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78화 (178/275)

< 178. 칼레 평화 회담(2) >

말로만 들었던 겨울철 북해는 장난이 아니었다.

북극에서 내려온 차가운 바람과 함께 쏟아지는 비는 거친 파도를 만들어 냈다.

그로 인해 흔들리는 조선 기함 1호.

150m나 되는 대형 선박이기에 안심했지만, 대양에서는 아무리 큰 배라도 소용이 없었다.

육지에서 떨어진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보니, 몸에서 느끼는 감각과 눈으로 보는 감각이 틀어져 속이 울렁거렸다.

급기야 토하기까지 한 연은 함교 옆에 붙어 있는 사령관실에서 나와 제일 아래 기관실까지 내려갔다.

폭풍우로 인한 멀미로 지친 연은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증기터빈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이거 귀미테라도 만들어 붙여야 하나?'

21세기에서도 연은 배를 타본 적이 별로 없었고, 타더라도 반나절 정도라 멀미 따위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게다가 스코폴라민이 주성분인 귀미테는 중추신경계를 억제하기에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말을 듣고 사용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베라크루즈 갈 때는 훨씬 남쪽으로 내려가 건너가라고 해야겠다.'

가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뀔 때에는 전 세계 어디나 바다가 거칠어진다.

대륙과 해양의 온도 차이로 인한 바람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도 극지방보다는 적도 부근이 낫겠지.'

1년 내내 기온변화가 거의 없는 적도 부근은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서 그런지 파도 차체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예맥 대륙 횡단 철도를 놓을 때에도 덜컹거리는 소리가 싫었다.

그래서 연은 선로 간 이음새를 전부 용접해 붙여 버리라고 했다.

처음 철도를 건설할 때는 계절에 따라 늘어나고 줄어드는 철의 특성 때문에 선로 간 간격을 두고 공사를 했다.

하지만 철의 특성인 인장력이 그 정도는 버틸 수 있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21세에 건설되는 모든 선로는 간격을 두지 않고 용접해 붙여 버린다.

그 결과 좋은 점이 있었다.

쇠가 탐나서, 아니면 조선이 싫어서 선로를 끊으려 해도 용접으로 길게 이어붙인 선로를 망가트릴 수 없었다.

물론 야생동물들이 뛰어들거나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철도를 따라 철조망을 쳐 놓았다.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의 다양한 행동 방식에 대응하기 위해 수시로 철도를 따라 예맥 기병대가 순찰했다.

아무튼 편한 기차여행만 하다가 거친 파도에 흔들리는 배를 타고 고생한 연은 '빨리 비행기를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어느 정도 진정된 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기한 듯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막고 경계하는 상륙정과 대원들.

연은 그들을 보고 손을 흔들어 준 다음 대기하고 있는 상륙정에 올라탔다.

그러는 동안 계속해서 상륙정을 타고 해변으로 들어오는 대원들.

계획한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곳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온 조선군이다.

-회담이 끝날 때까지는 우리 조선군이 이곳 칼레를 지킨다.

-따라서 칼레에서는 어떤 무기도 휴대를 허용하지 않는다.

전쟁 중이라 그 어느 쪽도 믿지 못하다 보니 결국 조선군이 칼레의 치안을 맡기로 했다.

해변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칼레 노트르담 교회에 연이 탄 상륙정이 도착했다.

마중 나와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복덩이 칼 10세가 활짝 웃으며 연을 맞이했다.

"마중 나와 줘서 고맙소. 들어갑시다."

"네, 전하."

브리튼 왕국의 왕이 된 칼 10세지만, 공손했다.

주변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은 칼 10세는 연의 시종처럼 행동했다.

13세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칼레의 노트르담 교회.

프랑스의 유명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샤를 드골이 결혼식을 올린 장소였던 만큼,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했다.

잉글랜드의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만나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튜더 양식(Style Tudor)으로 지어진 교회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칼 10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연을 보고 다양한 표정을 내비치는 사람들.

하나같이 불편해 보이는 옷을 덕지덕지 걸치고 있었다.

딱 봐도 깐깐해 보이는 남자가 묘한 미소를 품고 연에게 다가왔다.

"말로만 듣던 조선의 태자를 보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나는 프랑스의 수석 국무장관이자 추기경인 쥘 마자랭이라 합니다."

"마자랭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전하."

연은 깜짝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프랑스의 도르곤 같은 놈이 바로 저놈이군.'

루이 14세의 어머니이자 왕비였던 안 도트리슈와 불륜 관계에 있는 쥘 마자랭.

루이 14세를 섭정하면서 닥치는 대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또한 그를 싫어하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가 선종하자 대놓고 로마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조선의 태자 이연이요."

"이렇게 직접 보니 말로 들었던 것과 천지 차이입니다."

"좋다는 말이겠지요?"

"당연합니다. 훤칠한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주홍색 추기경 모자로 머리를 가린 마자랭은 화려한 언변가였다.

한참 그가 떠들던 말을 듣던 연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대의 명성은 들어서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시간을 내주시오. 그대의 고견을 듣고 싶소."

"감사합니다. 전하. 저 또한 전하를 뵙고 싶었습니다."

연은 다른 뜻이 있어 독대를 요청했지만, 곡해한 마자랭은 말부터 공손해졌다.

내전에 휩싸인 스페인이 나락으로 떨어지자, 단일 왕국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가 된 프랑스.

그런 프랑스를 쥐고 흔드는 섭정 마자랭이지만, 조선의 태자인 연이 호감을 표하자 그의 깐깐한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거대한 십자가 모양으로 지어진 노트르담 교회 안에는 각국에서 온 사절들이 모여 있었다.

일일이 소개를 받고 인사를 나눈 후, 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성질 급한 칼 10세가 서둘렀기 때문이다.

"나는 루이 14세의 제안을 찬성합니다. 허나!"

말을 하다만 칼 10세가 큰 눈망울로 자중을 한차례 훑어보더니 다시 이어 말했다.

"뒹케르크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나는 종전 협상에 임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뒹케르크는 절대 넘겨줄 수 없소. 그리니 꿈도 꾸지 마시오."

마자랭의 말에 칼 10세가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전쟁을 계속하고 싶다? 원하는 봐요. 쥘 마자랭! 그리 전쟁을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소. 즉시 돌아가시오. 내일부터 다시 공격에 들어가겠소."

"이, 잇!"

부들부들 떠는 마자랭을 보고 씩 웃는 칼 10세.

연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입을 열었다.

"전하, 죄송합니다. 이곳까지 오셨는데 협상을 더는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소?"

"네, 전하."

"음···."

연은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 봐도 칼 10세의 말에 지지를 표하는 거였다.

그러자, 마자랭이 나섰다.

"전하, 됭케르크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그곳은 절대 넘길 수 없습니다."

연은 서서히 눈을 떠 마자랭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곳을 누가 점령하고 있소?"

"그, 그건···."

"내가 알기로는 브리튼 왕국 군이 점령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하지만 전하! 그곳은 역사적으로 우리 프랑스의 영토입니다."

그때 칼 10세가 나섰다.

"흥! 역사적으로라고 했소?"

"그, 그렇소만."

"정략결혼으로 얻어낸 것도 역사란 말이요?"

"너무 말이 심하시오!"

스페인의 공주 테레사를 루이 14세와 혼인시키면서.

엄청난 액수의 지참금과 함께 스페인 카탈루냐 북부와 훗날 벨기에가 되는 플랑드르 지역을 프랑스에 넘긴 스페인을 비꼬는 칼 10세.

이에 반발하는 쥘 마자랭.

둘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영토 확장과 개신교의 확대를 원한 프랑스와 가톨릭을 신봉하는 스페인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파치 왕국 군에게 콩키스타도르를 모두 잃어버린 스페인.

펠리페 4세가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들어주지 않은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험담하며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21세기에서도 그랬지만, 종교 문제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연은 그냥 지켜 보고 있었다.

주변 왕국과 제후국에서 온 사신들은 편을 갈라 칼 10세와 마자랭을 지지했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서 언성이 높아지며 멱살을 잡는 이까지 눈에 보였다.

멀미로 고생한 후라 그런지 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번 협상이 쉽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에게 연락을 준 칼 10세는 욕심이 많았다.

'전하, 어떤 일이 있어도 뒹케르크를 얻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진전이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던 브리튼 왕국과 프랑스.

양쪽 모두 빠르게 협상을 하고 싶었지만, 서로를 믿지 못했다.

그래서 끌어들인 연이지만, 서로 싸우고 있는 지금 어느 한 쪽 편을 들어 주기 힘들었다.

그런데.

칼 10세의 욕설을 참지 못한 쥘 마자랭이 연을 보고 외쳤다.

"전하! 뒹케르크를 조선에 넘기겠습니다."

순간 정지화면처럼 멈춰버린 장내.

모두 고개만 돌려 마자랭을 쳐다봤다.

"저, 저자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조선에 주도록 하겠습니다."

차마 욕을 담지 못한 마자랭은 말을 끝내고 칼 10세를 바라보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칼 10세 또한.

"찬성입니다. 전하."

"뭐, 뭐, 뭐라고 했소?"

너무 놀라, 말까지 더듬는 마자랭.

그를 보고 씩 웃는 칼 10세.

"나도 뒹케르크를 조선에 넘기는 걸 찬성한다고 했소."

"이, 이런!"

자신이 먼저 꺼낸 말이기에 반복할 수 없는 마자랭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칼 10세는 아쉬운 것이 없었다.

이미 넘겨받기로 한 미래의 벨기에 땅이면 부족한 브리튼 왕국의 식량을 조달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뒹케르크를 프랑스에 넘길 수는 없었다.

전략적 요충지라 훗날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브리튼 섬 도버에서 가장 가까운 칼레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힘들다고 본 칼 10세.

새로 얻은 땅과 브리튼 섬을 오가는 길에 있는 뒹케르크까지 포기할 순 없었다.

그렇다 해도 조선에 넘어가는 것까지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조선은 칼 10세가 섬기는 연의 나라 아닌가.

프랑스 또한 결혼 지참금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넘겨받은 땅이기에 아쉽지 않았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협상이 연의 등장으로 빠르게 결정됐다.

조선은 생각지도 않은 뒹케르크를 얻었고, 프랑스와 브리튼 왕국은 뒹케르크를 기준으로 새로운 국경선을 정했다.

'확실히 복덩이가 맞아!'

칼 10세를 만날 때마다 얻는 게 마음에 든 연은 속으로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결렬했던 첫날과 다르게 다음 날은 순조로웠다.

3일 동안 회의 끝에 상호 간에 이해가 맞아 떨어진 회담 결과물이 나오자 모두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곳에 서명만 하시면 이번 '칼레 평화 협정'은 체결되는 겁니다. 전하."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대조선 제국이 중심에 있는데 감히 누가 토를 달겠습니까?"

"맞습니다. 전하. 그 누구라도 이번 협상에 불만을 표한다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이로써 영화로도 유명했던 뒹케르크는 조선의 영토가 되었다.

회담이 끝나고 협정이 체결되자 화려한 연회가 열렸다.

연은 연회 중에 자리를 비우고 마자랭을 따로 만났다.

"그대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소."

"말씀만 하십시오. 뭐든 알고 있는 만큼 성의껏 대답하겠습니다."

뒹케르크를 조선에 넘긴 후, 그곳에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들어서길 바라는 마자랭은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제 유럽 반도는 조선의 물품이 없다면 살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값싸고 질 좋은 옷감이며.

언제나 같은 가격인 밀.

게다가 등유라는 게 없으면 밤에 불을 밝힐 수도 없으니 유럽 반도는 조선의 경제적 속국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불리한 것만 아니었다.

조선은 판만큼 사들였다.

프랑스의 고급 와인은 생산되자마자 반 이상이 조선으로 팔려나갔다.

그러다 보니 양국의 경제는 발전해 나갔다.

유대인을 모두 쫓아내 버린 스페인은 상업과 금융업이 망해버렸지만, 기름진 옥토를 가진 프랑스는 반대급부로 이득을 봤다.

그런데 뒹케르크에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생기면 어찌 되겠는가.

상인들이 소양 또는 함부르크에서 직접 사 오기에 그동안 관여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의 영토와 맡 닿아 있는 뒹케르크라면 달랐다.

마자랭은 자신의 권력이면 그곳에서 사 온 물품들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도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마자랭이지만, 욕심은 끝이 없었다.

"전에 루스 차르국에서 온 대공의 뒤를 봐준 일을 알고 있소. 그자의 행방에 관해 알고 싶소."

"루스 차르국이라···. 혹시 야코프를 말하는 것입니까?"

"맞소. 야코프. 그자가 지금 어디에 있소?"

"그건···."

"그대로 모르오?"

"네, 전하. 제가 뒤를 봐준 적이 있지만, 신대륙으로 떠난 후에는 연락이 없습니다."

"크흠···. 그렇군요."

혹시나 하고 마자랭에게 물어봤지만, 야코프의 소식을 모르는 게 확실했다.

마자랭은 뒹케르크에 조선전력공사 분점만 세워준다면 간이며 쓸개까지 꺼내 줄 것 같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자를 차지십니까?"

"그자는 전범이요. 그러니 잡아서 처벌받아야 하오."

"그렇다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니 분점을···."

"알겠소. 그자를 찾게 되면 당연히 세우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이 때문에 조선전력공사 분점은 한 참 후에나 뒹케르크에서 문을 열 수 있었다.

성공리에 회담을 마친 연은 다시 기함을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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