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84화 (184/275)

184. 일식이가 간다(1)

일식시에 도착한 지 10일이 지난 오후.

바리바리 싣고 온 물품과 기물들을 하선하는 작업이 드디어 끝났다.

항구 주변을 가득 채운 물품들을 분리했다.

기물들을 조립하고 작동 실험을 마쳤다.

그러는 동안 연은 그동안 계획한 일들을 연구원들에게 분배해주고 있었다.

그때 등장한 문식이.

"바로 도로부터 깔 거요?"

"아닙니다. 폐하. 먼저 선착장부터 제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단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말했지만, 주의에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지라 둘은 서로에게 존칭을 썼다.

제로니모와 연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자주 봤던 사람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둘은 무척이나 조심했다.

둘의 관계를 물어보거나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쓸데없는 의혹을 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선착장이 좀 좁기는 하지는 괜찮은 것 같은데···, 다른 문제라도 있소?"

"네, 폐하. 이곳에서 석유를 시추하기 전에는 모두 가져와야 합니다."

"음···, 우리 백성 중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을 시키면 되지 않겠소?"

"아닙니다. 폐하. 선착장을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로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송유관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아···."

연은 제로니모에게 그동안 구상했던 내용을 하나씩 설명해 줬다.

"이곳을 매립하고 유류와 물품을 보관할 창고를 지을 생각입니다. 또한 바로 옆에 교역 장소와 철도역을 세우고 광장을 만든 다음 상가를 지었으면 합니다."

"오호! 이곳에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짓겠단 말이지요?"

"그, 그건 아닙니다. 폐하, 죄송하지만, 조선전력공사는 조선의 영토에만 짓고 있습니다."

"그럼 이곳을 조선에 넘기겠소. 그러니 분점을 세워주시오."

인구가 턱없이 부족한데 영토는 엄청나게 넓었다.

그래서인지 제로니모는 땅을 떼어 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조선 제국과 우리 아파치 왕국은 형제가 아니오."

"그렇긴 하지만···."

"왜 문제라도 있소?"

"폐하, 잠시 저와···."

연은 문식이에게 눈짓을 한 후 한적한 바닷가로 나갔다.

실실 웃으며 연을 따라나선 문식이.

그 모습을 본 공식이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나중에 우리가 너희 왕국을 삼키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에이, 설마. 그럴 일이 있으려고?"

"내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그런 일이 없겠지. 하지만 그 후로 어찌 될지 어떻게 장담해?"

"장담할 수 없으니 그렇지."

"응? 뭐라고?"

골방 대에 담배를 채워 넣은 문식이가 불을 붙이더니 길게 연기를 들이마셨다.

"생각해봐라. 너와 내가 있는 한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그거야 맞지만···."

연애 한 번 못 해본 30대 노총각 둘이 주말마다 만나 술을 마시면서 나눈 이야기는 다양했다.

'이대로 가다간 지구 전체가 불타는 거 아냐?'

'그러겠지.'

'빌어먹을 놈들. 지들이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인제 와서 환경에 나쁘다고 쓰지 말라니···. 그래놓고 지들은 엄청나게 쓰잖아.'

'뭐 어쩔 수 없지. 그 꼴 보기 싫으면 강해질 수밖에···.'

이산화탄소 배출 때문에 지구의 온난화가 가속된다면서 자국의 석탄 발전소를 늘리고 있는 강대국들.

개발도상국이나 후발국은 엉망인 전력 사정으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되려 탄소세(炭素稅, Carbon Tax)를 부과하면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내가 왕이 되면 싹 바꿔버릴 거야.'

'어떻게?'

'어떡하긴 싹 다 정복해 버리는 거지.'

술자리에서 호기롭게 외치던 문식이는 없었다.

삶에 달관한 제로니모만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조선을 따라갈 수 있을까?"

"힘들 거야."

"그래. 힘들어. 네가 있는 한 절대 바뀌지 않겠지. 그래서 생각을 해봤어. 어떤 게 좋을지···."

다시 한번 길게 연기를 내뿜는 문식이의 모습은 고뇌에 찬 왕의 모습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왕이 되었던 문식이지만, 그 과정에서 못 볼 꼴을 너무나 많이 봤다.

연과 다르게 직접 전투에도 나섰던 제로니모라 전장의 처참한 광경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렸다.

"미안한데 덕 좀 보자. 우리 왕국민이 살려면 조선의 비호를 받아야만 해. 그러니 좀 도와주라."

문식이의 말은 이랬다.

아무리 강철 대포를 만들 수 있는 아파치 왕국이라 하지만, 고립된 채 살아가다 보면 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면 언젠가는 잡아 먹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죽고 난 후에도 내가 생각하는 왕국이 되려면 힘이 있어야 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고립되어 있어."

"왜 그렇게 생각해?"

"세상은 냉정하잖아."

"그래도."

"너와 나처럼 미래에서 살다 왔다면 알겠지. 결국은 무력이 전부라는 걸."

"그건 맞지···."

21세기에도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잘살고 있는 타국을 자국의 영토라 외치며 침략하거나 침략할 의사를 뻔뻔하게 들어냈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나라들이 그런 일을 벌였으니, 힘없는 주변국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과거로 돌아가서 왕이 된다면, 이런 거지 같은 꼴을 두고 보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그랬었지···."

문식이는 왕이 되고자 했던 이유 중 한 가지를 이루었다.

덤으로 기억도 못 할 만큼 많은 아이들을 얻었지만, 지금까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너 소식을 듣게 됐어."

"그래서 전략을 바꾼 거야?"

"전략까지는 아니고···."

말을 하려다 멈춘 문식이는 연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 말이 있잖아."

"무슨 말?"

"서로 잘하는 것 하는 게 제일 좋다고."

"그랬었나?"

연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게 말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뜻으로 한 말이 있을지 몰라 슬그머니 문식이를 쳐다봤다.

"너와 내가 함께 과거로 돌아간다면 각자 잘하는 일을 하자고 했잖아."

"아···, 그거야···."

"그래서 조선과 아파치가 서로 잘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해 봤어."

"그랬어?"

"응."

"그랬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이곳에 자원은 넘쳐나잖아?"

"그렇지."

"그 자원 가져가고 대신 걱정 없이 살게 해줘."

스페인의 무분별한 침략으로 이미 망가져 버린 중미와 남미 대륙.

그 넓은 땅을 차지할 순 있지만, 지킬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내륙에 철도와 도로를 만들 때까지 네가 해안만 지켜줘. 그거면 돼."

"왜? 스페인에게 빼앗은 갤리온이 수십 척이나 되는데 직접 해도 되잖아?"

"그게···, 쉽지 않네."

스페인 포로들에게 범선 조정법을 배우고 있지만, 쉽지 않았다.

단순히 나무로 배를 만들고 돛을 달아 항해하는 선박이지만, 해류와 바람은 물론 해도를 보고 항로를 정하는 일은 한두 번 배웠다고 바로 적용할 순 없었다.

문식이의 말을 들은 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도 몇 년에 거쳐 항해 기법을 습득했지.'

조선전력공사 해경 대원들은 백령도에 드나들던 예수회의 선박을 얻어 타고 다니면서 항해술을 배웠다.

그랬기에 바다가 무서운 줄 알았고, 어떻게 하면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기초부터 배울 수 있었다.

이제는 육경만큼 규모가 커진 해경이지만, 해경 대원들은 전투보다 바다와 배에 관한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는 바다부터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배까지 알면 바다는 무섭지 않다.'

해경 사령관인 해수 만큼 바다에 대해 잘 아는 이는 없었다.

그런 해수가 강조하는 말이기에 대원들은 항해 도중에도 수시로 교육을 받고 바다에서 생존할 수 있는 훈련을 했다.

화석 연료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조선의 함선들.

동역, 남역, 서역 함대로 구분하고 재편되면서 교육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그만큼 바다는 넓고 다양했다.

흉포함을 감추고 있는 바다는 언제 그 모습을 드러낼지 알 수 없었다.

"알았다. 일단 똑똑한 애들을 뽑아 조선으로 유학을 보내. 참. 올해 조선에서 박람회 있는 거 알지?"

"응. 8월 1일부터 한 달간 한다며?"

"맞아. 그러니 그곳에 보낼 사절단도 뽑아놔."

"알았어. 준비해 놓을게."

10일 동안 함께 있으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정작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굳이 말을 꺼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둘이 전생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하고 성질 급한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라면 우리가 죽기 전에 저곳에 갈 수 있겠지?"

"왜 달에도 아파치 왕국을 세우게?"

"그건 아니고, 우리 백성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 세상이 얼마나 넓고 광활한지."

문식이가 이끄는 아파치 왕국 또한 모든 아이들에게 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조선처럼 정식으로 초등학교를 지어 놓고 교육하는 건 아니지만, 선생님으로 임명된 관리들을 마을마다 파견하여 기초적인 읽고 쓰기와 숫자, 예절 등을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토속신앙이 사라지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아파치족은 자연을 따르잖아?"

고개를 끄덕이는 연을 보며 문식이는 말을 이었다.

"자연을 따르는 건 좋은데 숭배하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래서 바꿔 보려 했는데···."

"반발이 있었구나."

"응."

아파치 전사들은 왕인 제로니모의 말에 불응하는 이들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했다.

하지만 문식이는 반대했다.

'그들 또한 우리의 백성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모두 죽여버린다면, 끝없는 전쟁만 있을 뿐이고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그냥 방치하고 있었다.

'세상이 바뀐 모습을 본다면 그들 또한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가 느렸다.

"아직도 포로들을 자신의 노예로 생각하는 백성들이 많아."

"그래?"

"응."

넓어져 가는 아파치 왕국을 보고도 문식이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끝없는 부족 간의 전쟁과 수탈로 남녀의 성비가 불균형을 이뤘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여자 때문에 서로 치고받고 싸웠을 거야. 너는 어떻게 했어?"

"음···. 그것이···."

생각해 보니 특별히 한 것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너 괴벨스 알지?"

"선동하자는 말이야?"

"맞아. 말 잘하는 이를 뽑아서 장터에서 공연하게 했어."

"그래?"

"나중에는 라디오로 대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의견을 모을 수 있었을 거야."

"그렇단 말이지?"

"응."

연은 선식이를 발굴하고 장터를 돌며 공연하게 한 일.

나중에는 라디오 방송을 이용해 선동한 일들을 모두 자세히 알려 주었다.

"와! 우리 공식이 머리 쓸 줄도 아네."

"왜 이러셔? 역사 빼고는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긴 하지. 역사야 이미 틀어져 버렸으니 몰라도 되지만···."

문식이가 말을 계속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말을 타고 급히 다가왔다.

"폐하!"

"오! 너는 일식이의 참모 아니더냐?"

"네, 폐하. 전할 말이 있어 급히 달려왔습니다."

조선보다 더 조선 같은 아파치 왕국은 역참(驛站)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쉬지 않고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고 달려 온 일식이의 참모는 라파스와 포토시에서 일어난 일들과 일식이가 그들의 뒤를 쫓아 정글로 들어간 내용을 보고 했다.

"이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 문식이.

그 모습을 본 연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왜 그리 무모한 짓을 했다더냐?"

"그게···, 놈들이 한 짓을 보고 총사령관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은 곳을 따라 들어가다니, 그러다···. 아니다. 너는 가서 쉬도록 하라. 내 결정한 후에 널 다시 부를 테니 어서 가서 쉬거라."

"명을 받듭니다. 폐하."

참모가 자리를 떠나자 상기된 표정으로 문식이가 말했다.

"좀 도와주면 안 되겠냐?"

수많은 자식이 있는 문식이지만, 첫째 아들인 일식이의 안전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 또한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쁜 딸이 있기에 문식이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도와주면 돼?"

"미리 가서 도와줘."

"흠···."

연은 즉시 자신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도 위에 자를 대고 거리를 계산해 본 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1만km 가 넘는 거리야.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해도 15일은 걸릴 것 같은데···."

"그래?"

"응. 1만km면 지구의 둘레의 1/4이나 돼."

"남미가 그렇게나 넓었어?"

아직 남미 대륙을 탐험해 보지 않았지만, 스페인 침략자들이 만들어 놓은 지도를 적당히 계산해서 이어 붙여 놓았다.

그러다 보니 지도의 모양은 무척이나 달랐다.

"그럼. 여기 에콰도르가 적도잖아. 적도는 이 지도에 표시된 것보다 훨씬 크고 넓을 거야."

에콰도르에서부터 측정했을 때 남미 대륙 동쪽 끝은 5천km가 넘었다.

보기에는 북미보다 작아 보이지만, 미국만 따져 놓고 보았을 때 남미 대륙은 미국 전체 면적보다 2배나 더 넓었다.

"지금 바로 함대를 보낸다고 해도 도착할 때쯤이면, 끝났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겠어?"

"뭐라도 좋으니 좀 도와주라."

"알았어. 진정 좀 해. 바로 함선을 보내 일식이를 데리고 올게."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문식이의 얼굴에 아른거렸다.

연은 즉시 병수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즉시 이곳으로 가서 아파치 왕국 군사령관인 일식 장군을 모시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전하."

고된 일과를 마치고 왁자지껄 떠들며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대원들.

-둥! 둥! 둥!

북소리와 함께 들리는 안내 방송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호위함 해경 대원들은 들어라!

-즉시 함으로 돌아와라!

-우리는 바로 출발할 것이다!

입안 가득 음식을 넣은 상태에서도 선착장으로 뛰어가는 대원들의 모습은 절도가 있었다.

미리 도착한 대원들의 안내로 뒤늦게 뛰어온 대원들은 빠르게 함선에 승선했고, 배는 '붕~'하는 기적 소리와 함께 항구를 벗어났다.

그 순간 일식이와 아파치 전사들은 리우데자네이루를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부터 떠오른 달은 그 모습을 밝게 비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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