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66화 (166/275)

< 166. 제로니모(4) >

문명 발전에 있어서 문자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문자가 없는 곳이 많았고, 있더라도 쓰고 읽는 것조차 배우기 힘들었다.

"아무리 바보라도 1주일만 배우면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글로 칠면조를 잡아 사육하는 법을 알려줬는데도 하지 못하다니, 미치겠습니다. 아바마마."

문식이의 둘째인 큰딸이 그동안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으며 문식이에게 하소연을 했다.

이제 15살이 된 문식이의 큰아들 일식이는 용맹한 전사로 잘 자랐다.

행동이 빠른 일식이는 제로니모의 명이 떨어지자, 말을 잘 타는 전사들을 이끌며 열 일을 해내고 있었다.

2,000m가 넘는 고원 위에 위치한 테노치티틀란.

1,500m가 넘는 곳에 있는 서울.

두 곳을 오가는 길목을 막고 누구든지 발견하면 죽이거나 잡아들였다.

두 도시의 남쪽에는 드넓은 저지대가 있지만, 정글이나 다름없는 울창하고 빽빽한 밀림이라 사람조차 다닐 수가 없었다.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으로 금괴를 보내는 항구인 아카폴코.

테노치티틀란에서 남쪽으로 300km 떨어져 있었지만, 그곳으로 가려면 수많은 산과 밀림을 지나야 한다.

앨버커키 공작의 명을 받고 금괴 운반에 나선 스페인 병사들.

일식이가 이끄는 정예 전사들에게 반항 한 번 못하고 몰살당했다.

산탄총처럼 총구 아래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재장전되는 쇠뇌의 공격에서 살아남았더라도 굉음과 함께 날아온 총탄은 판금 갑옷도 소용이 없었다.

엄청난 금괴를 포획한 일식이.

문식이로부터 큰 상을 받고 어린 나이에 장군에 임명됐다.

이를 보고 둘째 일화가 자신도 공을 세우겠다며 나섰다.

딸이라 꽃처럼 예쁘게 자라라고 이름을 지어줬건만, 일화는 말괄량이 그 자체였다.

농사는 모르지만, 야생 칠면조를 잡아 새끼를 얻고 키우는 방법을 봤던 일화.

그 내용을 한글로 적어 배포했다.

하지만 아파치 왕국 사람 중 그 뜻을 이해하는 이가 드물었다.

식식대며 하소연하는 일화를 보고 문식이가 입을 열었다.

"진정하거라. 네가 원하는 건 네가 만든 안내서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칠면조를 잘 키웠으면 하는 것 아니냐?"

"맞습니다. 아바마마. 왜 제가 쓴 글을 보고도 이해를 못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문식이는 일화가 쓴 칠면조를 기르는 안내서를 한참이나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나도 이해하기 힘들구나."

"네? 아바마마, 아바마마께서 이해할 수 없다니 제가 잘못한 것입니까?"

"그건 아닌데···, 내용이 너무 어렵구나. 이렇게 말고 다르게 하는 것은 어떻냐?"

"그게 무엇입니까? 빨리 알려주십시오. 아바마마."

어릴 때부터 별로 말이 없던 일식이와 달리 귀여운 일화가 고민하는데 그냥 있을 문식이가 아니었다.

군 복무 중 수도 없이 만들어 봤던 차트.

그때를 생각하며 일화가 만든 안내서를 정리했다.

"첫째, 이렇게 번호를 붙이면 순서대로 이해하기 쉽겠지?"

조상 대대로 서울 토박이였던 문식이는 서울 사투리까지 써가면서 친절하게 일화에게 차트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

"내용은 간단명료하게 하고, 그림까지 그려주면 설사 글을 모르더라도 알아먹을 수 있을 거다."

"맞습니다. 아바마마. 감사합니다."

이런 일로 문식이 또한 깨달은 게 있어서 모든 행동 지침서를 만들 때는 그림도 함께 그려 넣으라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문식이 또한 어린아이들을 모아 조선어와 한글, 알파벳, 숫자 등을 가르치는 학당을 아파치 왕국 곳곳에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이들은 문제없이 잘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든 원주민들이 문제였다.

젊다면 사냥을 하거나 전사로서 왕국을 지키는 일에 동원됐지만, 그러지 않는 노인들은 밥만 축내며 지냈다.

북미 원주민 문화 자체가 경험이 많은 노인을 공경했기에 그동안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한글이 보급되자 이젠 소용이 없어졌다.

어쩌다 보니 밥만 축내는 천덕꾸러기가 된 노인들.

일화가 다시 만든 안내서를 보고 나섰다.

조선말을 몰라도, 한글을 읽을 수 없어도, 노인들이 일화가 만든 안내서의 그림을 보고 칠면조 양식에 성공했다.

북미만 아니라 중미까지 널려있는 칠면조.

가슴살 부위는 탄수화물이 하나도 없고 25%의 단백질과 1%의 지방 그리고 나머지 74%가 물이다.

닭과 비교해서 크기조차 배나 큰 칠면조는 최상의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하지만 사방에 널려있는 칠면조를 잡는 건 쉽지 않았다.

시력과 청력이 뛰어나고 달리기도 잘하는데 시속 88.5km의 속도로 날기까지 하니 사냥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날짐승이었다.

북미에 사는 들칠면조(wild turkey).

중미에 사는 구슬칠면조(ocellated turkey).

맹금이라 할 정도로 성질이 더러워서 양식은 꿈도 꾸지 않았던 원주민들.

그런데 일화가 그림을 그려 넣은 양식법을 배포하자 빠르게 가축화되었다.

'역시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신의 손의 자손이라 그렇다'며 찬양하기 시작하는 원주민들.

무식이는 모른척하며 그것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아파치 왕국의 제로니모 왕가는 우상화되어갔다.

굳이 사냥하지 않아도 칠면조 덕분에 충분한 단백질을 공급받게 된 아파치 왕국의 전사들.

더 멀리, 더 넓게 이동하며 세력을 넓혔다.

마침내 뉴 스페인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카폴코 항구까지 점령했다.

"장하다. 일식 장군."

"폐하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이제 18살이 된 일식이.

형형한 눈빛과 단단한 근육으로 된 몸으로 그동안 말하고 싶었던 포부를 꺼냈다.

"폐하, 이제 간악한 스페인 놈들을 몰아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음···, 네가 해보겠느냐?"

"어명만 내려주십시오."

"허락하마!"

드디어 스페인 침략자들의 본거지 중 하나인 뉴 스페인의 수도 테노치티틀란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그동안 앨버커키 총독이 이끄는 스페인군과 몇 번이나 전투를 벌여왔다.

아무리 길목을 막고 감시한다고 해도 사람의 발길을 전부 막을 순 없으니 들통나 버린 거였다.

아파치 왕국을 알게 된 앨버커키 총독은 대로하며 즉시 공격을 명했다.

처음에는 콩키스타도르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던 스페인 병사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총과 대포까지 있다는 걸 안 앨버커키 총독은 협상을 시도했다.

아파치 왕국을 인정하지 않고 원주민 반란이라 말하며 진압에 나섰던 스페인 병사들이 보내는 족족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식이는 협상 자체를 거절했다.

'살아남으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모든 것을 두고 몸만 빠져나간다면 살려주겠다.'

문식이는 자신 있었다.

어느새 왕국민의 수는 백만 명에 육박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100km만 가면 콜리마 화산이 있어 유황을 얻기 쉬웠다.

거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100km를 더 가면 해안에 널려있는 게 구아노였다.

남미 칠레에 있는 것처럼 두껍게 쌓여 있는 건 아니지만, 흑색화약과 비료로 쓰기에 충분하고 넘치는 양이었다.

풍부한 수자원과 따뜻한 날씨.

거기에 천연 비료까지 투입되자 농사는 풍작의 연속이었고, 칠면조 양식이 늘어나면서 단백질 공급까지 넘쳐나자 소문을 듣고 모여드는 원주민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니 문식이가 스페인 놈들과 협상을 벌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또 한 가지.

'공식이가 눈치를 채야 하는데.'

스페인 놈들을 몰아내면 북유럽까지 점령했다는 조선에서 모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건 등유가 틀림없어.'

스페인 병사들을 치고 얻은 호롱(Oil Lamp)과 기름.

호롱이야 그렇다 쳐도 기름은 고래기름이 아니었다.

어릴 때 보았던 석유난로의 넣는 기름과 같았다.

'이것도 조선전력공사라는 곳에서 파는 거라고 했지.'

공식이가 유전까지 개발하고 원유까지 정제했다는 사실에 문식이는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북미 원주민들은 깎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뽑기까지 하다 보니 수염이 거의 자라지 않았다.

인디오라 말하는 중미나 남미 원주민들도 같았다.

문식이는 수염이 없는 매끈한 턱을 자주 매만졌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버릇이 되어 버렸다.

아무튼 문식이는 최후의 일전을 앞에 두고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는 것만 보았지 직접 해보지 않았기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피라미드 형태로 단단한 돌로 지어진 아파치 왕국의 왕궁.

앞에는 돌로 다져 만든 드넓은 광장이 있었고, 그곳에는 수많은 왕국민들이 모여 있었다.

둥근 달과 곳곳에 놓여있는 모닥불이 넘실거리며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용설란 수액을 농축해 발효시킨 풀케(Pulque)를 들이마신 문식이는 수십만 명이 모여 있는 광장을 내려다보며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 하늘의 뜻을 따르는 신의 손 제로니모.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나는 고하겠다."

제로니모가 두 손을 높이 올린 체 밤하늘을 바라보자.

-쉬이잉! 펑!

밤하늘 높이 치솟은 불꽃이 터지면서 붉은빛이 퍼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왕국민들은 두 손을 높이 들더니 그 자리에 엎드렸다.

"단군께서 보호하사 우리 아파치 왕국은 무한히 번성할 것이다."

또다시 '펑'하고 불꽃이 터지고 문식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해 말했다.

"······단군께서 곰과 같은 힘을 너희들에게 주셨다. 그러니 나가 싸워라! 무찔러라! 악랄한 스페인 놈들과 그들의 앞잡이 틀락스칼텍 놈들을 죽여라!"

"""와···!"""

무릎을 꿇은 채로 환호성을 지르는 왕국민들.

그들은 '제로니모'를 외치며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증류하면 데킬라가 되는 풀케를 마시며 춤과 노래를 부르며 혀를 이용해 환호성을 지르는 왕국민들을 보고 문식이는 씩 웃었다.

"나쁘지 않아. 좋아! 아주 좋아!"

왕자로 태어나진 못했지만, 왕이 된 문식이는 자신의 아파치 왕국을 더욱 키워나갈 생각이다.

술자리에서 누누이 말했던 왕이 되었기에.

멀리 있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공식이에게 질 수는 없기에.

공식이가 부러워할 만한 자신만의 왕국을 키우기로 다짐했다.

* * *

효종 9년(1657) 1월.

갈수록 추워지는 한반도지만, 조선 백성들은 따듯하게 지냈다.

"워메, 아직도 연탄난로를 쓰고 그려. 좋은 석유난로도 있는데 바꾸게나."

"이것도 좋은데 굳이 바꿀 필요 있남? 돈 낭비야. 돈 낭비."

"아니, 돈 많이 벌었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섭하지."

"그게···."

"왜? 정남이 때문이라고 둘러대려고?"

"그건 아니고."

"그럼 뭐 때문에 그러는데? 정남이야 이젠 부자가 되잖녀."

"그러긴 하지만 이놈이 사고를 쳤네. 사고를."

"뭐? 무슨 사고를 쳤기에 그러남?"

정남이 아버지 김 참봉은 있는 논밭을 팔아 정남이를 잘 키웠다.

정남이 또한 아버지의 기대대로 이연공과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던 정남이.

졸업하기도 전에 친구들과 창업한다고 설치면서 집에서 돈을 많이 가져다 썼다.

글재주가 없어 제일 낮은 벼슬인 참봉이었던 정남이 아버지.

세상이 바뀐 걸 알고 양반인데도 장사를 시작했다.

군기시(軍器寺) 참봉이었던 이력을 살려 논산에 있는 신병교육대에 납품하면서 떼돈을 번 김 참봉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 정남이의 앞날을 위해 아껴 쓰며 살았다.

정남이가 친구들과 뭔가를 개발한다고 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남이와 친구들은 실용적인 기물을 하나 만들어 냈다.

은동리에 있는 연구원들이 다양한 기구들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자동으로 모를 심는 기계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앙기(移秧機)였다.

삼발이 자동차를 개조해 만든 이앙기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규격화된 모판을 끼우고 주행만 하면 알아서 모를 심었다.

특허청에서 이앙기의 성능을 인정받아 3,000원이나 되는 상금을 받은 정남이.

아예 이앙기 공장을 짓고자 했다.

"그걸 자네가 왜 걱정하나? 조선은행 가면 알아서 다 해줄 건데."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서 해준다니."

"정남이가 만든 이앙기가 특허청의 인정을 받고 상금까지 받았잖녀."

"그랬지."

"그 정도면 조선은행에서 투자하겠다고 나섰을 건데···? 혹시 소식 못 들었남?"

"요즘 바쁘다고 연락도 없네."

"아마 조선은행과 협상하느라 그럴 거네. 그러니 연탄난로는 가다 버리고 석유난로로 바꾸게나. 이제 아들까지 부자가 될 건데 먼저 가면 섭하지."

"그게 사실인가?"

"정남이에게 연락해보게나."

정남이에게 연락이 된 정남이 아버지는 그날 바로 마을 잔치를 벌였다.

같은 마을에서 자라고 같이 군기시에서 일했던 정 참봉의 말이 사실이었던 거다.

연은 효종과 상의하여 특허청을 만들었다.

그런데 연이 만든 특허청은 특이했다.

'고생해서 개발해봐야 특허 낼 돈이 없거나 소송에 휘말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특허 따위는 필요 없어.'

고민 끝에 연은 새로운 특허제도를 생각해 냈다.

유럽반도에서 시작된 특허제도.

1474년 베니스 상인들이 자신들의 비법과 지식을 독점하기 위해 특허법을 만들었다.

1594년 갈릴레이는 자신이 만든 기술을 다른 사람들이 쓰는 것이 싫어 40년간 쓰지 못하도록 요청했다.

1623년 잉글랜드에서는 왕실 재정을 채우는 방법으로 '특허 등록료'를 받는 독점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이 방법들은 개발자나 공익을 위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뼈를 깎는 노력과 큰 비용을 들여 완성한 개발품.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독점하기 위해.

뛰어다니다 보면 개발자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

특허란 게 힘 있는 자들만의 전유물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연은 효종과 상의 끝에 나라에서 책임지는 특허법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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