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칼레 평화 회담(1) >
체급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었다.
단숨에 프랑스를 삼켜버릴 것 같은 칼 10세가 이끄는 브리튼 왕국의 바이킹 전사들.
브리튼 왕국보다 3배나 많은 인구를 보유한 프랑스를 쉽게 점령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기를 원하는 바이킹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순식간에 점령했던 칼 10세.
약 33km 정도 되는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진격했다.
프랑스는 68~72문을 탑재한 쿠론(Couronne) 전열함을 내보내 도버 해협을 건너오는 바이킹의 전열함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받은 강철 대포를 사용하는 브리튼 왕국의 함선을 당할 수는 없었다.
강철 대포라 하여도 흔들거리고 삐걱대는 목조 함선에서 조준하여 사격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17세기 해전이 그렇듯, 두 나라의 함선은 서로 근접하여 포격질을 했다.
'이 대포는 무적이다! 놈들이 다가오기 전에 박살을 내버려라!'
칼 10세의 우렁찬 명령이 있었지만, 강철 대포는 함선끼리 붙어 싸우는 해전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프랑스의 쿠론 전열함을 향해 강철 대포를 발사했지만, 적중률이 형편없었고, 직격하더라도 구멍만 '뻥' 뚫리고 말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강철 대포가 너무 강해서 놈들의 함선을 그냥 뚫고 지나가 버립니다.'
'이런!'
길이가 53m나 되는 프랑스의 쿠론 전열함에 10cm 정도 되는 쇳덩이가 뚫고 지나갔지만, 그뿐이었다.
포탄이 지나간 자리는 파괴되고 병사들은 즉사했지만, 함선 전체에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했다.
점점 다가오는 프랑스의 쿠론 전열함.
바이킹 함선과 비켜 지나가며 포격을 날렸다.
드디어 맞붙게 된 두 나라의 함선.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뿌연 화약 연기가 해상을 덮었다.
고막이 터질 듯한 포격 소리와 함께 수석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뇌를 흔들어 놓았다.
팽팽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칼 10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프랑스군의 쏜 총탄.
칼 10세는 뺨을 만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제기랄!'
불에 된 듯한 화끈한 통증과 함께 붉게 물든 손가락 마디가 보였다.
이때 칼 10세는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손가락 마디마다 맺힌 붉은 핏자국에서 어제 먹었던 체리가 보인 거였다.
'강철 대포에 포도탄을 넣고 발사하라!'
몇 문 안 되는 강철 대포라 소중히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갑판 위에 있는 적과 돛을 파괴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포도탄은 사용을 금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낄 때가 아니었다.
웬만해선 침몰하지 않는 나무로 만든 함선이지만, 재수 없으면 쉽게 가라앉는 게 목조 함선이라 나중을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강철 대포에 청동 대포에 사용하고 있던 포도탄을 구겨 넣은 바이킹 전사들.
쿠론 전열함 중심을 향해 불을 붙였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산탄총처럼 쏟아져 나간 작은 포환들.
쿠론 전열함의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냈다.
뻥 뚫린 구멍으로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가장 큰 중앙 돛대가 쓰러져 버렸다.
동시에 두 동강이 나버린 쿠론 전열함.
빠르게 도버 해협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또 하나의 훌륭한 물고기 안식처가 생성되었다.
만족한 듯 씩 웃는 칼 10세.
'놈들을 모두 수장시켜라!'
포도탄이 발사되며 강철 대포의 포구가 거칠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발사되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두 나라의 해전은 급속히 정리되어 갔다.
브리튼 섬에서 가장 가까운 도버 해협 건너 칼레 항구에 상륙한 바이킹 전사들.
남쪽으로 약 230km 떨어진 파리로 진격했다.
하지만 급파된 프랑스군에 의해 진로가 막혔다.
솜(Somme)강을 사이에 두고 아미앵(Amiens)에서 대치된 두 나라의 병사들.
치열하게 싸웠지만, 어느 쪽도 솜강을 넘지 못했다.
3배나 많은 인구수에서 뽑아낸 프랑스 병사들의 수가 5배가 넘다 보니 끝없는 포격과 총격질만 지속되었다.
'제길! 강이 좀만 넓었더라면···.'
잘해야 30m 정도인 솜강의 폭.
강변에 포대를 쌓아 대치하다 보니 사거리와 파괴력이 우수한 강철 대포가 있지만,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수적 열세 때문에 강을 건널 수도 없었다.
좁은 강폭 때문에 머리를 드는 순간, 총탄이 날아왔기에 겨냥해 쏘는 것조차 힘들었다.
지루한 접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칼 10세에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보낸 서신의 내용은 간결했다.
'브뤼셀(Bruxelles) 지방을 넘겨줄 터니 이만 끝내자.'
21세기 벨기에라 부르는 곳을 받고 이만 꺼지라는 말이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칼 10세.
그 제안을 수락했다.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 10세가 프랑스를 치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건 전쟁을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부족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브뤼셀이라면···, 충분하지.'
파리 주변은 물론 전 국토가 곡창지대인 프랑스처럼 브뤼셀 지방도 풍요로웠다.
그랬기에 프랑스는 유럽반도에서 가장 많은 2천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보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브뤼셀을 포함한 북쪽은 플란데런 지역으로 네덜란드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 10세는 루이 14세의 제안을 들먹이며 네덜란드를 압박했다.
'플란데런 지역은 앞으로 브리튼 왕국의 영토이다.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포구와 총구는 너희를 바라볼 것이다.'
1567년부터 1648년까지 약 80년 동안 스페인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벌였던 네덜란드.
발 등에 불이 떨어졌다.
1648년, 네덜란드는 베스트팔렌 조약(Westfälischer Friede)으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독립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1643년부터 시작된 협상은 1646년에 중단되었다.
다시 유럽 16개 나라와 66개의 신성로마 제국령에서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체결될 베스트팔렌 조약.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총 109개국의 외교 사절단이 모여 합의 끝에 작성한 조약이기 때문이다.
'그냥 넘겨준다고 하는 게 낫지 않겠소? 어차피 조약에 의해 프랑스의 영토가 된 곳 아니요?'
'그렇다 하지만, 우리 네덜란드 신교도들이 살고 있는 곳이요.'
'칼 10세 미쳤다고 하지만, 종교의 자유는 보장하고 있소. 그러니 그곳을 넘기는 게 현명할 거요.'
'무슨 말이요? 다시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팔아먹을 생각만 하다니. 아니지! 파는 것도 아니요. 그냥 일방적으로 인정하라고 했소. 이 말의 뜻을 아시오?'
'왜 모르겠소. 하지만 플란데런 지역을 칼 10세에게 넘기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소.'
'뭐가 좋단 말이오?'
'스페인이 물러갔지만, 프랑스는 우릴 호시탐탐 노리고 있소. 하지만 브리튼 왕국이 중간에 끼어든다면 어찌 되겠소?'
21세기에도 네덜란드는 왕이 존재하는 입헌군주국이었지만, 통치는 내각과 의회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칼 10세의 서신을 받고 의원들이 논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견이 갈렸다.
어차피 네덜란드 영토가 아니니 따르자는 측과 되찾아야 한다는 측이 팽팽히 대립했다.
그런데 독립전쟁 당시 도움을 주었던 잉글랜드에 호감을 품고 있는 내각과 의원들이 더 많았다.
'음···, 그건 좋은 생각인데 칼 10세가 변심하면 어찌할 것이요?'
'칼 10세는 조선의 태자를 모신다는 소문이 있소. 그러니 조선의 태자를 끌어들여 협상을 하고 조약을 맺는다면 제아무리 미친 칼 10세라지만, 허튼짓은 하지 않을 거요.'
이렇게 된 일이었다.
문식이를 만나러 출발한 연이 칼레로 목적지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네덜란드 때문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네덜란드.
모든 것이 불안했다.
주변은 하나같이 강대국이 포진해 있었고, 170만 명 정도 되는 인구로는 독립을 지키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조선의 태자를 끌어들여 조약을 맺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네덜란드 내각과 의원들은 즉시 왕에게 보고를 했고 형식적이지만, 허락을 받았다.
플란데런 지역은 어차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프랑스의 땅이 되어 버렸으니 아쉬울 필요가 없었다.
걱정되는 게 있다면 신교도인 네덜란드 국민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도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브리튼 왕국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에 잘만 하면 상업을 중시하는 네덜란드로써는 큰 이익을 볼 수도 있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고만고만한 도시들이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뭉쳐 만든 네덜란드.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소금물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방법으로 부를 이뤘지만, 힘이 없었다.
프랑스의 간섭을 피하고자 신성로마제국에 기웃거렸지만, 되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 버렸다.
그 후 80년 동안 독립을 위한 전쟁을 벌이면서 얻은 12년의 휴전.
1609~1621년 동안 지속된 소중한 평화 시기에 네덜란드는 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빠르게 발전했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조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북미 개척지인 뉴암스테르담을 조선에 넘기면서 얻어낸 북해 청어잡이로 부를 쌓고 있었다.
'조선 놈들은 무력은 강할지 모르지만, 바보 같은 놈들이오. 그리니 이번 협상을 잘 이용하면 온전한 주권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요.'
북해의 모든 자원을 조선의 소유권으로 넘기는 대신 청어잡이를 허락받은 네덜란드 의회는 자신만만했다.
* * *
칼레 해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우와! 저 거대한 배가 조선에서 새로 만들었다는 기함이야? 엄청나군."
"옆에 떠 있는 호위함도 크기가 장난 아니야!"
해변 2km 밖에 떠 있는 새하얀 조선 기함 1호와 호위함들을 보고 사람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서역에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들어서면서 유럽반도와 무역이 활발해졌다.
그로 인해 소식 또한 빠르게 전달되었다.
1994년, 해저 터널이 생기기 전까지 전략적 요충지이자, 중요한 어항이었던 칼레는 채널 터널(Channel Tunnel)이 완공되면서 그 중요도가 낮아졌다.
"라파엘! 저기 좀 봐봐! 배에서 뭔가가 나오고 있어!"
"어! 그러네. 연락선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잘 봐봐 한두 척이 아니야."
호위함과 보급함 옆면, 앞뒤에 있는 커다란 문이 열리면서 상륙함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수히 많은 상륙정이 바다 위에 내려진 후 바닷물을 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돛도 없는 배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처음 듣는 묘한 소리를 내며 해변으로 달려왔다.
"이···, 무슨 배가 저래?"
"어···, 엄청 빠르다!"
사람들은 놀라 모래사장을 벗어나 언덕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냥 지켜보는 사람도 많았다.
"걱정하지 마. 조선군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헤치지 않는다고 했어."
"정말?"
"그럼! 우리 아버지가 소양까지 가서 물품을 사 오잖아."
"맞다! 제라드 아저씨가 조선에 자주 갔다 오시지."
라파엘의 아버지 제라드는 소양에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생기자 투자자들을 모았다.
투자자로부터 돈을 모은 제라드는 사람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소양까지 왕복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 후, 함부르크에도 분점이 생기자 제라드는 배를 샀다.
배를 이용해 함부르크까지 간 후 그곳에서 물품을 가져왔다.
거친 북해 바다가 위험하지만, 마차와 다르게 엄청난 물품을 싣고 올 수 있었다.
이제는 거부가 된 제라드.
파리에 상점을 열기 위해 칼레를 떠났기에 라파엘은 친구와 놀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조선군의 상륙정.
커다란 마차같이 생긴 상륙정은 해변에 쌓인 모래에 닿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르릉' 소리를 내며 모래를 박차고 움직이는 상륙정들.
사람들을 밀쳐내며 공간을 확보했다.
-우리는 조선군이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면 공격하지 않는다.
조선전력공사 경비대라 말해도 조선군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마이크를 잡은 프랑스어에 능통한 대원은 아예 조선군이라 말했다.
-어이! 거기.
-맞아! 너.
-좀 더 뒤로 물러나라.
칼레 항구 서쪽 해변에 상륙한 조선군 상륙정들은 넓게 퍼지며 구경나온 사람들을 몰아냈다.
"저, 저건 뭐야? 쇳덩이잖아!"
가까이에서 본 조선군의 상륙정은 온통 쇠로 된 마차였다.
말도 없는 마차지만, 무척이나 빨랐다.
시커먼 6개의 바퀴는 푹푹 빠지는 모래를 무시하고 이동했다.
연은 본격적으로 상륙정을 개발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단순히 대원들을 실어나르는 것보다 육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다목적 상륙정(LCU, Landing Craft Utility)으로 만드는 게 좋겠지.'
결정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궤도를 사용하면 최상인데, 내부공간이 너무 없단 말이야.'
상륙정의 목적이 무엇인가.
함선에서 병사들을 안전하게 육지로 실어나르는 게 목적 아닌가.
그래서 연은 모래사장에서도 빠지지 않는 바퀴를 개발하라 지시했다.
무한궤도를 장착하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궤도는 내구성이 문제야. 무게도 장난 아니고. 고무로 궤도를 만들 수 있기 전에는 바퀴가 나을 거야.'
상륙 후 바로 작전에 투입해 적을 제압하고 무력화하는 게 목적인 다목적 상륙정.
대항할 수 있는 예상되는 무기래 봐야 대포뿐이 없었다.
하지만 상륙정에 달린 기관총이면 17세기 대포쯤이야 커다란 표적일 뿐이다.
"라파엘! 저건 뭐지?"
새하얀 기함에서 하얀색으로 칠해진 제법 커다란 배가 나타났다.
네모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의 배는 상륙정들의 호위를 받으며 파도를 헤지고 해안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배 앞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보이는 완전무장한 대원들.
사주 경계하면서 마른 해변까지 발판을 설치했다.
발판을 밟고 마른 해변으로 걸어 나오는 이.
바로 연이었다.
"젠장! 배는 탈 것이 아니구나."
투덜거리면서 내리는 연은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지 숨을 깊이 들어 마셨다.
거칠다는 말만 들었던 북해는 장난이 아니었다.
150m나 되는 대형 선박인 기함을 타고 왔지만, 배멀미는 연을 괴롭혔다.
"다시 저걸 타고 대서양을 건너야 하는 거야?"
뒤를 돌아본 연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