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스페인의 몰락(2) - 지도 >
무려 세 시간 동안 통화를 지속하던 연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흥분을 진정시켰다.
주말이면 둘이 만나 술을 마실 때도 이처럼 오랫동안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특별한 주제가 없으면 그냥 아무 말 없이 서로 술을 따라주며 마시다가, 취하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게 순서였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끝이 없었다.
누구에게라도 지나온 삶에 관해 말을 하고 싶었지만, 터놓고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서였는지 둘 다 무척이나 말이 많았다.
"젠장! 이게 뭐라고···."
눈을 훔친 연의 손에는 물기가 촉촉했다.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지만, 흐르지는 않았는데 아마 젊어진 신체 때문일거라 생각한 연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진짜 왕이 됐네. 짜식."
둘 다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았는지, 처음에는 듣기보다 서로 떠들기 바빴다.
어느 정도 말을 내뱉고, 상대가 바로 그라는 게 확인이 되자 지나온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감탄하기 바빴다.
그만큼 둘의 삶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김자점을 제일 먼저 보내 버렸다고? 잘했다! 잘했어. 놈이 있었으면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거야.'
-무슨 소리! 놈이 있었어도 자체 무력을 가지고 있으니 날 어쩌지 못했을 거야.
'순진하긴. 넌 놈의 상대가 안 돼. 아마 자체 경비대조차 구성하지 못했을 거야. 괜히 나섰다가 인조에게 미운털 박히면 어찌 됐을지 너도 알잖아?'
-그러긴 했지. 그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아양까지 떨었잖아.
'잘했다! 잘했어. 그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아쉽군.'
진짜 아쉬웠는지 껄껄거리며 웃는 문식이의 목소리에 미련이 남아있었다.
"중남미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고 싶다고? 그게 왕국이냐? 제국이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북미 원주민 중에는 호전적인 부족이 많았다.
그들을 흡수하여 북미를 차지하는 것 보다 이미 식민지가 되어버린 중남미에서 스페인의 침략자들을 제거하고 차지하는 것이 효율적이란 말이었다.
헤어진 지 18년이 지났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바로 어제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해적부터 소탕하자고? 음···."
연은 한참 동안 내려놓은 수화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역사를 잘 아는 문식의 말.
'증기 터빈 엔진이라고? 그게 뭔지 모르지만, 대서양을 봉쇄할 순 있잖아.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해적 놈들을 먼저 제거한 후, 대양을 봉쇄하면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것만 해줘.'
-플로리다는?
'그곳이야 대양을 봉쇄한 후 처리해도 늦지 않아. 아니면 남하하면서 제거해도 되고.'
-놈들이 어디에 있을 줄 알고?
'걱정마! 해적 놈들이 오가는 루트야 뻔하지. 아이티 알지?'
-아이티? 쿠바 옆에 있는 아이티를 말하는 거야?
'응. 그곳 북쪽에 토르투가(Tor Tuga)란 섬이 있어. 그곳이 캐리비안 해적 소굴 중 가장 큰 곳이야. 그곳부터 제거해줘.'
아파치 왕국이 점령하고 있는 베라크루즈를 다시 찾기 위해 스페인의 지중해 무적함대가 급파됐지만, 되려 전멸했다는 소문은 이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도 카리브해 해적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디로 가야 할지 그들도 모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길이 37km밖에 안 되는 작은 섬 토르투가.
그곳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쫓겨난 해적들이 모여있는 본거지였다.
그곳에서 해적들은 스페인의 식민지인 산티아고데쿠바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보물선을 노리고 암약하고 있었다.
"이놈들 때문에 문식이가 나에게 연락하지 못했다고 했지."
스페인 침략자들의 함선을 나포했지만, 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설픈 항해 실력으로는 필수적으로 지나가야 하는 해로에 해적들이 설치고 있으니 나설 수가 없었던 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살피던 연은 쿠바 주변을 살폈다.
"대단하군."
산티아고데쿠바 주변은 온통 해적 천지였다.
스페인의 보물선을 노리고 모여든 해적들.
어찌 알았는지 베라크루즈에서 출발한 보물선이 쿠바에 있는 산티아고데쿠바에서 정박한 후, 다시 스페인으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주변을 점령하고 있었다.
"자메이카, 이곳도 해적 소굴이라 했지.'
한때 해적들의 낙원이라 불렀던 포트 로열 섬은 1601년 큰 지진으로 해일이 일어나 섬에 사는 해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런데도 하나둘씩 다시 모여들어 베라크루즈에서 산티아고데쿠바로 가는 스페인의 보물선을 노렸다.
"여기가 영국 놈들의 본 거지였군."
유명한 해적영화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토르투가섬과 달리 포트 로열 섬은 영국 정부에서 해적들을 상주시키고 지나가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상선들을 습격하도록 한 곳이다.
다행히 문식이는 카리브해 해적들의 소굴을 전부 알고 있었다.
해적영화를 본 후, 너무 아름다워서 그곳이 어디인지 찾아보다가 카리브해 해적의 역사를 조사해 본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알게 된 해적들의 본거지는 너무나 많았다.
'한두 군데가 아니야. 아직 레이더를 개발하지 못했으니 일일이 찾아서 없애야 해.'
-그건 좀 곤란한 데···.
'왜?'
-조선은 타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거든.
'그래? 왜 그랬어? 세계를 정복하고도 남을 무력을 두고.'
-미국 꼴 나기 싫었거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운 좋게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으로 초강대국으로 올라선 미국.
다시 말해 유럽 열강들이 패권을 두고 싸움질하는 통에 반대급부로 부상한 미국은 자국의 지위와 이익을 위해 나섰다.
공산화가 된 소련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서라지만, 때로는 음모를 꾸미고 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문식이와 공식이가 살았던 21세기에서 끝도 없는 테러에 시달리며 세계 곳곳에 주둔군을 배치하고 전쟁에 투입됐다.
물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나선 미국이기에 욕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욕심 때문에 죽어 나가는 건 미국의 젊은이들이었다.
또한 엄청난 군비로 인해 천조국이라 불리며 막대한 돈을 전쟁하는데 꼬라박고 있었다.
그래서 연은 세계의 경찰 따위는 할 생각을 전혀 없었다.
'소가 닭 보듯 방치하려고?'
-응. 굳이 나서서 도와줄 필요 없잖아. 잘해야 욕이나 덜 먹지.
'그건 맞아. 잘 생각했어. 그래도 인류애를 발휘해서 식량 지원 정도는 해줄 거지?'
-그럴 생각이었는데, 하는 짓 봐서. 원하지도 않는데 해줘 봐야 고마운지 모르잖아.
문식이나 공식이나 수많은 웹소설을 봤기에 인간군상에 대한 시각이 남달랐다.
번듯한 직장을 가졌지만, 자기 이름 앞으로 된 아파트 한 채가 없다는 이유로 선조차 들어오지 않았던 둘.
물론 생긴 것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둘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라를 통치하는 자리에 올라선 둘이 제일 먼저 한 일이 토지 공개화였다.
소득의 1/3 이상을 주거에 쓰면서도 휘달리는 삶을 사는 미래의 인간들.
그들을 위해서라도 '부동산 투기'란 단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게 할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불러 주는 것 좀 적어봐.'
-뭔데?
'네가 쳐야 할 해적들 소굴.'
-그래?
'응. 바하마 군도 북부에 있는 나시우 섬. 쿠바 남쪽에 있는 케이만 군도. 푸에르토리코 동쪽에 있는 세인트 크루아 섬. 북쪽에 있는 버진고다 섬도 해적들의 소굴이야.'
문식이가 불러 준 해적들의 소굴은 무려 10곳이 넘었다.
모두 스페인의 보물선과 북미 대륙 남쪽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프랑스의 선박을 노리며 활약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연 때문에 아니 칼 10세 때문에 잉글랜드가 사라지고 브리튼 왕국이 탄생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더는 관여 하지 않았다.
칼 10세가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도버 해협을 건너 침공하면서 프랑스의 함선과 상선까지 발 길이 끊겨버린 거다.
거기에 아파치 왕국 군이 베라크루즈를 치면서 스페인의 보물선까지 오지 않자, 해적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도 알지? 칸쿤.'
-휴양지 말이야?
'응. 그곳에도 해적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는 보고야.'
틀어져 버린 역사로 인해 약탈 대상을 찾지 못한 해적들은 가장 가까운 유카탄반도 해안가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눈으로 육지를 확인하며 항해하는 시대이기에 스페인의 보물선과 해적들의 이동 경로는 정해져 있었다.
해적이나 정부군 함선이나 상선은 모두 쿠바 남쪽을 지나 칸쿤에서 유카탄반도 북쪽 해안가를 따라 베라크루즈까지 가는 루트를 이용하고 있었다.
'놈들이 수시로 나타나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있어. 먹을 것만 가져가면 되는데도 모두 죽이고 아이들만 납치해 가니 미치겠다.'
칸쿤 남쪽은 아직 스페인의 침략자들이 지배하고 있었기에 해적들은 베라크루즈를 점령한 아파치 왕국을 우습게 보고 찝쩍거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파치 왕국의 인구수는 이제 3백만 명이 약간 넘는 수준이다.
그 인구에서 최대한 뽑아낸 아파치 전사의 수가 무려 10만 명에 육박했지만, 베라크루즈에서 칸쿤까지 1,000km가 넘는 해안가를 지킬 수는 없었다.
또한 대형 함선을 만들 능력이 없기에 바다로 도망가는 해적선을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다 포획했다며?
'그러긴 하지만, 전투 중에 망가진 것이 많아 지금 수리 중이야.'
일식이가 이끄는 아파치 전사들은 카누를 타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급습했다.
견시의 눈을 피해 몰래 함선 위로 올라선 아파치 전사들.
닥치는 대로 콩키스타도르들을 겨냥해 쇠뇌와 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콩키스타도르들을 전부 죽일 수는 없었다.
도끼와 창을 던져 공격했지만, 판금 갑옷은 무적이었다.
총알 말고는 번쩍이는 판금 갑옷을 뚫지 못했다.
게다가 긴 창을 앞세우고 덤벼드는 콩키스타도르들은 아파치 전사들처럼 용맹했다.
그래서 던진 비격진천뢰.
판금 갑옷을 입고 설치는 콩키스타도르들을 날려버렸지만, 배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다행히 나무로 만든 배라 가라앉지 않았지만, 갑판과 돛까지 모두 불에 타버려 전면적인 수리를 해야만 했다.
-전에 있는 것까지 50척이 넘는다고?
'응. 정확히 62척이야.'
-그 정도면 바로 스페인으로 쳐들어가도 되겠네.
'그러겠지. 그런데 우리는 배를 몰 줄 몰라. 그래서 지금 스페인 놈들에게 항해 기술을 배우고 있어.'
철기는 물론 청동기도 거의 없는 북미 원주민이지만, 짐승의 가죽을 덧대 카누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다.
하지만, 바람을 이용한 범선을 운항해 본 적이 없기에 베라크루즈를 점령하고도 포획한 범선들을 지금까지 방치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알아서 왕창 몰고 오다니.
그것도 항해 능력이 뛰어난 병사들을 이끌고.
제로니모가 된 문식이는 역사를 잘 알았기에 행성왕으로 불리는 스페인의 펠리페 4세가 그냥 있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
베라크루즈 주변에 조잡하지만 강력한 강철 대포를 배치해 요새화하고 오기만을 기다렸다.
-알았어. 그럼 네가 말한 곳을 초토화해버릴 테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해.
'좋았어! 그것만 해주면 카리브해는 내가 다 점령하지.'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친구와 단둘이서 3시간 동안 떠든다는 게 남자 사이에는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런데 이때 나눈 대화로 카리브해의 해적들은 포격으로 죽거나 산속으로 도망가서 굶어 죽었다.
아무리 거칠고 험악한 해적들이라지만, 문명의 지원이 없는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생각을 마친 연은 즉시 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동리에 있는 연의 집무실.
그곳과 소양에 있는 전화는 무전기와 연결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한 그 누구도 감청할 수 없게 음성 변조와 복조까지 할 수 있도록 전자 회로가 구성되어 있었다.
-사장님, 찾으셨습니까?
"지금 즉시 서역 함대를 급파해야 할 곳이 있다."
-말씀만 하십시오.
연의 명령을 받은 해수는 서역 함대 3척을 이끌고 함부르크에서 뉴스웨덴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보급을 받은 후,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플로리다와 쿠바, 아이티 등 대서양에 인접하고 있는 모든 곳을 공격할 계획이다.
상륙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대양을 횡단할 수 있는 선박들을 모두 부숴버리기로 했다.
또한 병수가 이끄는 조경함은 해적들이 설치는 카리브해 연안을 쓸어 버리기로 했다.
최대 사정거리가 10km에 육박하는 조303 대포면 놈들이 볼 수 없는 거리에서 놈들을 박살 낼 수 있지만, 잡혀간 아이들을 구출할 생각이다.
그래서 병수가 이끄는 조경함에는 일식이와 아파치 전사들이 승선해 있었다.
자국의 일은 자국의 전사들이 처리해야 한다는 문식이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페인의 식민지와 그곳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를 노리고 활약하던 해적들이 소탕되고 있는 가운데, 스페인 곳곳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엄청난 금은보화를 신대륙 식민지에서 싣고 왔지만, 전쟁으로 다 날려 먹고 빚까지 지게 된 스페인의 앞날은 어둡기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에서 가장 먼저 무너진 나라는 스페인이 될 것 같다.
영국이야 사라졌지만, 그대로 브리튼 왕국으로 흡수되면서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스페인은 달랐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최초로 선포할 정도로 강력했던 스페인은 이제는 없었다.
지중해 무적함대까지 사라져버린 스페인은 내부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