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제로니모(1) >
21세기와 달리 연이 있는 17세기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높았고 자존심이 대단했다.
"과장님, 앞으로 상사 일이 아닌 개인적인 일로 저를 또 부르시면 같이 일 못 합니다."
"찬식아, 그게 무슨 말이야? 같이 일 못 한다니. 그만두겠다는 소리야?"
"네, 과장님. 그러니 사적인 일로 저를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평소에도 남을 돕기 좋아하던 찬식이라 소 과장은 집안일이 있을 때마다 찬식이를 불러 일을 시켰다.
물론 일이 끝나면 맛있는 음식도 대접했다.
"너 전에 다누타 도와주면서 남을 돕는 일은 기쁨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그거야···."
소 과장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찬식이를 흘려봤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실수했구나. 앞으로 내 사적인 일로 너를 부르지 않겠다. 그러니 그만둔다는 말은 꺼내지도 말아라."
"고맙습니다. 과장님."
"아니다. 내가 미안하구나."
소 과장은 막 부려 먹었던 찬식이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마땅히 믿고 일을 맡길 사람이 없고, 남에게 봉사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찬식이를 부른 거였는데 오해였다.
찬식이는 항상 밝게 웃으며 생글거리는 다누타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였다.
아무튼 당장 일을 그만둬도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조선이기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일을 시키면 바로 그만두었다.
상사가 폭언을 해도 그만뒀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하거나 실수한 것 가지고 그만둘 순 없었다.
어느새 신용이 자리 잡은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해진 조선의 영토.
도로가 깔리고, 철도가 완공되면서 백성들의 이동도 많아졌다.
"쩌기, 남쪽 진주에서 왔다고?"
"네, 그렇씹니더."
"그런데 추천장이···."
"꼭 추천장이 있어야 합니꺼?"
"전화로 연락이 안 된다면 추천장이라도 있어야지. 그렇지 않나? 그게 없으면 내가 자네를 어찌 믿나?"
"그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음···, 그렇다면 일단 몸 쓰는 일부터 해보게. 그런 다음 그곳에서 추천장을 받아 오면 될 것 같네."
꿈을 품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온 사람들.
초기에는 조선전력공사와 조선은행의 도움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는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미 마을을 구성할 만큼 필요한 가게들과 농장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 멀리 새로운 마을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연은 서역의 안정과 북미 신대륙 진출 문제로 소양에 머물고 있지만, 하루도 편히 쉬는 날이 없었다.
개인 통화가 가능한 전화까지 개통되자 수시로 한양과 은동리에 연락을 취했다.
그런데 이날은 뜻밖에도 사파비제국 땅을 관리하고 있는 조선전력공사 경비대 제2사단장 신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파비 쪽으로는 안 가려고 한다고?"
-네, 사장님. 아무래도 이곳도 철도를 놓아야겠습니다. 백성들이 꺼리니 어쩔 수 없습니다. 날씨도 엉망인데 한양까지 쉬게 갈 수 없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음···."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사파비제국이 있던 중역 남부.
그곳은 덥기도 하지만 추웠다.
여름에는 40도 높게 올라가는 날이 자주 있었고, 겨울에는 영하 10도 이하로도 자주 떨어졌다.
거기다 강변 말고는 온통 황무지라 모래 먼지를 가득 품은 바람은 주거 형태까지도 독특하게 만들었다.
돌과 벽돌을 쌓아 만든 집은 창문이 너무 작았다.
골목길은 삼발이 자동차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위생이었다.
땅을 10m 이상 깊이 파서 오물을 처리하기에 더울 때도 악취가 나지 않았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은 건조한 지역이라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깊게 파도 무너지지 않았기에 오래전부터 그렇게 화장실을 만들고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지하수를 안심하고 쓸 수 없었다.
원래부터 살았던 원주민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치안대로 온 일본인들은 지하수를 마시고 배탈이 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질에 취약한 일본인들.
겁이 났는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문제점을 파악하고 즉시 경비대에 보고했다.
일본인들과 다르게 이질 따위는 화장실 한번 갔다 오면 해결되는 경비대원들.
심하면 설파제 한 알만 먹어도 해결됐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인 치안대 전원이 드러눕게 되자 상황이 심각해졌다.
'화장실을 막으라고 할 수는 없고 대신 물을 끌어오자.'
대원들은 마을과 떨어진 곳에 지하수를 파고 그곳에 취수탑을 만들고 수도를 놓았다.
안전한 식수 공급을 끝낸 대원들.
그동안 쓰고 있던 지하수는 모두 메꾸라고 했다.
원주민들은 괜찮다고 했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마을 광장을 중심으로 구역을 나눠 분수처럼 공급되는 식수.
그 물이 안전하고 좋다는 말이 퍼지자, 낮이건 밤이건 물을 받아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새치기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그것도 아이 한 명을 세워 놓고 일가친척까지 모두 끼어드는 게 아닌가.
지켜보던 일본인 치안대원.
즉시 시정을 명령했지만, 듣지 않았다.
원래 이곳의 풍습이라며 대들었다.
조선에서 교육을 받고 이곳에 온 일본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거다.
감히 관청의 허락을 받고 치안을 관리하는 이에게 저항하다니.
일본에서는 당장 목이 잘릴 일이었다.
새치기한 일가족 전체가 우르르 달려들며 항의하자 치안대원은 가지고 다니던 긴 일본도를 꺼내 들고 휘둘렀다.
자신보다 두 배나 더 큰 덩치를 가진 사람들이 달려들자 겁이 났던 거였다.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그 일로 원주민들과 일본인 치안대 사이에 감정이 나빠졌다.
조선인 경비대원들에게는 항상 공손하기만 했던 원주민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일본인 치안대원들을 무시했다.
"그래서 육모 방망이를 지급했다고?"
-네, 사장님.
"음···, 잘했다. 공권력에 대항하는 자들은 백성이 아니다. 그러니 패서라도 공권력의 무서움을 보여줘야 한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즉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잘했다면 몰라도 새치기하다 걸렸는데 항의하다니, 절대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게 또 문제가 되었다.
너무나 충성을 다하는 일본인 치안대원들.
경비대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인정사정없이 두드려 팼다.
여인이라도 달려들면 봐주지 않았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흐음···. 알았다. 생각해 보고 다시 연락하마."
-네 사장님.
신수와 대화를 마친 연은 고민에 빠졌다.
한반도에 살았던 조선인 같으면 알아서 융통성 있게 대처했을 건데, 시키는 것만 잘하는 일본인이라 그런지 대처가 과격했다.
"적당이라는 걸 모르는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연이 중얼거리는 말에 태자비가 궁금한지 물었다.
그래서 연은 사파비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자세히 설명해줬다.
다른 곳과 다르게 종교인이 권력까지 쥐고 있던 곳이라 사파비제국을 흡수하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사고가 터지자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제길,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세금도 면해주었는데···.'
인두세를 감면해주는 것만으로도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했건만, 한 때뿐이었다.
모든 종교가 세상에 맞춰 조금이라도 변해갔지만, 21세기에 되려 후퇴해버린 곳.
그런 곳이란 걸 잘 알고 있기에 연은 신중했지만,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차를 마시며 연을 유심히 바라보던 태자비가 입을 열었다.
"전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근본을 따져 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본이라···?"
"네, 전하. 조선의 땅이 된 곳인데 조선에서 임명한 관리들을 무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관리가 아니라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 아닙니까?"
태자비의 말을 들은 연은 머릿속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가만! 이건 종교와 상관없는 문제잖아?'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나 그곳에 사는 원주민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군.'
제정일치(祭政一致) 국가였던 사파비제국.
다른 곳도 다 그렇지만, 나라에서 하는 일은 수탈뿐이었다.
그런데 조선군이 나타나 지배하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세금은 10년 동안 면해주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보살폈다.
그러니 조선군이 무서운 줄 알면서도 따랐다.
하지만 일본인 치안대는 달랐다.
원주민들이 보기에는 그들은 세리(稅吏)였다.
뭐 하나 도와주는 것 없이 잘못을 지적하고 트집을 잡는 것이 세금을 뜯어 가는 세리처럼 보였던 거였다.
아니 세리를 따라다니며 못된 짓을 하는 해결사로 봤다.
또한 만만했다.
치안대원은 조선군과 달리 나라에서 녹을 먹는 정식 병사가 아니라 관청에서 임시로 고용한 사람이다.
그것도 덩치가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어서 무시해도 될 만한.
아무튼 원주민들은 누구라도 화풀이 대상이 있었으면 했는데, 그 대상으로 일본인 치안대원들을 삼은 것 같았다.
연은 태자비와 의견을 나눈 후 다시 신수에게 연락했다.
"치안대를 해산하고 전부 포졸로 임명해라."
-네, 그럼 그들에게 녹을 줘야 하는데···.
"그건 폐하께 내가 설명하겠다. 정 안되면 우리가 지원해주면 되고."
-하지만 포졸이면 우리가 관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조선군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 아니냐?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것이니 그리 알고 진행하도록 해라."
-네, 사장님.
"그리고 행동에 관한 안내서를 보강하고 그걸 숙지하도록 시키고."
"그리하겠습니다. 사장님."
조선인과 다른 일본인.
융통성이 없는 그들에게 있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안내서는 꼭 필요했다.
'조선인이 이상한 거지 일본인이 이상한 게 아니야.'
21세기에 최첨단통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 봤던 연이기에 한국인만이 가진 특성을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나라 사람도 시키지 않는 일을 알아서 하는 사람은 없었지.'
오직 한국인만이 뭐든 알아서 했다.
물론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특히 지금같이 무한정 확장하고 있는 시기에는 그런 사람이 더욱 필요했다.
아무튼 연은 신수와 통화를 끝낸 후 바로 효종에게 연락했다.
연의 말을 듣고 난 효종은 사파비 지역만 아니라 동역이라 말하는 만반도를 빼고 다른 지역은 '특별 행정 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고맙긴, 네가 생각이 있으니 그리 요구했겠지. 그나저나 내 선물은 마음에 드느냐?
"네, 폐하."
-허허 고놈. 좋은가 보구나. 잘해주도록 하고 희소식을 기다리마.
무엇이 그리 좋은지 껄껄 웃으며 전화를 끊는 효종과 통화를 마친 연은 소양으로 주변에 있는 관리들을 불러들였다.
서역까지 관청이 들어섰지만, 그렇다고 전부 제대로 관리하기는 힘들었다.
거의 출장 사무소나 연락사무소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영토는 너무나 넓었지만, 그예 비해 인구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예맥대륙이라 말하는 유라시아의 북쪽 지역 전체를 차지한 조선.
그런 조선을 만든 연과 왕인 효종은 안정된 행정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북미 대륙 남서부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 * *
붉은 핏빛의 콜로라도강을 따라 형성된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대지와 산들.
그리고 곳곳에 자리 잡은 우거진 숲들.
황토처럼 붉은빛을 띤 태양이 떠오를 때 태어난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제로니모'였다.
원래 이름은 '하품하는 자'를 뜻하는 고야틀레이(Goyathlay)였지만,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제로니모라 불러달라 했다.
태어난 후 다른 아이들과 달리 뭐든 심심해하던 아이.
그래서인지 지붕이나 언덕 위에 걸터앉아 세상을 바라보며 하품하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고야틀레이가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붉은 대지와 산으로 이루어진 곳.
나바호족과 아파치족이 인디언들의 성지라 말하는 곳.
바로 세도나란 곳이다.
그러기에 철광석이 풍부했다.
또한 근처에서 역청탄도 구할 수 있었다.
그것도 노천에서.
고야틀레이는 남들이 활을 쏘고 사냥기술을 배울 때 혼자서 흙을 가지고 놀았다.
주변에서 '쓸모없는 자'라 부르며 놀렸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날마다 흙을 가지고 도자기 같은 것을 만들었다.
어쩐 날은 온통 시껌둥이가 되어서 나타난 적도 있었다.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혼자서 놀던 아이.
외톨이였지만, 그 아이는 괘의치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그러던 어느 날.
성인처럼 체격이 건장해진 고야틀레이는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 곳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러면서 크게 외쳤다.
"나, 제로니모를 추앙(推仰)하라!"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
그들의 눈에 번쩍이며 빛나는 대검이 보였다.
놀라 고야틀레이를 바라보며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
그들에게 고야틀레이는 다시 뭔가를 꺼내더니 똑같이 외쳤다.
"나, 제로니모를 추앙(推仰)하라! 그리하면 너희들에게 이것을 하사(下賜)하겠다."
이번에는 활이었다.
검은 버팔로 뿔을 깎아 이어붙여 만든 활.
작지만 단단하고 강해 보였지만 뭔가 이상했다.
다가온 마을 사람에게 대검을 건네주고 활에 화살을 메긴 고야틀레이.
멀리 떨어진 나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시윙!
손잡이가 달린 작은 활에서 발사된 화살은 거침없이 나무를 뚫고 박혔다.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
"제로니모!"
"너를 추앙한다!"
"제로니모! 너를 따르겠다!"
"나는 제로니모 너와 함께 하겠다!"
드디어 고야틀레이는 '쓸모없는 자'에서 '제로니모'로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