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스페인의 몰락(3) >
수시로 제로니모가 된 문식이와 통화를 하던 연은 효종과 상의하기 위해 한양으로 떠났다.
'벌써 반도체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응, 트랜지스터도 반도체이니 만들기 시작한 지 오래됐지.'
'그럼 태양전지판도 만들 수 있는 것 아냐?'
'만들 수는 있지만, 아직 오실레이터(Oscillators)가 썩 쓸만하지 않아.'
'오실레이터? 그게 뭔데?'
'아···, 미안. 발진기(發振器)라고 일정한 간격으로 주파수를 생성해주는 소자를 말해. 그게 있어야 전자회로가 구동되거든.'
'그래? 아무튼 만들 수 있다는 거지?'
언제나 그렇듯 문식이는 공식이가 기술적으로 설명을 하면 들으려 하지 않고 슬쩍 넘어갔다.
들어봐야 무슨 말인지 모르기에 더는 들으려 하지 않았는데 세월이 지나도 세상이 달라도 변하지 않았다.
'응. 만들 수는 있는데 대량 생산을 하려면 전압과 전류제어발진기부터 좋은 걸로 만들어야 해.'
'그럼 만들어 줘. 만들어만 주면 황금으로 보답하지. 이곳에 발전소를 세워도 우리로서는 전봇대를 세우는 것까진 할 수 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역시 문식이 다운 말이었다.
역사를 잘 알기에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확신하는 문식이.
스페인의 침략자들이 완성해 놓은 금은 광산을 제일 먼저 확보했다.
그로 인해 아파치 왕국의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넘쳐났다.
그래서 문식이는 아파치 왕국 자체적으로 금화와 은화를 만들려고 계획 중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나포(拿捕)한 함선이나 스페인 병사들의 소지품에서 조선은행에서 주조한 금화와 은화, 동화를 보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똑똑한 애들을 골라 유학 보내지, 그래?'
'그건 당연한 거고. 일단 나만 아니라 우리 백성들도 문명의 혜택 좀 누리자.'
문식이의 목소리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병수가 설치해 놓고 간 열식 발전기로 제로니모가 기거하는 궁궐은 밤이 되면 밝은 전구의 불빛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왕비들의 처소에 공급하기에는 전력이 부족했다.
평생 기계에 묻은 기름이라고는 군대에서 총 닦는 기름만 만져봤던 문식이.
석기시대나 다름없는 세상에 철기를 도입했지만, 생활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겠어. 아버지와 상의한 후 내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
'아버지? 효종 말이야?'
'응.'
'이런! 얼마 안 남았는데···, 바로 내년이잖아?'
'걱정마. 설파제가 있으니 오래 사실 거야.'
'설파제?'
'마이신 알지?'
'당연히 알지.'
'설파제가 바로 마이신이라고 보면 돼.'
'그래? 그래도 페니실린이 있어야 하는 것 아냐?'
문식이도 페니실린의 효용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수많은 대체역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게 페니실린 아닌가.
'그걸 어느 세월에 만드냐?'
'그래? 만들기 어려운 거야?'
'페니실린을 추출할 수 있는 세균부터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아. 푸른곰팡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거든.'
의식이가 이끄는 생화학연구소에서 페니실린을 개발해 놓았지만, 연은 모르고 있었다.
소양에 기거하면서 서역의 안정을 꾀하느라 모든 것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의식이 또한 안정성을 위해 임상 실험을 하고 있기에 연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게 최고 아냐?'
'최고는. 부작용도 있고, 과민반응이 있는 사람은 쇼크로 죽을 수도 있는데.'
'그래?'
'응. 그것보단 설파제가 훨씬 유용하지.'
'그럼, 그것 좀 보내줘.'
'알았어.'
먹는 약으로 만들어진 설파제는 가루로 만들어 상처에 뿌리기만 해도 2차 감염을 막을 수 있다.
설파제에 대한 교육을 받은 대원들과 병사들은 전투 중에 상처를 입으면 설파제부터 환부에 뿌렸다.
그랬기에 조선군의 사망률을 극히 낮았다.
그런 설파제 또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다.
설파제로도 치료가 안 되는 환자들이 있었고, 은동리에 있는 생화학연구소에서는 그런 환자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항생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아무튼 연은 그동안 문식이와 나눈 대화를 정리해서 효종을 찾아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떠난다고 하느냐?"
"비가 회임을 했으니 출산하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흠···."
효종 또한 태자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고민이 되는지 침음을 뱉었다.
연에게 아파치 왕국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효종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말을 쓰는 왕국이 대양 건너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그들 또한 예맥 대륙에서 건너간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 했느냐?"
"네, 아버지. 아주 오래전에 건너갔기에 우리와 쓰는 말이 달랐지만, 아파치 왕국의 왕이 된 제로니모가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으로부터 한글과 한자 그리고 조선말을 배웠다고 합니다."
"신기하구나.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제로니모의 말로는 조선에서 온 사람은 바다를 구경하러 나섰다가 폭풍으로 그곳까지 흘러왔다고 합니다."
"음···."
효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 만든 지도만 봐도 헛소리를 한다는 걸 알 수 있지만, 효종은 따지지 않았다.
연의 말이라면 일단 믿고 봤다.
"그래서 그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거냐?"
"서로 이익이 되는 부분이 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가봐야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버지."
"···."
효종은 말이 없었다.
정략결혼으로 수십 명의 아내를 둔 문식이와 달리 연은 단 한 명이어서 그런지, 태자비와 금실이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인지 한양으로 돌아오자마자 태자비가 임신했다.
하지만 황실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하나뿐인 아들 연이 꼭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효종이 물었다.
"아직 손을 보지 못했는데 떠나다니. 출산 후 떠나면 안 되겠느냐?"
"손은 이미 보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이냐? 손을 보았다니?"
"명화가 있지 않습니까?"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명화 또한 황실의 적자입니다. 서역의 경우 여자라도 황제가 될 수 있으니 우리 조선도···."
"그럴 순 없다."
연의 말을 자르고 효종은 단호히 말했다.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에 끌려간 후 세상을 새롭게 봤던 효종이지만, 다르지 않았다.
여자는 대를 이을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효종의 뜻을 알아챈 연이 말을 바꿨다.
"제가 노력할 것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그곳에 가면 후궁이라도 들이거라."
"네?"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인종의 용광로로 만들어야 조선의 앞날이 밝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긴 했지만, 그거하고···."
"됐다. 가려거든 후궁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려무나."
아직도 문식이의 부인이 몇 명인지 모르는 연은 난감한지 얼굴을 찌푸렸다.
알았다면 없는 경쟁심이라도 끄집어내서 많은 후궁을 두었을지 모르는데, 생전 처음 사귀어본 여인이 태자비라 애틋함이 각별했다.
게다가 임신 중인데 그럴 수는 없다고 봤다.
"비가 출산을 하면 비와 상의 후에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크흠···."
효종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들이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라 생각하며 지내왔던 연이기에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 일은 돌아와서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꼭 가봐야 합니다. 후세를 위해서도 아파치 왕국과 우호적 관계를 꼭 맺어야 합니다."
"알았다. 네 뜻이 그러하다니 빨리 갔다 오거라. 황후가 있으니 태자비는 걱정하지 말고."
"고맙습니다. 아버지."
어찌 된 일인지 왕좌에 오른 효종은 더는 후손을 보지 않았다.
연은 효종에게 아이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꺼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친구 같은 사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효종에게 고마움을 표한 연은 태자비를 찾아가 설명한 후 소양으로 떠날 준비에 들어갔다.
그동안 발전해온 디젤 엔진은 가변흡기(Variable Induction System)와 과급기(Turbo Charger)를 추가하면서 출력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갈수록 정밀해지고 튼튼해진 조선의 베어링 기술.
분당 1만 회전이 넘는 과급기 또한 내구성이 올라갔다.
또한 엔진 블록은 알루미늄으로 만들고 실린더 내부는 구상흑연주철로 만든 통을 박아 넣었다.
절단면이 회색이라 회주철(灰鑄鐵)이라 부르는 저탄소강.
인장강도가 우수하기에 공작기계나 엔진 실린더 같은 가혹한 환경에서 뛰어난 내구성을 발휘한다.
이런 회주철에 마그네슘, 칼슘, 실리콘, 니켈, 크롬을 소량 첨가하면 구상흑연주철을 얻을 수 있다.
부식, 마모에 대한 저항성이 뛰어나고, 고온에서도 강도와 내식, 내열 특성이 우수하기에 구상흑연주철은 엔진 블록의 실린더 내벽용으로는 최고였다.
이제 8,000cc 8기통 터보 디젤 엔진의 출력은 250kW(340마력)가 넘었다.
터보 디젤 엔진 두 개를 이어붙여 만든 기관차용 엔진 2쌍으로 1,000kW(1,360마력) 출력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기차의 최고속도는 100km/h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연비와 안정적인 주행을 위해서 80km/h 정도로 운행하고 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한양에서 소양까지 약 1만km나 되는 거리를 기차를 타고 단 5일이면 주파할 수 있다.
그래도 정비와 보급을 위해 쉬어가야 하기에 예맥 대륙을 횡단하려면 7일이 소요 된다.
조선 제국을 선포하면서 바뀐 신분증과 거주증을 갱신하려는 백성들의 발길이 관공서로 향하는 가운데.
연은 양순이가 선발해 놓은 연구원들과 공돌이들을 데리고 소양으로 떠났다.
* * *
북미 말고는 확장하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조선과 달리.
이베리아반도와 중남미를 차지하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세력을 넓히고 있던 스페인 제국.
들불처럼 일어난 폭동으로 심각한 상황에 빠져버렸다.
무적의 콩키스타도르를 모두 잃어버린 스페인의 펠리페 4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지원은 오지 않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인의 처가였지만, 그들 또한 코가 석 자였다.
칼 10세와 전쟁 중인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 싸우고 있는 신성로마제국.
그들로서는 내란이 일어난 스페인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1640년 반란을 일으켰던 스페인 북동쪽 카탈루냐.
사생아인 돈 후안 호세가 진압했지만, 그가 아파치 왕국으로 진압하러 떠난 후 포로로 잡혔다는 말을 듣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들고 일어난 반란 세력이 요구한 것은 단순했다.
-먹을 것을 달라!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카탈루냐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왕조 출신인 펠리페 4세를 거부했다.
막대한 금은보화를 신대륙에서 싣고 왔지만, 백성들의 삶은 더 힘들어져 갔고, 이제는 먹을 양식조차 부족했다.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급한 대로 조선에서 밀을 수입해야 합니다."
"크흠···."
펠리페 4세는 신하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조선에 줄 돈이 없었다.
신대륙에서 들어 올 금은보화를 담보로 빌린 돈만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런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외상으로 준다면 모르지만, 사 올 돈이 없소. 그러니 무력으로 진압하시오. 전부 죽여도 좋소."
"폐하! 그러다 병사들까지 들고일어날지 모릅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어쩌란 말이오. 지금 당장 없는 돈을 어디서 융통할 수 있단 말이오?"
"폐하!"
신하는 황실에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두고 말했지만, 펠리페 4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알수 있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만, 그럴 순 없소. 당장 근위대에 줄 돈도 빠듯하오."
"하···."
'디아 리얼'이라고도 부르는 황실 근위대(Royal Guard).
스페인 황실을 보호할 최후의 보류였다.
초대 군주인 카를 5세부터 황궁에 상주하며 경비를 담당했던 근위대라 하지만, 봉급을 주지 않으면 그들 또한 어찌 될지 모른다.
그랬기에 펠리페 4세는 굶주림에 들고 일어난 백성들을 달래고 싶어도 황실 금고 열쇠를 쥐고 놓지 않았다.
훗날 유럽의 텃밭으로 불리는 스페인.
국토의 1/3 정도가 산지인데다 평균 해발고도가 600m가 넘지만, 스페인은 농업 국가였기에 식량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속된 역병과 기근, 홍수로 인해 인구가 줄어들고 농지가 사라졌다.
식민지에서 돈만 들어오면 가톨릭을 믿으라고 전쟁에 나섰다.
그러다 보니 자급자족하던 식량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신대륙 식민지에서 싣고 온 감자로 연명하던 스페인의 백성들.
그것마저 끊기자 폭동을 일어났다.
대책을 마련하려고 모인 신하들.
펠리페 4세의 강경한 태도를 확인하고 슬며시 황궁을 빠져나갔다.
침몰하는 배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들은 가산을 정리해서 야반도주했다.
식민지를 잃어버린 스페인의 앞날은 보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다.
해가 지지 않는 지구 최초의 제국이 된 스페인.
아파치 왕국에 식민지를 빼앗기자 폭동과 반란으로 망해가고 있었다.
이와 달리 이미 망해버린 일본 열도로 기수가 이끄는 예맥 기병대가 출동했다.
더는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다이묘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보상금에 눈이 돌아가 버렸다.
그로 인해 조선의 영토가 된 일본 열도의 안정을 위해 연의 명을 받은 예맥 기병대가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