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64화 (164/275)

< 164. 제로니모(2) >

제로니모라 불러달라는 고야틀레이.

그렇게 불러 달라는 이유가 있었다.

'틀림없어! 공식이도 넘어온 게···.'

문식이는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태어났다는 걸 알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엔 선사 시대에서 태어난 줄만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들리는 말은 생전 처음 듣는 것들이었다.

눈에 초점이 맞춰질수록 보이는 건 돌로 만든 도구와 무기였다.

그런 상황을 인지했기에 문식이는 모든 걸 포기했다.

그런데 간간이 보이는 청동기와 철기.

아기 몸이라 움직일 순 없었지만, 생각이 많아졌다.

'여긴 도대체 어디야?'

점점 뚜렷해진 눈의 초점.

그러면서 알 수 있었다.

'인디언들이잖아.'

그것도 아주 유명한 아파치족의 일파였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코만치족과 유트족에게 쫓겨 남으로 남으로 이주하는 도중 문식이, 아니 고야틀레이는 부모를 잃었다.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족 단위가 아니라 부족 단위였으니···.'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부족이라도 떨어져 살고 교역이 없다면 서로 약탈하며 살았던 북미 원주민들.

성인 남자는 무척이나 귀했기에 전사의 후손인 고야틀레이는 부족민의 도움으로 무럭무럭 자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미개하기 짝이 없는, 작다 못해 쪼그라든 부족사회.

그런 사회에서 문식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세상과 달관하며 지내던 문식이.

그래도 할 일은 하고 살았다.

그건 바로 도자기를 굽는 일이었다.

한국사 선생님이었던 문식이는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도 잘 알았고, 도자기를 만드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고운 황토를 골라 모아 모양을 만들고, 나무를 태우고 난 후 남은 재로 유약을 만들어 구어 낸 황토 도자기.

부족민들은 그런 기물을 만들어 내는 어린 문식이를 보고 '신의 손'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못했다.

살기조차 귀찮고 만사가 따분해진 문식이가 혼자만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황토 도자기를 만드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늘에 누워 하품이나 하면서 지내는 문식이의 이름은 어느새 고야틀레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삶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고야틀레이가 만든 황토 도자기는 비싼 취급을 받으며 다른 부족과 교역하는 데 쓰였는데, 누군가 그것을 플라스틱 물통으로 바꿔 온 것이다.

'이거 어디서 났지?'

'저···어, 남쪽!'

수소문 끝에 알아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벌써 스페인이 이곳까지 진출했다고? 그럼 신석기 시대가 아니잖아.'

어림잡아 계산해봐도 16세기 중반은 지난 것 같았다.

'그랬구나···!'

신석기 시대라고 보기에는 드물지만, 청동기와 철기가 보였기에 혼란이 왔었는데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 하여도 플라스틱 물통이라니.

문식이는 물통을 자세히 살폈다.

'이 번개 표시는 뭐지···?'

반투명한 플라스틱 물통에 그려진 '번개' 표시.

열심히 만든 황토 도자기를 이용해 교역을 통하여 알아본 봐.

'조선전력공사에서 만든 제품이라고···?'

그래서 유추해낸 생각.

'틀림없어, 공식이도 함께 넘어 온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말이 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가 조선이라고 했지.'

공식이가 아니고서야 조선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같은 뿌리를 가진 부족이라도 떨어져 사는 부족이라면 언어가 많이 다른 북미 원주민들.

그들과 전혀 다른 멕시코 지역에 사는 중미 원주민들.

이들의 입에서 '조선'이란 발음이 또렷했다.

게 중에는 '조선전력공사'라는 말을 완벽하게 하는 자도 있었다.

물론 그자는 스페인어도 할 줄 알았다.

'펠리페 4세가 통치하고 있다고? 그럼 17세기잖아.'

선사 시대인 줄만 알았던 세상이 17세기라니.

게다가 조선에서 만든 물품은 모두 조선전력공사에서 생산한다고 했다.

'전기만 있으면 세상을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는데···.'

언제나 함께했던 둘만의 술자리.

그 술자리에서 떠들던 공식이의 말이 생각나자 문식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후로 고야틀레이의 생활이 달라졌다.

자신을 '제로니모'라 불러 달라며 온종일 부족 주변을 돌아다녔다.

'19세기 사람인 제로니모란 이름을 들으면 반응이 있겠지.'

역사를 잘 모르는 공식이라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제로니모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에 공식이가 들으면 바로 흥미를 느낄 거로 생각했다.

또한 황토 도자기도 많이 만들었다.

도자기 밑면에 '문식'이라는 한글도 적어 놓았다.

'이러면 난 줄 알 거야.'

하지만 문식이의 바램은 다르게 나타났다.

촘촘히 바른 유약으로 인해 긁히지도 않는 황토 도자기.

단단하고 쓸모 있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 부족뿐만 아니라 남쪽 원주민들도 욕심을 냈다.

수시로 문식이가 사는 부족을 넘보는 다른 부족들.

그들을 제압하기로 결심한 문식이는 고로를 만들었다.

강철은 아니더라도 철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주변에는 자원이 넘쳐났다.

대체 역사 광이었던 문식이는 철광석과 역청탄으로 선철(銑鐵, Pig Iron)을 생산해 낼 수 있었다.

그걸 담금질해서 대검까지 만들어 냈다.

주물로 쇠뇌에 쓸 화살촉을 만들고, 담금질로 대검까지 만들게 된 서부 아파치족.

제로니모라 불러달라는 고야틀레이의 지휘 아래 주변 부족들을 정복해 나갔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들은 흥미로웠다.

'아직 조선과 스페인은 교류가 없다고 했지.'

자신을 인디오라 소개하는 멕시코 지역에서 온 원주민.

처음에 그는 황토 도자기 때문에 문식이가 사는 부족을 찾아왔지만, 문식이 부족의 세력이 커지자 아예 문식이 부족민이 되어 버렸다.

그를 통해 알게 된 유럽의 정세.

동쪽에서 나타난 조선군이 유럽 북쪽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거다.

북미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부르고,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는 중남미 원주민을 인디오라 부른다는 걸 아는 문식이는 계획을 세웠다.

'언제 올지도 모를 공식이를 기다리지만은 않을 거다.'

문식이는 충분히 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다.

'대포는 힘들지 몰라도 강철 머스킷 정도는 내가 만들 수 있어.'

200명도 안 되는 부족민을 1천 명 이상 늘린 문식이는 왕이 되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북미 원주민 사회는 추장을 중심으로 한 부족사회가 아니었다.

지식이 많은 노인이나 능력이 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움직이는 고대 씨족 사회였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지.'

고대 그리스로부터 넘어왔다는 미국의 민주주의.

어찌 보면 북미 원주민 사회를 모방한 것이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로쿼이 연방의 영향을 받았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

대장장이이자 농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피뢰침과 다초점 렌즈를 만든 발명가였다.

프랭클린은 오랫동안 이로쿼이 연방에 머물면서 북미 원주민 사회를 배웠고, 그 영향을 받아 미국 헌법의 뼈대와 '미국독립선언문'을 작성하는데 기여했다는 말이 있다.

수많은 명언을 남겼던 프랭클린을 좋아했던 문식이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온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북미 원주민인 인디언 사회를 본뜬 것으로 봤다.

아무튼 계속 북으로 밀고 들어오는 스페인 침략자들을 대항하기 위해 문식이는 생각을 정리했다.

'민주주의가 아닌 왕정 체제를 갖추어야 해. 그래야만 힘을 모을 수 있어.'

18세기라면 모르지만 17세기에 이곳까지 올 유럽인들은 스페인 침략자들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문식이.

크게 두 가지로 부족민들을 나누었다.

"너희들은 용맹하니 사냥과 전쟁을, 너희는 농사를 맡아라."

거칠고 험한 산악지대인 세도나를 중심으로 발전해가는 문식이가 이끄는 서부 아파치족.

멀리 떨어져 사는 부족까지 하나씩 하나씩 복속해 나갔다.

기다란 강철 검과 창.

5발까지 장착되는 쇠뇌로 무장된 서부 아파치족을 당할 부족은 없었다.

아직도 흑요석을 갈아 만든 창과 활을 쓰는 부족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게임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복속된 부족 중.

농사를 지을 줄 아는 나바호족에게는 옥수수 농사를 짓게 했다.

치리카와, 메스칼레로, 지카릴라, 리판, 카이오와 부족들도 복속한 후 각자 잘하는 일을 시켰다.

어느새 1만 명이 넘어선 서부 아파치족.

문식이는 정식으로 아파치 왕국을 세우고 왕 위에 올랐다.

'제로니모'란 말은 '하늘의 뜻을 받드는 자'로 인식되었다.

"나 제로니모는 하늘의 뜻을 받아 남쪽에서 노예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구해 주려 한다."

북미 인디언 들고 중남미 인디오들이 인종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문식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스페인의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멕시코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수경 농법을 잊지 않고 알고 있을 거야.'

중미 아스텍 사람들이 했다는 수경 농법 치남빠.

농사라고는 옥수수만 재배할 줄 아는 북미 원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농사 방법이었다.

'인구를 늘리려면 그곳을 정복하는 수밖에 없어.'

북미 남서부 지역의 강자로 떠오른 아파치 왕국이었지만, 모든 게 부족했다.

그중 제일 문제가 되는 건 부족민의 수였다.

'복속하여 인구를 늘리더라도 먹을 것이 부족하면 답이 없지.'

그러자면 열병기가 필요했다.

강철 검과 창, 쇠뇌가 있다지만, 대포를 앞세운 스페인의 침략자들을 상대할 순 없는 일.

문식이는 부족에서 최고의 전사들만 이끌고 주변을 정찰했다.

'역시 신이 내린 땅이군.'

북미 동부 같은 경우 북쪽에는 철광석과 석탄 같은 광물 자원이 풍부하지만,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별로 없었다.

미시시피강을 끼고 있는 남부는 농사짓기에는 최적이지만, 광물 자원이 없었다.

따라서 두 지역을 동시에 석권(席卷)하지 않으면 발전이 힘들다.

그런데 세도나 근처에는 다양한 광물이 넘쳐났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강변은 농사를 짓을 만 했다.

하지만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식이는 스페인 침략자들이 동쪽 산타페를 중심으로 동부로 진출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아파치족을 이끌고 남하했다.

어쩔 수 없었다.

세도나와 나바호족이 살던 곳은 모든 광물이 넘쳐나는 곳이었지만, 수렵과 채집이 주였던 아파치 부족민들을 옥수수 농사로만 배를 채울 순 없었기 때문이다.

최종 목적지를 멕시코 동부 해안 베라크루스로 잡은 문식이는 투손(Tucson)을 1차 정착지로 삼고 개발에 들어갔다.

몰래 훔쳐 오거나 교역으로 가져온 감자와 가축들을 기르면서 힘을 길렀다.

그러면서 종두법을 연구했다.

'천연두로 죽을 사람은 다 죽었다고 하지만, 새로 태어난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

온갖 세균을 품고 온 유럽인들 때문에 북미 원주민들이 무수히 죽어갔다.

그중에서도 남서부에 살고 있던 서부 아파치 부족민들은 스페인의 노예로 전락한 인디오들과 접촉하면서 많이 죽어버렸다.

제로니모가 된 문식이 또한 천연두에 걸렸지만, 큰 문제 없이 살아남았다.

선사 시대라 생각했던 어린 시절.

삶에 의욕도 낙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천연두에 걸려 죽은 사람의 몸에서 딱지를 떼어내 가루로 만들어 물에 녹이고 지푸라기에 묻혀 콧구멍에 쉬셔 넣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미련이 없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조선 시대 가장 많이 썼던 인두법인 수묘법이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그 후로 부족민들은 고야틀레이가 했던 수묘법을 따라 했다.

하지만 죽는 이가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안전한 종두법을 연구하려고 비싼 소를 사와 키우고 이었다.

점점 안정화되어가는 아파치 왕국.

그렇다고 당장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는 중미로 쳐들어갈 순 없었다.

'대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당장 스페인 놈들을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문식이는 하나씩 준비해 나가기로 했다.

다섯 개의 작은 산맥에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강줄기가 만나는 투손에서 농사와 가축을 기르면서 힘을 키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화약과 대포, 총을 개발해 나갔다.

이미 냉병기로는 상대할 적이 없을 정도로 앞서나간 아파치 왕국이지만, 열병기가 없다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사람을 해칠만한 맹수도 없고 기를 가축도 없는 북미 대륙.

새는 많았다.

21세기와 달리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투손에서 새의 분비물을 수거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더 좋은 곳이 있었다.

투손에서 200여 km 떨어진 서쪽 해안에는 인광석(燐鑛石, Phosphate Rock)이라 말하는 구아노가 흔했다.

'이 구아노에 황과 숯을 섞으면 흑색 화약이 된다고 했지.'

공식이처럼 화약을 어떻게 만드는지 자세히 모르는 문식이지만, 흑색 화약 정도는 만들 줄 알았다.

수많은 대체 역사 소설을 보고 매주 술자리에서 공식이와 안주 삼아 토론을 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수도 없이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짐바브웨처럼 청동기를 건너뛰고 철기부터 시작한 아파치 왕국.

철판을 강철봉에 두르고 두들겨 화승총은 쉽게 만들었지만, 대포는 난관이었다.

하지만 문식이는 서두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청동 대포부터 만들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인구가 늘어나면서 인력도 늘어나자 고로를 키웠다.

강가에 물레방아를 세우고 바람을 집어넣는 통풍구도 크게 만들었다.

두드려 패는 방법 말고는 주물조차 용이하지 않은 선철을 연철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고로에서 흘러나온 선철에 숯을 던져 넣어 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빌어먹을 새끼. 졸라 쉽다고 하더니 쉽기는···, 개뿔이다!"

열받은 문식이는 긴 쇠막대로 끈적하게 흐르는 선철을 휘저었다.

그러자 푸른 불꽃이 발생하면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얻게 된 연철은 쓰임새가 많았다.

다양한 모양으로 틀을 만들어 주조한다고 해도 되고, 쉽게 휘어지기에 두드려 총을 만들기도 쉬웠다.

하지만 문제가 금방 발생했다.

탄소가 적게 함유된 연철은 쉽게 녹이 슬었고, 강도가 약해 쉽게 휘어졌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문식이.

선철에 숯을 넣는 양과 휘젓는 시간을 조절해 강철을 얻어 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강철 대포.

조선에서 브리튼 왕국에 넘겨준 것보다 볼품없고 약했지만, 스페인 침략자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니들은 다 죽었어!"

새로 개발해 낸 강철 대포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문식이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대포를 만들기로 결심하면서부터 시작된 철과의 싸움.

1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

그것도 청동 대포가 아닌 강철 대포로 말이다.

연보다 10여 년 먼저 태어난 고야틀레이.

이제는 아파치족의 제로니모가 된 문식이.

부족민들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강철 머스킷과 강철 대포를 앞세우고 진격하는 아파치 부족을 막을 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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