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제로니모(6) >
16세기는 오스만제국의 최전성기였다.
15세기에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오스만제국은 16세기에 이집트는 물론 지중해 연안 대부분을 제국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런데 제국 확장에 공이 컸던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메흐메트 4세의 아버지인 이브라힘 1세가 살해되자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스만제국 역사상 최초로 술탄과 정식으로 결혼하고 황후 대접을 받았던 휘렘 술탄.
'록셀란'이란 이름으로도 불렸던 이 여인은 오스만제국의 역사에서 '여자 술탄 시대(Kadınlar Saltanatı)'를 열었다.
파디샤인 황제를 섭정하면서 정치부터 모든 것에 관여했던 여자 술탄 시대.
쾨셈 술탄이라는 메흐메트 4세의 할머니 또한 아들인 이브라힘 1세가 살해되자 손자인 메흐메트 4세를 섭정하면서 권력을 손에 넣고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적으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등용한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 재상.
메흐메트 4세를 돌보면서 제국의 번영을 추구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에 이어 어머니, 이젠 어머니가 임명한 재상의 섭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냥에만 열중하던 메흐메트 4세가 조선의 태자를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오스만제국의 연못이나 다름없던 마르마라해.
그곳에 있는 가장 큰 섬인 마르마라 섬과 임라르 섬을 조선에 넘겨준 메흐메트 4세는 쾨프륄뤼 재상이 하는 일마다 반기를 들었다.
가까운 곳에 조선군 함대가 정박해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는지 멋도 모르면서 설쳐댔다.
"왜 아직도 비엔나를 점령하지 못한 겁니까?"
"파디샤, 그게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 오스만제국과 동등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입니다."
"놈들도 조선의 수석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압니다. 그렇다 해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놈들의 병력은 고작 3만 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5배나 많은 제국군이 아직도 점령하지 못했다는 건···."
메흐메트 4세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조선의 태자가 뒤를 봐준다 해도 유능하다고 소문난 쾨프륄뤼 재상을 무시할 순 없었다.
"파디샤의 뜻이 그렇다면 진격을 서두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재상."
1529년 제1차 빈 공방전 이후 이렇다 할 큰 전쟁이나 전투가 없던 두 제국.
조선에서 사들인 수석총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속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도와달라고 칙령을 내렸지만, 제후와 주변국들이 지원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무기상으로 변신한 얀 2세가 아니었다면 벌써 무너졌을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 부닥쳤다.
공격하는 오스만 제국군도 다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벌써 3년이 넘어가는 전쟁으로 제국의 재정이 악화되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디샤, 요청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재상."
"강철 대포를 구할 수만 있다면 비엔나 점령을 더 빠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파디샤께서···."
재상의 말을 듣고 있던 메흐메트 4세는 손을 내저어 재상의 말을 중단시켰다.
"이미 여러 번 요청 했으나 아니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일은 잊어버리시고 어서 빨리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파디샤."
그러지 않아도 메흐메트 4세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수 차례 연에게 사신을 보냈다.
그때마다 들었던 말.
'오스만제국에 강철 대포를 팔면, 신성로마제국에도 팔아야 하오. 얀 2세에게 무기 중계권을 넘겨주면서 계약했던 내용이라 어길 수 없소.'
메흐메트 4세는 조선의 강철 대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성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강철 대포는 성을 방어하는데 더 용이하기에 우위에 있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강철 대포를 개발하고 있는데 실패의 연속이었다.
강철 대포는 판금 갑옷이나 강철 검을 만들 때처럼 두드려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또한 강철 대포를 만들 방법을 알아내려고 수도 없이 시도 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조선 땅에 제철소가 있는 곳은 조선군 중에서도 최정예인 조선전력공사 경비대가 지키고 있으니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 * *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3세는 안절부절못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제1차 빈 공방전 이후 다시 쳐들어온 오스만 제국군을 막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던 거다.
"내가 바보였군."
자조 섞인 말을 읊조리던 페르디난트 3세.
1644년, 모든 제후들에게 독자적인 외교권을 준다는 칙령을 발표한 것이 후회됐다.
"그러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밀릴 이유가 없었을 건데···."
얀 2세를 통해 조선의 무기를 구입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지만, 오스마 제국군은 강했다.
그런데도 도와주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는 제후들과 주변국들.
30년 전쟁의 여파를 핑계 대고 있었다.
"펠리페라도 도와줘야 하는데···."
스페인은 프랑스와 국경분쟁으로 전쟁 중이라 하지만, 펠리페 4세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원군을 보내 줄 거로 생각했다.
아이를 낳다가 죽은 아내의 오빠가 바로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4세이다.
게다가 펠리페 4세는 가톨릭을 열렬히 지지하는 군주 아닌가.
제발 잘되기를 바라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페르디난트 3세의 집무실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이오? 혹시···."
"아닙니다. 폐하. 오스만 놈들도 지쳤는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스페인에서 보낸 지원군이 돌아간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뭐요! 그게···, 왜···?"
종교개혁 이후에도 가톨릭만 믿으라고 강요하던 스페인제국.
같은 가톨릭을 신봉하는 신성로마제국을 돕기 위해 병사들을 보냈다.
그런데 뉴 스페인에 이어 뉴 페루까지 중남미에 있는 부왕령과 소식이 끊겨버렸다.
정기적으로 실어 보내는 황금과 은덩이가 오지 않자 펠리페 4세는 무적의 콩키스타도르를 베라크루즈로 급파했다.
그런데 1년이 넘어서야 살아 돌아온 콩키스타도르에게서 들은 말은 충격이었다.
'그곳은 이미 원주민들의 왕국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것 자체가 주심의 보살핌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스페인도 가지지 못했던 강철 대포.
그런 대포를 베라크루즈 항구 곳곳에 배치해 놓았다는 아파치 왕국.
그 소식을 들은 펠리페 4세는 신성로마제국으로 향하던 지중해 함대를 불러들였다.
아르마다(Armada)라 부르는 무적함대.
그중 잉글랜드와 벌인 칼레 해전에서 허튼짓으로 대서양 함대가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건 지중해 함대뿐이다.
칼레 해전 당시.
스페인의 황제였던 펠리페 2세는 승리를 과신한 나머지, 작전계획서를 출판해서 팔아먹는 짓을 했다.
당연히 푼돈으로 정보를 입수한 잉글랜드가 승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로 큰 빚을 지게 된 스페인은 재정적 압박이 가증되었다.
그런데 식민지인 중남미 부왕령에서 황금과 은덩이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악몽이야!'
펠리페 4세는 지중해에 있는 무적함대를 전부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파치 왕국이라 말하는 원주민들을 쳐부수고 황금과 은덩이를 다시 가져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페인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1492년,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스페인제국.
국토회복운동이라 말하는 '레콩키스타'로 잃어버렸던 영토를 회복하고, 중남미에서 들어오는 황금과 은덩이로 세계 최초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마냥 좋았던 건 아니었다.
경제 관념이 없던 시대.
통화량이 갑자기 늘어나자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물가가 폭등했다.
'스페인에서는 은 빼고 모든 게 비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원인을 찾지 않고 17만 명이나 되는 돈 많은 유대인들을 이단으로 몰고 재산을 강탈한 후 추방했다.
그 후로 망해버린 스페인제국의 금융산업과 유통산업.
신대륙에서 가져올 거라는 황금과 은덩이를 담보로 제노바와 독일 금융가에서 돈을 빌려 버텼다.
16세기에 전 세계 금은 총생산량의 83%를 차지했던 스페인제국이지만, 빚은 더욱 늘어났고 재정은 급격히 나빠졌다.
모두 전쟁 때문이었다.
국가 수입의 70%를 전쟁 비용으로 썼던 스페인제국.
재정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최악의 세금 징수 방법을 선택했다.
거래 때마다 부과되는 소비세.
그게 바로 '부가가치세' 또는 '세일즈 택스'이다.
조선에서도 연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지만, 스페인의 소비세는 너무 심했다.
오직 최종 소비자에게만 단 한 번만 부과하는 조선과 달리 스페인의 소비세는 한 상품에 서너 번 이상 부과했다.
21세기에도 부가세 또는 소비세 인상은 경기를 구렁텅이로 처박는 짓이다.
그런데 경제라는 개념이 없는 시대였으니 어찌 되었겠는가.
끊임없이 중남미에서 황금과 은덩이를 가져와도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스페인제국.
부왕령과 단절되면 파산하고 망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제국의 황제 펠리페 4세는 자신의 사생아인 돈 후안 호세를 마드리드로 불러들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너라.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폐하.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사생아지만 자신의 아버지이자 황제인 펠리페 4세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안이 넌지시 물었다.
대부분 유럽 군주들의 사생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출생 직후에 수녀원에 강제 수용되었던 돈 후안 호세.
1642년 펠리페 4세가 후안을 정식으로 자신의 사생아라 인정한 후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며 자랐는데 스페인제국의 황제라니.
후안은 아버지와 스페인의 영광을 위해 군에 입대한 후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스페인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아무래도 부왕령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구나. 그러니 네가 가서 정리하고 오너라."
"네? 반란이라도 일어났습니까? 그거야 자주 있는 일인데 굳이 제가 가야 할 정도입니까?"
나폴리에서 시작한 스페인군 생활.
시칠리아에 이어 카탈루냐를 프랑스로부터 방어하고, 네덜란드 총독으로 있던 후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펠리페 4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반란 정도가 아니다. 그곳에 아파치 왕국이라는 원주민들의 나라가 들어섰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네가 가서 제거해야겠다."
"아파치 왕국이라 하셨습니까?"
펠리페 4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해 놓았던 보검을 후안에게 건넸다.
"너도 이제 성인이 됐으니 제국의 상황을 잘 알리라 본다. 그러니 빨리 끝내고 돌아오도록 하라."
"네, 폐하. 염려 마십시오."
펠리페 4세의 명을 받은 돈 후안 호세는 무려 50척이나 되는 대함대를 이끌고 발렌시아에서 출항했다.
목적지는 베라크루즈.
그곳부터 진압한 후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후안은 몰랐다.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문식이가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 * *
2달이 넘는 항해 끝에 플로리다를 거쳐 베라크루즈로 들어오는 스페인의 무적함대.
그들은 항구로 접근하지 않고 먼 곳에서 정박한 후 정찰에 나섰다.
"후안 사령관님, 바로 항구로 진격하는 건 힘들어 보입니다. 놈들이 베라크루즈로 들어가는 섬 곳곳에 포대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아무래도 상륙할 만한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가 좋겠느냐?"
"이 많은 함선이 이동하기에는 남쪽 석호로 가는 것이 좋긴 한데, 진입할 때 기습이라도 당한다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것보다 북쪽 모래 해안이 나을 듯합니다."
"이곳 말이냐?"
"네, 사령관님."
무적함대의 사령관에 임명된 후안은 지도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베라크루즈 북쪽 40km 지점.
해안으로 흘러나오는 퇴적물과 모래가 섞여 형성된 긴 바닷가가 있었다.
"상륙하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지만, 기습을 받더라도 대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그나저나 아파치 왕국에 대해서는 알아봤느냐?"
"네, 사령관님."
밤에 나룻배를 타고 몰래 상륙한 후 원주민을 잡아 물어본 아파치 왕국은 신비롭기만 했다.
제로니모라 불리는 왕이 통치하는 아파치 왕국은 북쪽에서 내려 온 원주민들이었다.
과달라하라를 서울이라 부르고 그곳을 왕국의 수도로 정했다는 아파치 왕국.
모든 백성에게 교육을 시킨다고 했다.
그것도 무상으로 말이다.
"어떻게 미개한 놈들이 그럴 수가 있지?"
"그건 저도 의문입니다. 시간을 주시면 다른 원주민을 잡아 알아보겠습니다."
잡아 온 원주민은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스페인군에게 잡힌 원주민은 틀라스칼텍인으로 떠돌이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베라크루즈를 점령한 문식이는 근처에 사는 원주민들을 모두 테노치티틀란으로 보냈다.
그곳에 살고 있던 틀락스칼텍 원주민들을 살리기 위해서였고, 농사를 짓는 데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문식이가 그러지 않았다면, 아파치 왕국민이 된 아즈텍인들이 그들을 살려두지 않았을 테다.
그만큼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들을 멸망시킨 틀락스칼텍인들을 증오했다.
"아니다. 빨리 끝내야만 하니 여기 바닷가로 상륙한 후 진격하도록 하자."
"네, 사령관님."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콩키스타도르라면 바다건 육지건 무적이다.
그러니 빨리 상륙해 베라크루즈를 점령하고 아파치 왕국의 수도인 서울로 진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스페인의 재정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후안은 서둘렀다.
빨리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조사한 후 황금과 은덩이를 스페인으로 보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 * *
효종 10년(1658) 8월 1일.
드디어 완공된 경복궁에서 효종이 조선제국을 선포하던 날.
후안이 이끄는 무적함대에서 콩키스타도르가 밤의 어둠을 이용해 바닷가로 상륙를 시도 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일식이가 씩 하니 입꼬리를 올렸다.
"잘 묻어 놓았겠지."
"염려 마십시오. 대장군. 몇 번이나 실험하고 검토했으니 잘 터질 겁니다."
"그래야지."
자신과 다르게 몸 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 제로니모.
하늘이 내려준 신의 손답게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냈다.
"비격진천뢰라 했나?"
"네, 대장군."
공식이 만큼 화학에 관해 알지 못하는 문식이지만, 비격진천뢰의 원리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만든 비격진천뢰를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하는 을식이는 기대감에 흥분하고 있었다.
"놈들이 상륙할 만한 바닷가에는 철질녀를 뿌려 놓고 비격진천뢰를 묻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수고했다. 이제 구경만 하면 되겠구나."
"네, 대장군."
혹시라도 도화선이 물에 젖을까 봐 속 빈 대나무에 도화선을 넣고 고무액으로 봉인했다.
비격진천뢰의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기만 한 일식이는 놈들이 빨리 상륙하기만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