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아파치 왕국(1)
공식이가 오고 있다는 무전 연락을 받은 문식이.
만사를 제쳐놓고 일식시로 이름이 바뀐 베라크루즈로 향했다.
아파치 왕국의 용맹한 전사인 일식이의 이름과 해가 뜨는 곳 중 가장 큰 도시라 해서 일식시라 이름 지어진 베라크루즈는 그로 인해 분주했다.
그중에서도 제로니모가 제일 바빴다.
"그게 뭐냐? 보기 흉하지 않으냐? 당장 다시 만들도록 해라."
"네, 폐하."
선착장까지 나온 문식이는 못질 하나까지 다 간섭했다.
조그마한 티끌이라도 눈에 띄면 손수 떼어내기까지 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신하가 나섰다.
제로니모 왕을 말릴 수 있는 일식이가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는 이곳에 없었다.
일식이는 플로리다의 스페인 식민지를 깨부순 후, 남미로 진격하고 있었다.
"폐하, 들어가 계십시오. 도착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우리와 같은 예맥 민족인 조선의 태자가 온다는데 마냥 안에서 기다릴 수는 없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일들 하거라."
제로니모가 퍼트린 말이 조선말이라는 걸 이제 알게 된 아파치 왕국의 백성들.
그들 또한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했다.
그러다 보니 자진해서 일식시로 와 공사를 도우면서 조선에서 온다는 사절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영원히 못 볼 줄 알았던 공식이가 온다는 말에 문식이는 안절부절못했다.
혹시라도 비웃음을 살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공식이가 타고 온다는 큰 배가 접안 할 수 있도록 선착장부터 넓히고 확충했다.
일식시에서 서울시까지 가는 길도 다시 점검하고 확장했다.
길을 따라 지어진 집들도 전부 새로 지었다.
마치 개도국이 국제 경기나 회의를 준비하는 것처럼 모든 걸 예쁘게 보이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모습이 10년 전 조선과 흡사했다.
다른 게 있다면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이란 것뿐.
스페인 침략자 중에서도 귀족과 종교시설에만 썼다는 주황색 기와가 모든 집과 시설들을 아름답게 단장했다.
아파치 왕국의 터전인 멕시코 땅은 자원의 보고였다.
특히 금과 구리가 넘치도록 많았다.
갈탄과 코크스의 원료인 유연탄도 풍부했다.
노천 유전이 아니라 얻을 방법이 없을 뿐, 석유 또한 엄청난 매장량을 가지고 있었다.
'공식이가 오면 다 개발해야지.'
문식이의 지식으로는 강철을 생산해 대포와 총, 칼, 창 같은 무기를 만드는 것도 힘에 겨웠다.
그런데 공식이가 태어난 조선은 지구 반대편으로 무선 통신이 가능하다니.
놀라웠다.
'진짜 전기부터 개발해서 이리 빨랐나?'
주말이면 만나서 소주잔을 기울였던 공식이.
발전기부터 개발하고 공작기계를 도입했기에 증기기관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켰던 원역사보다 훨씬 발전했다고 말했다.
'얼마나 다를까?'
문식이는 공식이 보다 10년 먼저 일찍 태어났다.
하지만 공식이에게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세계 10대 강국 안에 들어가는 조선에서 왕손으로 태어난 공식이를 이길 수는 없겠지.'
역사를 잘 아는 문식이라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기술 수준이 높다고 행복한 건 아니니까···.'
문식이가 이끄는 아파치 왕국 백성들은 낙천적이었다.
식인 풍습이 있었던 시절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먹을 것이 풍부해지자 언제나 즐겁게 지냈다.
'이래서 스페인의 식민 통치 아래서도 번성했나 보군.'
스페인의 침략자들로부터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살았던 원주민들.
그런데도 그들은 빠르게 번성했다.
그랬기에 자신 있었다.
공식이가 있는 조선이 과학과 기술로는 앞서 있을지 모르지만, 문화로는 자신이 이끄는 아파치 왕국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파치 왕국에는 춤과 노래, 시와 그림, 조각과 세공에 재능이 있는 백성들이 많았다.
이 모든 건 문식이가 자신의 부족민이었던 아파치족에게 교육과 훈련을 시킨 덕분이었다.
역사를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던 아파치족.
음유시인이라 할 정도로 자연을 묘사하고 암시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래도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공돌이인 공식이야 예술과 거리가 멀지만, 효종은 아닌데···.'
효종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비 중에 대단한 인물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오면 물어볼 사람이 많군.'
이미 세계선이 틀어져 버렸기에 어찌 지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김육과 송시열은 꼭 만나고 싶었다.
조선은 한 겨울이지만 적도와 가까운 일식시는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한반도의 가을 날씨처럼 선선했고, 건기라 비도 거의 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설치다 보니 문식이는 출출함을 느꼈다.
"식사를 하고 올 터이니 혹시라도 연락이 오거나 배가 나타나면 즉시 기별을 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염려하지 마십시오."
문식이는 항구 근처에 마련해 놓은 자식의 거처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였다.
"폐하!"
일식이의 수하 중 한 명이 문식이에게 말을 타고 달려왔다.
"연락이 왔느냐?"
"네, 폐하. 방금 무전 연락을 받았습니다. 두 시간에서 세 시간 후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래? 알았다. 다른 연락이 있으면 바로 기별을 주거라."
"네, 폐하."
문식이는 서둘러 거처로 가 밥을 먹었다.
공식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려면 든든히 먹어둬야 했다.
* * *
본국과 연락이 끊겨버린 페루 부왕령(Virreinato del Perú).
1542년 잉카를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페루 리마에 세워졌다.
브라질과 베네수엘라를 제외한 남미의 모든 지역을 통치하는 페루 부왕령의 권위는 막강했다.
하지만 아파치 왕국에 중미와 북미 일부를 통치하고 있던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을 빼앗겼다.
게다가 본국으로 가는 항구인 베라크루즈까지 잃어버리자 고립되었다.
제17대 페루 부왕령 총독인 루이스 엔리케스 데 구즈만( Luis Enríquez de Guzmán).
9대 알바 데 리스트 백작이기도 한 그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총독이었다.
그런데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기사이자 사령관이었던 루이스는 불운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루이스가 누에바 에스파냐의 총독으로 있었을 때.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수가 줄었다.
잉글랜드의 손에 넘어간 자메이카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원주민을 학대하다 반란이 일어났고 프란체스코 선교사들이 살해당했다.
예수회가 선교 활동을 하는 마을이 불타고 약탈당했다.
그런데도 루이스는 페루의 총독으로 발령이 났다.
1655년 루이스가 페루 파이타(Paita)에 도착했을 때.
600만 페소의 황금과 은덩이를 싣고 떠난 기함이 600명의 콩키스타도르와 함께 난파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때문에 리마에 도착했을 때는 즉시 스페인으로 100만 페소를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루이스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집권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리마를 뒤흔드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학대를 견디지 못한 원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종교 재판소 장관과 법원에서도 루이스를 이단 총독이라 부르며 배척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참고 견딜 수 있었다.
'포토시 은광이 내 손에 있는 한 그 누구도 날 무시할 수 없어.'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다.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 북쪽에 사는 원주민들이 남하하면서 모든 게 틀어졌다.
'설마 지중해 무적함대가 당하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루이스는 페루 총독 임기가 끝나면 막대한 부를 챙겨 본국으로 화려하게 귀환하려 했지만,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베라크루즈 항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에서 엄청난 양의 은덩이를 캐내고 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었다.
제아무리 소중한 금은보화라 해도 페루 부왕령에서는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기에 감자나 옥수수만도 못했다.
한쪽에 쌓여 있는 은괴가 담긴 궤짝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빛은 서글펐다.
본국으로 보낼 방법이 사라져 버렸기에 한숨만 나왔다.
대서양을 건널 배 한 척조차 없는 루이스 페루 총독.
초조함에 손톱을 이빨로 물어뜯고 있는데.
"총독님! 총독님!"
루이스의 심복인 마도스가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스럽게 구느냐?"
"큰일 났습니다."
"어디 반란이라도 일어났더냐?"
"그, 그게 아니라. 아파치 왕국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뭐, 뭐라고?"
일식이가 이끄는 아파치 전사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남하했다.
5,000km나 되는 먼 거리를 쉬지 않고 진격한 일식이와 아파치 전사들을 막을 자는 없었다.
때리고 짓밟고 겁탈하고 죽이는 가운데에서도 살아남았던 원주민들은 아파치 왕국의 전사들이 나타나자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했다.
노예처럼 사는 원주민들이지만, 귀는 달려 있었다.
북쪽에서 말을 타고 나타난 전사들이 스페인의 지중해 무적함대를 박살 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흥분된 감정과 기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놈들이 우아초(Huacho)까지 왔다고는 보고입니다. 총독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빨리 이곳에서···."
"어디로 간단 말이냐?"
"일단 은광이 있는 포토시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곳에 가면 저 지겨운 놈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이냐?"
"장담할 순 없지만, 일단 포토시에서 은을 챙겨 동쪽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운이 좋다면 포르투갈 놈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배를 타고 본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크흠···."
루이스는 이마를 짚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즉시 병사들을 모아라! 포토시로 가자."
"잘 판단하셨습니다. 총독님."
아파치 왕국 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적으로도 열세에 처한 루이스와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
초원의 들개들이 사자 떼를 만난 것처럼 남쪽으로 빠르게 도주했다.
자신들보다 더 좋은 대포를 가지고 있다는 아파치 왕국 군을 상대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쌓아 두었던 은덩이는 그대로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양이기도 하지만, 포토시에 가면 은은 넘쳐났기에 목숨부터 건지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 * *
점심을 먹고 난 문식이는 선착장으로 나가 낚싯대를 던졌다.
금방 올 것 같았는데 시간을 보니 이제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뿐이다.
낚싯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문식이.
고기가 낚싯대를 끌고 사라져도 반응이 없었다.
'만나면 뭐부터 물어보지? 아니야. 물어보는 건 나중에 해도 돼.'
공식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반갑다고 얼싸안을 수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문식이의 위치가 너무 높았다.
'공식이도 나처럼 이럴까?'
스스로 왕이 된 문식이지만, 감정은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공식이는 알까?'
연인도 아닌 공식이 생각을 이렇게나 하다니.
문식이는 생각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자식들 이름과 얼굴을 다 알지 못해도 잘 살아왔는데 이게 뭐람."
기다리다 지친 문식이는 크게 기지개를 켠 후 신하에게 말했다.
"가서 시원한 수박이나 가져오너라."
"네 폐하."
* * *
칸쿤을 지나고 기함에서 하루를 더 보낸 연은 아파치 왕국에 연락하라고 했다.
깜짝 놀라게 만들고 싶었지만, 문식이가 일식시까지 와서 기다린다는 말에 미리 기별을 넣는 것이 예의라 생각했다.
'문식이 놈도 나처럼 설레일까?'
생강으로 멀미에서 벗어나자 이제는 문식이 생각뿐이었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그 누구와도 속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없이 살아왔다.
그 답답함을 풀어줄 사람이 누구겠는가.
자신의 정체를 가장 잘 아는 문식이뿐이었다.
자신을 동반자라 생각하는 효종에게도 생전 처음 연인이자 아내가 된 태자비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의 정체.
문식이라면 터놓을 필요도 없었다.
조선 기함 1호가 카리브해를 지나 멕시코만 안으로 들어서자 더는 거친 파도는 없었기에 연은 객실에서 나와 갑판 위를 거닐었다.
멀리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이가 연을 보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예를 올렸다.
"사장님을 뵙습니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이제 좀 살겠습니다. 사장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나는 생강 덕분에 괜찮다만, 너는···?"
"생강도 저에게는 듣지 않나 봅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난간으로 달려가 꽥꽥거리며 토하는 광식이의 등을 연은 가볍게 두드려줬다.
"의식이에게 말해 멀미약을 만들라고 해야겠다."
"아닙니다. 사장님. 이번에 돌아가면 절대 배를 타지 않을 생각입니다."
눈과 볼이 휑하니 푹 들어간 광식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장님이 새롭고 신기한 광물이 많은 곳으로 간다는 말에 바로 따라나선 광식이는 멀미에 쥐약이었다.
속이 쓰릴 정도로 생강 가루를 들어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광물을 찾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배를 쓰다듬으며 울렁거리는 속을 달랬다.
"조금만 참아라. 곧 다 와 간다."
"참말입니까?"
휑한 광식이의 표정이 우스운지 씩 하고 웃는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한 시간만 더 가면 된다고 하는구나."
"그렇습니까? 전 가서 좀 뉩겠습니다."
"그러려무나. 고생이 많았다. 광식아."
"아닙니다. 사장님. 제가 좋아서 따라온 건데요."
광식이가 떠난 후, 연은 바다를 바라 보았다.
청명한 하늘.
따사로운 햇살.
맑고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닷물.
어디선가 '끼룩끼룩' 소리가 났다.
"갈매기구나."
드디어 목적지인 일식시 앞바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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