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81화 (181/275)

181. 아파치 왕국(2)

초조한 눈빛으로 거대한 조선 기함 1호를 바라보는 문식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새끼 뭐 하는 거야? 빨리 나오지 않고.'

접안을 마친 조선 기함 1호의 옆구리가 열렸지만, 공식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놈들은 왜 이리 다들 커?'

병수가 이끌고 온 대원들도 덩치가 컸지만, 기함에서 내려 주변을 정리하는 대원들은 더 컸다.

하얀색이 아닌 회색 제복을 입은 대원들.

마중 나온 문식이 일행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린 후, 각자 맡은 일에 열중했다.

'땅개 출신이라 그런지 군기는 잘 잡았군.'

자신과 다르게 소총수로 병역을 마친 공식이라 그런지 대원들은 하나같이 절도 있게 행동했다.

그 순간 기함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둥, 둥, 둥, 둔둥둥.

"이거 뭐야!"

문식이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수도 없이 들었던.

'별들의 전쟁' 팬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음률 아닌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기함에서 걸어 나오는 잘생긴 청년.

문식이는 그를 보자 바로 공식이임을 알 수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로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음악에 맞춰 자리를 옮겼다.

항구 근처 예배당으로 이동한 둘은 주변을 물리치고 단둘이 있었다.

훗날 베니토 후아레스 등대로 바뀐 예배당은 원래 나무로 지어졌지만, 1606, 1608, 1618년 3번의 대화재로 모두 타버렸다.

그래서 점액석으로 재건축된 예배당은 무척이나 넓고 조용했다.

"공식이?"

"문식이?"

둘은 대답 대신 상대의 이름을 부르며 껴안았다.

수십 명이 넘는 아내조차 이렇게 껴안아 본 적이 없던 문식이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서로를 밀쳐내더니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두 사람.

"살아있었구나?"

"그럼, 살아있제!"

"문식이 맞구나?"

"너는 공식이 맞고?"

둘은 기쁨의 재회를 나누기 전에 서로 안부부터 확인했다.

"인조에게 아양을 떨었다고?"

"그럼, 어쩔 수 없었지. 아들조차 죽인 양반인데."

"그거야 그렇지만, 네 성격에?"

"왜 내가 어때서?"

"글쎄?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영원히 못 볼 줄 알았던 소중한 친구를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선착장이 너무 좁지 않냐?"

"저 정도면 이 아메리카, 아니지 이젠 아파치 대륙이지. 아무튼 이곳에서 가장 큰 항구인데 작다고?"

"그럼, 내가 너 주려고 가져온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저 배를 봐봐 얼마나 큰지. 저런 배가 5척이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문식이의 눈에 분주히 움직이는 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저건?"

"너네 도로부터 깔아야겠더라. 그래서 가져왔지."

기함 반대쪽에 정박한 보급선에서 토목 장비들이 나오고 있었다.

"와! 포크레인부터 없는 게 없네. 저거 다 직접 만든 거야?"

"우리 연구원들이 만들었지."

"연구원?"

연은 옹진반도에 정착한 일부터 은동리에 연구소를 세운 일까지 모두 말해줬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할 수 있지?"

"내가 너랑 같냐? 이래 봬도 세계에서 알아주는 연구소의 연구원 아니냐."

"그렇다 해도 너무 심한데. 무슨 치트키 쓴 것 같아. 혹시···."

"상태창? 그런 건 없었다."

오랜만에 둘만 아는 말을 공식이가 꺼내자 문식이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사실 나도 해봤어."

"나도 그랬는데."

동시에 크게 웃는 둘.

다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네가 더 대단하네."

"뭐가?"

"왕이 된다고 그렇게 노래 부르더니 왕이 됐잖아."

"되고 싶어서 됐냐? 살려니 어쩔 수 없었지."

문식이는 지나온 세월이 떠오르는지 착잡한 표정을 보였다.

"힘들었나 보네."

"힘들었지."

"그래도 부인이 수십 명이라며?"

"그것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다."

"왜? 자기들끼리 싸워?"

"그 정도는 아닌데···."

차마 말을 잇지 못했지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게 적당히 하지 그랬어?"

"그게 되냐? 당장 세를 늘려야 하는데."

"흠···."

공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같이도 문식이와 같은 상황에 부닥쳤다면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없고?"

"그래도 큰딸과 아들놈이 씩씩해서···."

"밑에 애들을 확실히 잡아 놨나 보네."

"그런 건 아닌데, 큰 놈들이 알아서 일을 열심히 하니 군말 없이 잘 따라."

"다행이네."

"다행이지. 정말 다행이야."

역사를 잘 아는 문식이라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일화와 일식이가 주축이 돼서 동생들을 잘 이끌고 있었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문제가 없었다.

단지 자신에게 더 자주 와 달라는 아내들의 요구를 맞춰주기 힘들뿐.

"아예 삼천궁녀를 거느리지 그랬냐?"

"만나자마자 저주냐?"

"그게 왜 저주야? 네가 원했던 거잖아?"

"너는?"

"나도 그랬지···."

여자 친구조차 한 번도 사귀어보지 못한 둘은 주말이면 술잔을 기울이면서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리겠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호기를 부렸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선선한 해풍이 스쳐 지나가자 문식이가 벌떡 일어났다.

"공식아. 가자."

"어디를?"

"어디긴 어디야? 한잔해야지."

"좋지!"

둘은 예배당 밖 항구와 바다가 보이는 해변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화로가 놓여 있었고, 숯불이 활활 타올랐다.

"너를 위해 준비했다. 공식아."

"뭔데?"

씩 웃는 문식이가 손짓을 하자 시종들이 뭔가를 잔뜩 들고 왔다.

숯불 위에 석쇠를 올리더니 두껍고 길게 썰어 놓은 삼겹살을 올렸다.

"됐다. 너희들은 가보거라. 알아서 할 터이니."

"아닙니다. 폐하."

"됐다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저희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언제든지 손짓만 하십시오."

시종들이 멀리 떠나자 문식이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한 잔 받아 봐라."

"무슨 술이야?"

"마셔 보면 알아."

공식이는 한 모금 마셔 보더니, 인상을 썼다.

"무슨 술이 이렇게 독하냐?"

"왜? 별로야?"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당연하지. 도수가 얼마나 높은데."

"이거 뭔 술이야?"

"마시고도 모르다니···, 내가 그랬지. 넌 주당이 될 수 없다고."

"술 구분할 줄 아는 게 주당하고 뭔 상관이야?"

"주당이라면 한 모금만 마셔도 뭔 술인지 알아야지."

공식이를 보고 실실 쪼개는 문식이는 술을 따라 단숨에 넘겼다.

"카! 역시 소주는 이 맛이야."

"이게 소주라고?"

"그럼 뭐겠냐? 너 온다고 해서 최고의 장인이 비진 거야."

"소주가 이렇게 독했어?"

"생각 안 나? 내가 말했잖아 소주 자체가 알코올이라고. 희석해서 팔지 않으면 이처럼 엄청 독하지."

"도수 좀 낮추지, 그래."

"왜 별로야?"

"안동소주보다 별로야."

"그래?"

"응."

갑자기 시무룩해진 문식이.

그 모습을 본 공식이가 소리쳐 누군가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민삼아, 가서 소주 좀 가져와라."

"네, 전하."

공식이 또한 문식이에게 주려고 제일 먼저 챙긴 것이 안동소주인 가양주였다.

소주에 길들여진 두 사람이기에 소주가 제일 먼저 생각났던 거다.

"설마···?"

"너 주려고 안동소주를 궤짝째 가져왔다."

"정말? 고맙다 친구야."

문식이는 책에서 본 대로 소주를 빚었다.

하지만 희석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적당히 물을 탔다.

그런데 물을 많이 탈수록 마시기엔 좋았지만, 변질됐다.

그래서 도수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20도만 넘으면 변질되지 않는데 몰랐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주당이라며?"

"주당은 빚져 놓은 술을 맛있게 마실 뿐이야."

정색하고 변명하는 문식이의 모습을 보자 공식이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세상이 다르고 세월이 흘렀지만, 하는 짓은 같았기 때문이다.

민삼이가 안동소주를 들고 오자 기뻐하는 문식이.

서둘러 뚜껑을 따더니 병째 들고 마셨다.

"카아! 이 맛이 진짜구나!"

민삼이가 뒤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걸어갔다.

수십만 리 떨어진 지구 반대편에 조선말을 쓰는 예맥 민족이 살고 있다니 놀라웠다.

조선에서 가져온 소주를 마신 국왕이 마치 조선사람처럼 행동하기에 신기했다.

"어때? 죽이지?"

"말해 뭐하냐. 너도 한 잔 받아라."

두툼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두 사람.

밤이 깊도록 들이붓더니 끝내 쓰러졌다.

* * *

리마에 도착한 일식이는 총독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추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령관님."

"아니다. 너희들이 강인한 전사라고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지쳤을 거다. 그러니 이곳에서 후속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쉰 후 천천히 쫓아가자. 놈들이 가봐야 얼마나 가겠느냐."

"그리 전하겠습니다. 사령관님. 쉬십시오."

1551년에 지어진 산 마르코스 대학에 진을 친 일식이는 리마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만 3만 명 가까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게···, 놈들이 도망가면서 이곳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갔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래서 놀란 원주민들이 산으로 도망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죽일 놈들을 봤나!"

아파치 왕국의 왕인 아버지를 따라 남하할 때 보았던 원주민들도 작았지만, 이곳 리마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은 더 작았다.

이렇게 작고 힘없는 사람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이다니.

일식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래서 아버지가 스페인 놈들을 사람 새끼로 보면 안 된다고 했구나.'

그동안 상대했던 스페인 놈들은 판금으로 무장한 콩키스타도르였다.

포로로 잡아뒀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의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짓을 직접 겪어보니 아버지가 왜 그리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먹을 것을 풀어 주민들에게 배급하도록 해라. 보니 굶은 지 오래된 것 같구나."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사령관님."

일식이는 원주민들에게 일장 연설하려던 것을 포기했다.

너무 비참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죽일 놈들! 내 친히 뼈를 발라주마!"

일식이가 분노하며 원주민들의 복수를 맹세하는 순간.

우유니(Uyuni) 사막을 지나 포토시로 향하던 루이스는 써늘함을 느꼈다.

* * *

다음날 일출과 동시에 눈을 뜬 문식이와 공식이는 조선에서 가져온 된장으로 국을 끓여 먹었다.

"도대체 뭘 얼마나 가져 온거야?"

"많지. 아주 많아."

"뭐하러 가져왔냐? 우리도 있을 건 다 있어."

"냉장고도 가져왔는데, 없어도 돼?"

순간 얼어버린 문식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냉장고도 있어?"

"그럼! 냉장고 없이 어떻게 생화학을 연구하냐?"

"생화학도 연구해?"

"당연하지."

"우와! 공돌이가 별걸 다하네."

"내가 하는 게 아니야. 내가 키운 아이들이 하는 거지."

"네가 직접 가르쳤다는 천재 애들?"

"응. 그런데 나보다 나이가 많아."

"그러겠지. 아주 어릴 때부터 설치고 다녔으니···."

어릴 때 한 동내에 살았던 둘은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았다.

"내가 언제 설쳤다고 그래?"

"동네 애들 모아다가 부탄가스 통 폭발시킨다고 하다가 태훈이 형 머리 홀랑 태워 먹었잖아."

"그걸 아직도 기억하냐?"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다고. 그만하길 다행이었지. 큰일 날뻔했잖아.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에이, 또 그 이야기 꺼내네. 그래서 내가 보답하고자 잔뜩 싣고 왔잖아."

부탄가스 통 폭발 여파로 태훈이의 머리에 불이 붙자, 문식이는 들고 있던 콜라를 흔들어 태훈이에게 뿌렸다.

덕분에 태훈이는 머리카락만 타고 별다른 화상을 입지 않았다.

콜라에 들어있는 탄산수는 이산화탄소가 녹아 있기에 불을 억제하는 기능이 탁월하다.

"혹시 석유 시추 장비도 챙겨왔냐?"

"원유가 매장된 지역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내 그럴 줄 알았지."

공식이는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저곳에 원유가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지만, 현재 기술로는 어림도 없어."

"그럼 못 캐는 거야?"

"그건 아니지."

"그럼 뭐야? 캘 수 있다는 거야? 아니야?"

"당연히 캘 수 있지."

"정말? 해양 시추도 가능해?"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저곳에 석유가 엄청나게 있다며?"

"그림의 떡이지."

어릴 때부터 너무 어른스러웠던 연은 장난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문식이는 문식이었다.

순간 감정을 가라앉힌 문식이.

수많은 학생들을 상대하면서 키운 내공이 발휘되었다.

"싫으면 말고. 뭐, 네가 알아서 하겠지. 우린 석유 없어도 잘 먹고 잘살고 있다."

말려들지 않는 문식이를 보고 공식이는 피식 웃었다.

"멀리 가서 찾지 않아도 돼. 여기 멕시코만 근처가 다 유전지대야."

"정말?"

"그럼! 멕시코가 세계 7번째 산유국이잖아."

"와! 그랬어?"

"타바스코라 들어는 봤냐?"

"타코는 알아도 타바스코는···."

"21세기 발견된 유전지대인데 그곳만 5억 배럴이 묻혀 있데. 하지만 아직 그곳은 개발할 수 없어. 깊이가 6km가 넘거든."

"그럼 못 캐는 거잖아."

"그곳 말고도 곳곳에 넘쳐나는 게 천연가스와 석유니, 걱정하지 마. 이곳 북쪽이 전부 유전지대니."

타바스코의 유전은 깊이 묻혀 있기에 21세기에 발견됐다.

그런데 일식시 주변은 천연가스 지대였고, 북쪽은 석유 매장지대였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공식이는 석유 이야기를 제쳐놓고 다른 말을 꺼냈다.

"너 혹시 생각해 봤어?"

"뭘?"

"왜 우리가 이곳으로 넘어왔는지?"

"글쎄···?"

"이곳에 넘어오기 전날 기억나?"

"응. 횡단보도 건너다가 사고당한 거 아냐?"

"아니야. 나도 불빛이 달려들길래 네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뛰어갔거든.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불빛은 차 불빛이 아니었어."

"그래?"

공식이는 그때 상황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네가 날 살리려다 같이 넘어 온 거구나."

"그러긴 한데···."

"왜? 뭔 일 있었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또 한 명 있어."

"뭐? 진짜야? 그 사람이 누군데?"

공식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야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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