릭의 신봉자이자 야심가인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펠리페 2세는 동군연합을 이끌고 포르투갈을 침공해 냉큼 삼켜버렸다.

주앙 3세의 동생과 조카가 왕위를 원했지만, 펠리페 2세는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포르투갈의 왕족인 것을 내세워 스페인으로 합병해 버렸다.

대서양을 동서로 갈라 지구를 나눠 가졌던 두 나라가 하나로 되어 버린 거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가 브라질 북쪽을 노리고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이 차지한 남미 대륙 북쪽 지역은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 엉터리 땅이었다.

열대 우림을 베어내고 농지를 만들었지만, 엄청난 강우량 때문에 밀림 속에 숨어 있던 땅이라 단단하지 않아 다 쓸려 내려가 버렸다.

또한 잉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가 차지한 가이아나, 수리남, 기아나는 산화철이 많이 포함된 라테라이트라는 붉은 땅이라 토양이 좋지 않았다.

괜히 농지를 만든다고 베어낸 열대 우림 때문에 비만 오면 홍수가 나기 일쑤였다.

아무튼 리우데자네이루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지정한 경계선에 있었다.

1640년 스페인으로부터 다시 독립한 포르투갈은 남미 대륙 남쪽으로 내려가 리우데자네이루를 중심으로 세를 키웠다.

스페인과 다르게 금은보화를 얻을 수 없었던 포르투갈은 플랜테이션 농사를 짓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사 왔다.

인구가 2백만 명도 되지 않은 포르투갈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라고 미개한 것만 아니었고, 사는 사람 수도 많았기에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서 원주민 노예들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일식이는 발치에서 벌벌 떨고 있는 흑인 노예를 보며 물었다.

"저곳에 너와 같은 검은 사람 말고 우리와 같은 사람도 많다는 말이지?"

"네, 네. 그렇습니다. 나리."

"또한 최근에 이곳에 무장한 놈들이 왔고?"

"네, 나리."

흑인 노예를 잡아 상황을 파악한 일식이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모두 죽일 놈들 뿐인데···."

제로니모가 만들어 놓은 노예 없는 세상에서 자랐던 일식이는 사람이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게 대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다른 부족을 침략하여 정복하기보다는 무력을 보여주고 힘을 과시하며 정략결혼으로 세를 늘렸던 아파치 왕국.

합병이 성사되면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전과 달리 승자가 패자를 노예로 부리지 않은 세상.

함께 훈련하고 함께 뒹굴고 함께 적을 무찌르다 보니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그중에는 노예로 살아왔던 사람도 있었기에 노예의 참상을 들고 난 일식이는 분노를 표출했다.

'내가 있는 한, 우리 아파치 왕국에서 노예는 없다!'

젊은 치기에 내뱉은 말이지만 일식이는 그것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행이 자행되고 있다니.

"이런···, 쌍!"

분노의 침음을 내뱉은 일식이는 즉시 참모들을 불러 작전에 들어갔다.

이런 줄도 모르고 열대 밀림을 통과하여 살아남은 루이스 총독은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 총독을 만나고 있었다.

* * *

페루 부왕령의 총독인 루이스가 왔다는 말에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 수도인 살바도르에서 배를 타고 리우데자네이루로 내려온 프란시스코 바레토 드 메네세스.

야전 장교 출신으로 캄포 장군까지 진급한 그는 아투기아 백작의 뒤를 이어 브라질 총독이 되었다.

"제로니모란 자가 아파치 왕국의 왕이란 말입니까?"

전임 총독의 이름이 제로니모 데 아타이데였기에 신기했는지 프란시스코 총독이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놈의 술수에 우리 무적함대가 손도 써보지 못하고 전부 당해버렸습니다."

"음···,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죽지 않고 이곳까지 온 것이 꿈만 같습니다."

루이스 총독은 떠오르는 기억에 진저리가 나는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를 따라 열대 밀림으로 들어선 사람 중 살아남은 이는 반도 되지 않았다.

강인한 체력과 판금으로 무장한 콩키스타도르마저 갑옷을 벗어 던져버리고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다.

"괜찮겠습니까? 배야 드릴 수 있지만, 본국으로 가면···."

"이렇게 된 마당에 누가 나에게 흠을 잡겠습니까? 들어 보니 본국 사정도 좋지 않다고 하던데···."

"그건 그렇죠. 막강하다는 무적함대가 당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지금 이베리아반도는 장난이 아닙니다."

"그래요?"

"네, 여기저기서 폭동이 일어나더니 이젠 서로 왕을 자처하며 내란이 터졌습니다."

"크흠···."

루이스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스페인은 식민지에서 가져오는 금은보화로 지탱하던 나라인데, 금은보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길이 끊겼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 남은 무적함대까지 사라지자 이제는 제국이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 망가져 버렸다.

"어찌 보면 다행 아닙니까? 총독을 비난하거나 벌을 줄 이가 없으니 본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책잡힐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가장 강력했던 스페인 제국이 망해버린 통에 금은보화를 무한정 챙길 수 있는 페루 부왕령을 잃어버렸으니 한순간의 꿈처럼 허망했다.

"그래도 가져온 은괴가 있으니 다시 기반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습니다. 헌데 뱃값을 좀···."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도 써야 하는 배인데, 총독께 줘버리면 당장 노예를 데리고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양해 바랍니다."

브라질 총독인 프란시스코는 뱃값으로 무려 3배나 요구했다.

그것도 흑인 노예들을 싣고 왔던 냄새나고 더러운 배를 말이다.

"알겠습니다. 빨리 준비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떠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좀 쉬시길 바랍니다. 열대 밀림을 헤쳐 나오는 것도 힘들지만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도 체력을 많이 소모합니다."

"고맙습니다. 총독."

프란시스코가 나가자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답답함과 함께 더위가 느껴졌다.

북반구는 한참 겨울이지만, 이곳은 더운 여름이다.

그래도 리우데자네이루는 선선한 곳이지만, 며칠째 30도를 위도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빌어먹을 가져온 은괴가 반도 남지 않았구나."

밀림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못 본 체하며 악착같이 가져온 은괴 중 반을 뱃값으로 내야 한다니.

짜증이 났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풀벌레 소리만 가득한 리우데자네이루는 작은 마을이었다.

사탕수수 농장과 설탕 공장만 있는 작은 항구 도시였다.

이런 곳을 벗어나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페루 부왕령의 총독에 임명된 후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본국에서 요구한 금액만 보내면 나머지는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루이스도 전임자처럼 악착같이 원주민들을 부리며 은덩이를 캐냈던 것 아닌가.

하지만 이제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 * *

일식이와 전사들은 밀림 곳곳에 쓰러져 죽은 스페인 침략자들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밀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천여 명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이동한 흔적은 밀림을 온통 해쳐 놓았다.

그 길만 따라왔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다 해도 밀림은 무서운 곳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30여 명이나 되는 아파치 전사들을 잃어버렸다.

모두 독충과 독사, 처음 보는 거대한 뱀에게 당한 거였다.

"빨리 만들어라! 시간이 별로 없다!"

일식이는 카누를 만들고 있는 전사들 사이를 오가면서 소리쳐 외치며 격려했다.

그 사이 마을로 정찰을 나갔던 전사가 돌아왔다.

"사령관님, 생각보다 쉬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원주민과 흑인 노예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농장에 나가 해가 떨어져야 돌아옵니다. 그러니······."

한참 설명을 듣던 일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그럼 내일부터 즉시 시작하자."

"명 받듭니다. 사령관님."

다음날부터 덩치가 작고 발이 빠르며 스페인어에 능통한 전사들이 농장 주위를 맴돌았다.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아는 전사가 있다면 좋았겠지만,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비슷한 언어인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전사들로 대신했다.

그리고 3일 후.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사탕수수 농장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런데 그 누구도 불이 났다고 소리치는 사람은 없었다.

* * *

루이스에게 비싼 값을 받고 배를 팔기로 한 프란시스코 총독은 저녁을 먹고 즐겁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데 심복이 급히 달려왔다.

"뭐라고? 노예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네, 총독님. 해가 졌는데도 숙소로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버리지만도 못한 놈들이 단체로 도망이라도 갔단 말이냐?"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총독님."

"크흠···! 날이 밝거든 즉시 병사들을 보내 잡아들여라. 본보기로 몇 놈 처형하고."

"네, 총독님."

노예들을 잡으러 병사들이 모두 떠난 후.

마을은 무척이나 한적했다.

그런데 항구에서 누가 소리쳐 외쳤다.

"불이야! 불이야!"

놀라 창문을 열고 항구를 바라보는 프란시스코 총독.

그의 눈에 항구에 따닥따닥 붙어있던 배들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상황을 파악하러 나간 심복이 허겁지겁 뛰어오더니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고 입을 열었다.

"총독님, 누군가 배에 불을 지른 것 같습니다."

"뭐라고?"

"배들이 동시에 불타오르는 통에···."

"이런!"

프란시스코는 휘청거리더니 탁자를 집고 힘겹게 부들거렸다.

"누,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알아냈느냐?"

"그게 항구에서는 수상한 자들을 본 적이 없다고만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배들이···."

"그건 아직 밝혀진 게 없습니다."

"크흠···."

배야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관리 소홀에 따른 문책이 따르겠지만, 루이스에게 뱃값으로 받은 돈이 문제였다.

돌려주면 그만이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설탕과 담배, 차 따위를 팔아봐야 그만한 목돈을 만지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루이스 놈이 불운을 몰고 다닌다더니 진짜였군."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비열하게 미소 짓는 프란시스코 총독.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돈은 돌려줄 수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총독. 뱃값으로 준 돈인데 배를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돌려주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돈을 받고 배를 주지 않았습니까?"

"뭐라고요?"

"총독에게 배를 보여줬고, 배를 보고 마음에 든다며 승선까지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원주민 노예들을 찾아 병사들 대부분이 떠난 상태라 프란시스코는 루이스와 마주치기 싫었다.

하지만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들이 모두 타버렸다는 말을 듣고 루이스가 찾아왔다.

루이스가 콩키스타도르들을 이끌고 왔기에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

"총독, 진정하시고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듣기 싫소. 당장 배를 내놓든지 아니면 돈을 돌려주시오."

생각보다 루이스가 강하게 나오자 프란시스코는 말을 돌려 물었다.

"배를 원하는 거요? 돈을 원하는 거요?"

"당연한 말을 묻는 이유가 뭐요?"

"배를 급히 보내 달라고 살바도르로 사람을 보냈소.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그렇다면 내 좀 더 기다리겠소. 하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뱃값을 돌려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셔서 쉬고 계십시오."

어찌어찌 루이스를 달랜 프란시스코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

살바도르에 있는 배를 루이스에게 넘겨주고 불에 타버렸다고 보고 할 생각이었다.

힘으로 찍어 눌러도 되지만, 당장 대응할 병력이 없었기에 잔머리를 굴린 거였다.

"그나저나 이놈들은 어디까지 간 거야? 돌아올 생각을 안 하네."

노예들을 쫓아간 병사들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노예들이 도망을 갔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잡아들였다.

운 좋게 밀림으로 도망간 노예가 있었지만, 살아남을 리 만무하다.

그랬기에 느긋하게 기다렸는데 벌써 5일이 지났다.

'혹시, 아파치 왕국 놈들이 쫓아 온 것 아니야?'

절대 그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수상한 일이 계속 발생하자 의심이 들었다.

그때였다.

불이 났다고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멀리 언덕 위에서 불에 타오르는 마을을 지켜보던 일식이.

"용맹한 아파치 전사들아! 나를 따르라!"

쇠뇌를 들고 말 옆구리를 박찬 일식이가 선두로 나서서 언덕을 내려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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