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83화 (183/275)

183. 아파치 왕국(4)

만난 후 3일 동안 함께 있었던 둘이 떨어졌다.

"그대가 송시열이오?"

"네, 폐하. 폐하를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나 또한 그대를 보니 기쁘오. 괜찮다면 나와 함께 그대의 학식을 논할 수 있겠소?"

"네, 폐하. 그러지 않아도 예맥 민족을 이끌고 스스로 왕이 된 폐하의 고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사파비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파한에서 예절 담당 선생님이자 교장이었던 송시열은 연의 부름을 받고 합류했다.

마차를 타고 서맥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함부르크에 도착한 송시열은 눈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이건···, 뭐야?'

한양의 저잣거리도 이처럼 분주하진 않았다.

그런데 수상 도시라 부를 정도로 강과 호수가 널려 있는 함부르크는 어디 가나 사람들이 넘쳐났다.

게다가 강가에 정박해 있는 조선 기함 1호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컸다.

'저게 과연 조선에서 조선의 기술로 만든 철갑선이란 말인가···?'

조선전력공사에서 철갑선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보니 그 크기가 엄청났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게 맞았구나.'

지인과 함께 서원을 방문했다가 역적으로 몰린 송시열.

'이제 인생이 끝났구나' 생각했는데 살아남았다.

역적모의하는 현장에서 잡혔기에 빼도 박도 못하고 역적의 누명을 뒤집어썼지만, 효종은 그런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

대신 탄광에서 검은 돌을 캐는 중노동을 해야만 했다.

평생 흙조차 손에 묻히지 않았던 송시열이지만, 탄을 열심히 캤다.

역적질을 했는데도 살아남았기에 고마워하며 육체를 혹사하면서 마음을 비웠다.

'나 하나 죽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가문이 사라질 수도 있었지.'

연좌제를 폐지했기에 정말 다행이었다.

'윤휴가 사문난적(斯文亂賊)이 아니라 내가 바로 사문난적이었구나.'

종교가 되어버린 성리학을 반대하거나 비난 또는 공격하는 행위를 사문난적이라 한다.

하지만 사문난적의 어원은 사이비(似而非)스러운 학문으로 궤변을 늘어놓은 자들을 비난하는 용어였다.

"조선의 성리학은 잘 못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오?"

"성리학이란 본래 송나라 때 일어난 일로 새로운 것을 찾는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으로 넘어 온 성리학은 불교를 배척하면서 불교의 자리를 꿰차며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고여 버린 것이지요."

연은 함께 온 연구원들과 발전소, 유전 탐사, 도로, 철도 등 아파치 왕국 개발 계획을 다시 점검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송시열을 만난 문식이는 크게 웃었다.

"성리학의 폐단을 이렇게 간결하게 표현하다니, 역시 조선 최고의 학자십니다."

"아닙니다. 폐하. 육체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손에서 책을 놓았더니 다른 세상이 보였을 뿐입니다."

"그게 대단한 것 아니오.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

"맞습니다. 폐하. 아침에 이치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와 같은 선비의 바람은 세상의 이치를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황제께서 넓은 아량으로 미천한 저의 목숨을 부지해 주시지 않았다면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이렇게 살아남아 새로운 세상과 기물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조선 제국 황제의 은총이 있어서입니다."

송시열의 말에 문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부르는 유학은 새로운 기풍의 학문이라 해서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고려 시대 때 한반도로 넘어오면서 학파가 갈라지고, 서로의 주장이 맞다고 설치며 대척하고 싸우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끝내는 문구 하나를 들먹이며 정적을 제거하는 데 성리학을 이용했다.

한국사 선생님이었던 문식이기에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궁금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르지만, 송시열이 변했다.

제1차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서인을 대표하여 남인의 공격을 말재주로 물리쳤던 송시열은 아주 다른 사람 같았다.

"무엇이 그대를 이리 바꿔 놓았소?"

"세상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는 걸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나자 모든 게 달라 보였습니다."

"흠···, 좀 더 자세히 말해 주겠소?"

문식이의 요구에 송시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하, 폐하께서는 스스로 왕이 되셨다 들었습니다. 왜 왕이 되고자 하셨습니까?"

"단순한 이유였소."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소."

송시열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먹을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먹을 것을 늘리려고 하지 않고 남의 먹을 것을 빼앗으려고만 했으니···. 이 모든 게 한 치 앞을 못 보는 우매한 인간들의 욕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대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 아파치 왕국의 영토는 중원과 비교해도 몇 배, 아니 몇십 배 더 클지도 모르오. 이처럼 넓은 영토가 있지만,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넘쳐났지요. 그대의 말처럼 먹을 것을 생산하려 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기만 하려 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소."

"그러셨습니까? 폐하께서는 평생 학문을 연구했던 저보다 세상의 이치를 잘 알고 계십니다."

둘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 상대의 지식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부탁을 드리고 싶소."

"폐하, 어떤 부탁이신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조선의 녹을 먹고 사는 공무원이라 함부로 부탁을 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

"흠···, 그러겠지요.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일은 그대가 깨우친 세상의 이치를 이곳에서 펼쳤으면 하는 것이오. 가능하겠소?"

"그건···."

송시열은 항구 옆에 마련된 임시 누각을 바라보았다.

연이 그곳에서 연구원들과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식이의 제안을 받고 송시열은 가슴이 뛰었다.

스스로 왕이 된 제로니모에 관련된 소식을 라디오에서 듣고 난 후 얼마나 만나고 싶었던가.

조선보다 훨씬 조선 같은 아파치 왕국에 가고 싶어 얼마나 설레었던가.

하지만 주군인 효종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자유인이 되었지만, 역적모의를 한 역적이었기에 효종의 허락 없이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송시열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문식이가 미소 지으며 껄껄 웃었다.

"역시 그대는 조선의 선비로군요. 내 그대를 위해 그대의 태자에게 말해 보리다."

"고맙습니다. 폐하."

송시열의 마음을 확인한 문식이는 연에게 기별을 넣고 송시열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리마에 후속부대가 전부 도착하자 일식이는 자신을 따르는 최정예 전사들을 이끌고 루이스 총독을 추적했다.

루이스는 배를 타고 쫓아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해발 4천m가 넘는 고산지대를 통해서 도망가고 있었다.

제주도보다 10배나 더 넓은 티티카카 호수를 지나 라파스(La Paz)에 도착한 일식이는 기가 차서 입을 열 수 없었다.

"놈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였습니다. 사령관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고 바로 떠나자."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죽은 채 버려진 시체를 수시로 볼 수 있었다.

대부분 원주민의 시체였지만, 스페인 놈들의 시체도 간간이 있었다.

강행군하느라 체력이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는 원주민뿐만 아니라 스페인 노약자까지 숨통을 끊어 놓고 떠난 루이스 일행.

그들에 향한 일식이의 분노는 티티카카 호수보다 더 거대해졌다.

"단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서둘러 추적에 나선 아파치 전사들.

포토시에 도착했지만, 라파스에서 봤던 것보다 더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다.

포토시 은광은 산 전체가 은덩이었다.

그래서 정상에서 아래로 뚫고 내려가며 은덩이를 캐내고 있었다.

그런데 루이스 총독의 명을 받은 콩키스타도르가 은광 입구를 화약으로 폭발하여 은덩이를 캐고 있는 원주민 광부들을 생매장해 버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함량이 낮은 은광석을 가루로 만들어 수은이 함유된 소금물에 넣고 휘저은 다음 한 달 정도 기다리면 수은과 결합 된 은 합금을 얻을 수 있다.

이게 바로 수은 아말감 제련법(mercury amalgamation)이다.

곳곳에 파 놓은 수은 아말감 제련 작업장에는 훼손된 원주민의 시체가 가득했다.

"도대체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야!"

일식이의 주먹 쥔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루이스가 저지른 짓을 보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어차피 빼앗긴 은광이라 못 쓰게 파괴하고 갔다고 합니다."

"이···, 찢어 죽일 놈들 같으니···."

어릴 때부터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하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던 일식이.

사람 죽이는 전사가 되었지만, 무기가 없거나 저항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헤치지 않았다.

그런데 저항하지도 않고 무기조차 없는 원주민들을 학살하다니.

도저히 참지 못한 일식이는 쉬지 않고 추적에 나섰다.

"놈들을 발견하더라도 공격하지 마라."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 살려주려 하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들이 믿는 신조차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진짜 지옥이 무엇인지 보여주도록 하라."

같은 스페인인이라도 본토에서 태어난 사람과 신대륙에서 태어난 사람을 차별했던 스페인 제국.

그로 인해 크리올(Criole) 또는 크리오요(Criollo)라 부르는 신대륙 태생들은 불만이 많았다.

남미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시몬 볼리바르 또한 크리올이었다.

철저한 계급 사회였던 스페인 제국은 자국민조차 차별을 두었기에 신대륙에서 태어난 자국민에 의해 신대륙을 모두 잃고 만다.

산타크루스데라시에라(Santa Cruz de la Sierra)에 도착한 일식과 전사들.

그곳에서 거짓 꼴을 한 크리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니. 그럼, 원주민들을 죽인 자들은 누구란 말이냐?"

"그건, 모두 본토에서 온 페닌술라르(Peninsular) 놈들이 저지른 짓입니다. 결코 우리가 한 짓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그들을 죽이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소중한 재산인 노예들입니다."

절대 자기들이 한 일이 아니라고 우기는 크리올들.

강행군과 굶주림에 찌들어 있었다.

"왜 네놈들을 두고 갔지?"

"두고 간 게 아니라 저희가 따라가지 않은 겁니다."

"뭐라고?"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저희들도 많이 죽었습니다. 이대로 계속 따라가다간 모두 죽을 것 같아서···."

확인해보니 크리올들은 살기 위해 루이스 일행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강인한 체력을 가진 콩키스타도르면 몰라도 수많은 노예들을 거느리며 편하게 살았던 크리올들은 강행군을 견딜 수 없었다.

먹을 것조차 찾을 수 없었던 고산지대를 내려 온 크리올들은 서둘러 떠나는 루이스 일행을 따라가는 척하다가 발길을 돌렸다.

도저히 열대 우림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거다.

"놈이 어디로 간다고 했나?"

"리우데자네이루로 가서 배를 타고 본토로 간다고 했습니다."

놈들이 가지고 있는 지도를 빼앗아 본 일식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정보 참모가 물었다.

"계속 추적하시겠습니까? 놈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저 밀림 속으로 들어갔으니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자연에서 살아왔던 아파치 전사라지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빽빽한 정글은 두려웠다.

"창수 장군!"

"네, 사령관님."

"저놈들을 포토시로 끌고 가서 광산에 처넣도록 하시오. 나는 놈들을 쫓겠소. 시체라도 꼭 확인 해야만 속이 풀릴 것 같소."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졸지에 귀족에서 광산 노예로 전락한 크리올들.

울부짖으며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찢어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라."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 크리올들을 죽이지 않았지만, 일식이는 그들을 그냥 둘 순 없었다.

"네놈들도 네놈들이 행한 일이 겪어 보면서 그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알아야 한다. 죽더라도 네놈들이 한 것처럼 광산 안에서 죽어라."

단호한 일식이의 말에 크리올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

입을 열려고 하자 긴 창을 움켜주는 걸 봤기 때문이다.

아무튼 루이스로 인해 포르투갈의 남미 식민지였던 리우데자네이루가 위험에 처하게 됐다.

* * *

조선전력공사 대원들은 아파치 왕국민의 도움으로 10일에 걸쳐 하역(荷役)을 마쳤다.

5척의 거대한 철갑선에 싣고 온 엄청난 물량을 쌓아 둘 곳이 없어 예배당도 창고로 변했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받기만 해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지. 그래서 준비해 놓은 거야."

텅 비어버린 함선에는 아파치 왕국에서 준비해둔 특산물과 황금, 은덩이들로 채워졌다.

"그런데 하나만 묻자."

"응. 말해봐?"

"보니 황금이나 은 때문에 저들을 데리고 온 건 아닌 것 같고, 이유가 뭐냐?"

문식이는 검은 글씨로 '안전제일'이라 써진 하얀 플라스틱 모자를 쓰고 있는 광식이 일행을 가리키며 물었다.

"태양 전지판을 만들어 달라며?"

"그거 모래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것 아냐?"

전생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기에 연은 피식 웃었다.

"뭐, 그렇다 해도 해가 뜨지 않으면 어쩔 건데?"

"그, 그렇구나. 어, 어떻게 할 생각이지?"

혹시라도 대답을 잘못하면 공식이가 복잡한 이론을 들먹일까 봐 문식이는 말을 더듬었다.

수도 없이 겪었던 일이기에 문식이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되레 물었다.

괜히 아는 척하다가 내기라도 하면 언제나 지는 건 문식이였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공식이의 눈치를 보는 문식이.

"아 싫으면 마. 그딴 거 없어도 우린 잘살고 있어."

"정말? 안 해줘도 돼?"

"몰라! 임마."

말을 꺼내 놓고 토라진 문식이를 보자 연은 알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적당히 해야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일이 문식이를 놀리는 일이라 생각하는 공식이.

그동안 할 수 없었던 장난기가 발동했지만, 꾹꾹 눌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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