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스페인의 몰락(1) >
신대륙에 관한 스페인의 목적은 약탈이었다.
선교의 목적도 있었지만, 그거야 나중 일이고 일단 황금과 은덩이를 챙겨오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것도 재앙이나 다름없는 아주 큰 문제가.
연이 아파치 왕국으로 병수를 급파한 후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유럽 곳곳에서 난리가 났다.
베라크루즈로 보낸 스페인의 지중해 함대가 박살이 났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었지만, 소문은 발이 달린 것처럼 대서양을 건너 유럽까지 도달했다.
조선 말고는 이렇다 할 정보 전달 수단이 느린 세상.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소문이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장사하는 상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같은 상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문 들었어?"
"뭐? 무적함대가 패했다는 소식?"
"응."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더는 스페인으로 은이 들어오지 못할 거라는 데."
"그럼 어떡하지."
"왜 스페인에 돈이라도 빌려줬어?"
"내가 직접 빌려준 건 아니지만···."
"이런! 은행에 맡겼구나."
"그랬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빨리 가서 찾아와! 이러다 은행이 망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고 있는 거야!"
상인은 초조한 심정으로 은행으로 달려갔지만,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미 은행 앞에는 자신과 같은 이들이 수도 없이 모여서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고 있었다.
"어찌 된 거요?"
"당신도 이 은행에 돈을 맡겼소?"
고개를 끄덕이는 상인을 보고 성난 표정의 중년인은 혀를 찼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아파치 왕국과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은행주가 도망을 갔다오."
"뭐라고요?"
"돈 받기는 다 틀린 건 같소."
"네?"
"나도 그렇지만, 당신도 맡긴 돈을 찾을 길이 없다는 말이오."
중년인은 답답한지 담배 파이프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내뿜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돈이 생각나자 상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미 유럽 곳곳에서 시작된 뱅크런.
그로 인해 파산하는 은행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뱅크런의 시작은 은행에 예치한 돈을 찾을 수 없다는 우려에서 비롯되었다.
잉글랜드 상인들은 금을 관행적으로 런던 타워에 있는 주조소(鑄造所)에 보관했다.
1066년에 정복왕 윌리엄이 세운 런던 타워는 그 자체가 견고한 요새였기에 상인들은 안심하고 맡겼다.
그런데 찰스 1세가 전쟁 경비로 세금을 거두려고 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내전 과정에서 찰스 1세가 20만 파운드 상당의 금을 ‘대부’라는 이름으로 상인들의 동의 없이 강제로 빌려 쓰겠다고 한 거다.
상인들은 들고 일어났다.
거센 항의로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돌려받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상인들은 은행의 신용을 따지기 시작했다.
찰스 1세가 승전했다면 모르지만, 올리버 크롬웰에게 내전에서 패하면서 찰스 1세에게 돈을 빌려줬던 은행들이 파산하였기 때문이다.
금을 보관하고 있던 런던 타워 주조소를 은행이라 말할 순 없지만, 전쟁 비용으로 대출해준 은행들이 파산했기에 은행이라고 안전하다는 인식이 사라졌다.
개인의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은 은행에 맡긴 돈을 찾아 자신이 보관하는 방법뿐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행위 자체가 뱅크런 현상의 시작이었다.
아무튼 동인도 회사의 성공적인 활동으로 금은보화가 몰려들었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전쟁 자금으로 돈을 빌려주고 있던 이탈리아의 금융 도시에서 뱅크런이 시작되었다.
아직 지급준비제도(支給準備制度, Reserve Requirement System)가 정착되지 않는 상황이라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찰스 1세로부터 돌려받은 돈을 금세공인들이 맡았는데, 이들이 이를 유용한 것이다.
돈을 받고 금을 보관하던 금세공인들.
금 함량으로 장난을 쳤다.
연이 없었다면 무게도 적게 나가는 금화를 만들면서 장난을 계속할 수 있었겠지만, 상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상인들은 재산을 조선은행에서 발행하는 금화로 바꾸어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등장한 조선은행 지폐.
조선이 제국을 선포하면서 발행한 지폐는 웃돈이 붙으며 거래되고 있었다.
상인들은 더는 은행에 금은보화를 맡기지 않았다.
대신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로 금은보화를 바꿔 보관했다.
"이 종이 쪼가리가 천원의 가치를 지닌다고? 믿기 힘들군."
"아니, 조선은행을 못 믿으면 세상에 믿을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러나. 싫으면 관두게."
"싫다는 게 아니라 이 지폐가 위조된 건지 모르지 않는가?"
"뭐라고? 여길 보게 여기 금박지와 숨어 있는 숫자가 보이지 않는가."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는 1원짜리부터 1천 원짜리까지 다양했다.
조선의 명소가 그려진 지폐의 중앙에는 조선은행 본관 건물에 새겨져 있고, 주변은 가치에 따라 은박지 또는 금박지로 테를 둘렀다.
또한 금액을 나타내는 숫자를 곳곳에 표시했지만, 은화(隱畵)로도 만들어 숨겼다.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지폐에 넣는 은화.
생각보다 제조 방법은 간단했다.
'이곳에 물기를 빼는 철망을 붙이면 어찌 되겠느냐?'
'얇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이렇게 이곳만 얇아지면 빛에 비추면 윤곽이 드러나게 될 거다.'
연이 알려준 방법으로 은화와 은박지 또는 금박지가 추가된 지폐는 수 차례 실험해봤지만, 복제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종이부터 질이 달랐기 때문이다.
원유에서 다양한 석유화학 물질을 뽑아낼 수 있는 기술이 있지만, 연은 면섬유로 종이를 만들라고 했다.
그러자 은쌍식이 의문을 표했다.
'사장님, 그냥 플라스틱으로 만들면 훼손되지도 않고 오래 갈 것 아닙니까?'
'훼손되라고 그런 것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부러 그랬다니···.'
'이 지폐가 훼손되어 못 쓰게 되면 누가 이득이겠느냐?'
'아···, 역시 사장님이십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은쌍식이지만, 아직도 배울 게 너무나 많은 은쌍식은 연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렇게 발행된 조선은행의 지폐는 생각지도 못했던 스페인제국과 아파치 왕국의 전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조선으로 금은보화가 미친 듯이 몰려 들어왔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문식이는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조선인들을 보자 감격했다.
* * *
하나같이 덩치가 남다른 조선전력공사의 대원들.
그들을 보고 제로니모는 두 팔을 활짝 벌려 환영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이렇게 환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폐하."
연회장으로 가는 길에 병수는 제로니모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자신보다 더 구사력이 뛰어난 조선말.
왕궁의 창문은 오래전 조선의 궁전처럼 창살에 한지 같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어찌 보면 더 조선 같았다.
그래서 병수가 물었다.
"폐하, 이 모습은 마치 조선의 옛 모습 같습니다."
"그런가요? 조선은 예맥족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들었소. 우리 아파치 왕국 또한 예맥족의 피가 흐르오. 그러니 같지 않겠소?"
"아, 그렇습니까?"
"우리 또한 아궁이와 온돌을 사용한다오. 조선도 그렇지 않소?"
"전에는 그랬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요?"
스페인 포로들로부터 입수한 조선의 상황은 병수가 말해 준 것과 많이 달랐다.
병수가 들려준 조선은 문식이가 살았던 한국과 다를 게 없었다.
단지 전자제품의 개발이 늦어졌다는 것뿐, 전철이며 버스, 트럭, 자동차, 라디오까지 모든 게 원 역사와 틀어져 있었다.
"이걸 전부 태자가 주도해서 했다는 것이요?"
"네, 폐하, 하늘이 내리신 천재이신 태자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 올해 태자의 나이가···, 열여덟 아니오?"
"맞습니다. 폐하. 어찌 아십니까?"
"스페인 놈들한테서 들었소."
"아, 그랬습니까?"
"열여덟이라···, 열여덟."
놀라 되묻는 병수의 말에도 제로니모는 몇 번이나 연의 나이를 읊조렸다.
그만큼 충격을 받은 거였다.
자신처럼 공식이도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한 문식이지만, 효종을 공식이로 생각했다.
역사를 잘 알기에 어린 현종이 공식이 일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 어린 조선의 태자가 공식이였다니.
문식이는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새끼! 해냈구나. 해냈어.'
술자리에서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 왕이 되면 세상을 바꿀 거라고 했을 때, 발전기와 전기를 운운했던 공식이.
진짜로 발전기와 전기를 이용해 세상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흥겨운 연회가 지속되는 가운데 제로니모와 병수는 서로 조선과 아파치 왕국에 관해 묻고 답하며 감탄했다.
문식이는 너무나 빠르게 발전한 조선의 기술을.
병수는 미개한 원주민이 세운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도덕(道德)으로 완벽히 무장된 아파치 왕국의 문화를.
서로가 서로를 치켜세우는 가운데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폐하, 잠시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무슨 할 말이 있소? 이곳에 있는 백성들은 모두 믿을 수 있으니 여기에서 해도 되오."
"그게 아니라 태자께서 폐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게 가능하오?"
"네, 폐하."
제로니모는 조선에서 라디오 방송을 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당연히 무전기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에서 가능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제로니모가 물었다.
"태자는 어디에 있소?"
"한양에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곳까지 무전이 가능하오?"
"네?"
"무전이 가능한지 물었소만?"
제로니모의 말에 병수가 놀랐다.
이제 무전기로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 통신할 수 있다는 정도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거리에 대해서 제로니모처럼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베라크루즈에 정박해 있는 함선에서 중개하면 가능합니다. 폐하."
'묻거든 뭐든 아는 만큼 사실대로 다 말해 주거라'는 연의 명령이 있기에 병수는 자세히 설명했다.
"대단하군요. 대단해···."
감탄해 마지않는 제로니모의 행동에 병수는 왠지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주군인 태자 연을 아파치 왕국의 왕이 이렇게 칭송하니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그래, 어디 있소? 가봅시다."
"네, 폐하."
병수를 따라 밖으로 나온 제로니모.
왕궁 한쪽 공터에 몰려있는 사람들 속에 일식이의 모습도 보였다.
조선군 병사들이 가져온 기물 설치작업을 지켜보던 일식이.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전쟁 말고는 그리 중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먼 곳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치라고 하자.
일식이의 관심은 커졌다.
일일이 뭐 하는 장치인지 다 묻고 있었다.
젊고 강인해 보이는 용사가 아파치 왕국 군의 총사령관이자 태자라는 사실에 대원들은 귀찮았지만, 성의껏 설명하고 있었다.
"이건 먼 거리와 교신할 때 쓰는 장치입니다. 막상 전투에서는 이것 말고 손으로 휴대할 수 있는 이 장치를 사용합니다. 거리는 짧지만, 휴대가 간편하기에 전장에서 유용합니다."
"정말이오? 이 작은 기물로 서로 위치와 적의 행동을 알려줄 수 있단 말이오?"
"네, 전하. 건전지라는 게 필요하지만, 새것으로 갈아 끼우면 계속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 대단하군요. 대단해."
일식이 또한 문식이처럼 감탄 하고 있는 사이에 제로니모가 나타났다.
"""폐하를 뵙습니다."""
모두가 제로니모를 보고 예를 올렸지만, 제로니모의 눈에는 열식 발전기와 무전기만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크기가 작은 무전기를 보고 제로니모가 물었다.
"혹시, 진공관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걸 쓰고 있소?"
"네, 폐하. 진공관이 뭔지 모르지만, 트랜지스터를 쓰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옹진반도에서 자랐기에 병수는 알고 있었다.
진공관이 뭔지는 몰라도 무전기나 라디오에 들어가는 필수 부품이 트랜지스터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은동리 연구원 중에 친구도 많았기 때문이다.
"트랜지스터라···. 그 이름을 누가 지었소?"
"당연히 태자께서 지으신 이름입니다."
문식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조선의 태자 연이 공식이라는 걸.
아파치 왕국에서도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썼던 외래어를 많이 쓰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라를 세우고 통치하기도 바쁜데 일일이 순 한국말로 명칭을 바꾸는 일에 기력을 낭비할 겨를이 없었다.
열식 발전기가 가동되고 무전기 전원에 불이 들어왔다.
병수가 나서서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한 후.
"폐하, 전하께서는 단둘이서만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
"알았소."
제로니모는 무전기 사용법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마이크를 집더니 외쳤다.
"모두 물러나거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병수는 물론 일식이까지 멀리 떨어지자, 문식이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국사 선생님으로 발령 난 학교에서 첫 수업을 진행할 때처럼 심장이 요동치며 흥분과 함께 긴장되었다.
마이크 버튼을 누른 문식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파치 왕국의 제로니모요. 오···바!"
자신도 모르게 길게 '오바'로 말을 끝낸 순간.
-저는 조선의 태자 연입니다. 뵙진 못하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반갑습니다.
중개를 통환 교신이라 그런지 약간의 지연은 있었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
공식이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억양에서 그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문식이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불타는 날 남자 둘이서 대화를 나누었지요."
-고기를 태우면서 말입니까?
갈수록 발전하고 있는 조선의 전자공학 기술.
그 덕택에 주파수를 달리하여 양방향 동시 통화가 가능한 무전기로 둘은 본격적인 대화를 하기 전에 서로 말을 꺼내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