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뜻밖의 손님(3) >
연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야코프를 잡는 일이다.
전생의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난 사람이 혼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닌 것 같았다.
'틀림없어. 놈도 나와 같은 자일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대량으로 머스킷을 제조할 시설을 급조할 수 없을 테니까.
'머스킷을 판 돈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은 다음 배를 사서 북미로 도망간 걸 보면 미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맞아.'
연은 불타는 금요일에 문식이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널 때를 떠 올렸다.
'차량의 불빛은 아니었어···.'
몇 번이나 다시 떠 올려봤지만, 문식이를 향한 불빛은 도로를 따라오지 않았다.
마치 비행기가 착륙하듯 멀리 허공에서 내려왔다.
'그 의미는 문식이 또한 함께 넘어왔을 수도 있다는 거지.'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
처음에는 그런 줄만 알았고,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야코프의 행적을 좇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가 남긴 흔적에서 만들다 만 발전기가 발견되었다.
'놈을 잡아서 물어보면 알겠지.'
야코프의 행적을 찾는데 조서원의 역량을 최대로 활용하고 있지만, 쉽지 않았다.
신대륙으로 떠났다는 야코프.
칼 10세는 그와 연락이 닿는 자가 뉴스웨덴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그런 자는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가 바로 그자라니.
'내가 추적할 줄 알고 있었던 거군.'
크리스티나 요새를 파괴하고 뉴스웨덴을 점령한 뉴네덜란드 총독 페터르 스타위베산트.
폭수에 의해 감금되자 위기를 느꼈는지 입을 열고 협상을 원했다.
'없던 일로 하고 풀어주면 야코프의 행방을 알려주겠다니···.'
연은 야코프를 추적하면서 북미 개척까지 생각했기에 3개나 되는 기병 연대를 투입했다.
일반병이라 해도 사단 규모의 병력이다.
그런데 1만 명 가까운 기병대를 투입하자 얼마 되지 않아 주변에 소문이 쫙 퍼졌다.
그 소문을 듣고 두려웠던 스타위베산트 총독은 뉴스웨덴을 방문했다.
믿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스타위베산트 총독은 그런 보완책이 있었기에 당당하게 자신이 망쳐 놓은 뉴스웨덴을 방문했던 거다.
그것도 6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이끌고.
'그러게 왜 적을 그리 많이 만들어.'
1492년부터 시작된 유럽의 아메리카 침략.
그 선두에 선 나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그 후로 100년 이상 오직 스페인만 아메리카에서 꿀을 빨았다.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영토 문제로 싸우고 있는 두 가톨릭 국가를 중재하려 나섰지만, 욕심 많은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불복하면서 서경 46도 지점으로 기준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 말하는 이 조약으로 포르투갈은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인도산 후추를 독점할 수 있었다.
그와 달리 스페인은 서쪽 아메리카 대륙에 집중했다.
원주민들을 죽이고 몰살시키고 빼앗고 노예로 부리면서 황금과 은덩이를 쓸어 담았다.
하지만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이걸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종교 개혁이 시작되지 않아 교황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말고는 대양을 건너 진출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이 생기자 그냥 있지 않았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로 교황의 힘이 약해지자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하고 아메리카 진출을 시도했다.
네덜란드 또한 동참했다.
이제 인구가 150만 명이 넘어선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비하면 국력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뉴욕 동쪽에 자리 잡은 뉴잉글랜드 식민지가 뉴네덜란드를 침범하면서 남하하고 있지만, 밀릴 수밖에 없었다.
뉴잉글랜드의 남하에 대항하지 못한 뉴네덜란드.
그들 또한 남하하면서 인디언들과 마찰이 극심했다.
결국 사방에 적을 두게 된 스타위베산트 총독은 이동할 때마다 대병력을 끌고 다녔다.
그로 인해 뉴네덜란드를 방어할 수 있는 병력이 사라져 버렸다.
'뉴네덜란드는 그냥 가서 쫓아내면 되겠군.'
남쪽 뉴스웨덴과 북동쪽 뉴잉글랜드 사이에 낀 뉴네덜란드.
지키는 병력도 없기에 가서 통보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일단 그자를 만나 봐야겠다. 이곳으로 데리고 오라 해라."
"네, 전하. 바로 조치 하겠습니다."
연은 민삼이가 나가자 서둘러 태자비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소양 시립교향악단에서 태자비를 위해 강변 연주회를 열기로 한 날이다.
고급스럽지만 단정한 옷차림으로 태자비를 만난 연.
두 눈이 저절로 커졌다.
"서역 옷이 이리 잘 어울리다니, 정말 아름답군요."
"고맙습니다. 전하. 그런데 이런 차림으로 나서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당신을 위해 이곳 재단사들이 준비한 옷이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오. 모두 다 조선의 백성들 아니오."
"그리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둘둘 싸매는 조선 궁중 옷과 달리 서양의 옷은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때문에 태자비는 걱정됐다.
그런데 달처럼 휘어진 태자의 눈을 보니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
바벨 성 북쪽.
소양강 변에 교향악단이 연주할 수 있는 곳과 가수들이 노래하고 춤을 출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휘어진 강변을 따라 원형 계단식으로 지어진 객석.
연과 태자비가 나타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천세! 천세! 천천세!"
연이 이런 것 좀 하지 말라고 누차(屢次)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되려 재미를 붙였는지 더 큰 소리로 반복했다.
조선의 판소리와 서양의 오페라가 섞인 가극.
끊이지 않고 노래로만 이야기가 진행됐다.
연은 공연을 보는 내내 불편했다.
'이거 미화가 너무 심한데···.'
조선말로 부르는 노래.
가사 내용이 민망할 정도였다.
-조선의 태자 연은 하늘의 뜻을 받아 간악한 왕과 귀족들을 물리치고 세상을 이롭게 하셨다.
-약탈과 방화, 살인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에 평화가 찾아왔다.
-태자 연이야 말로······.
누가 가사를 썼는지 모르지만, 상상력이 대단했다.
조선을 침략했던 루스 차르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파비제국, 무굴제국.
그들을 물리치고 추위와 배고픔에서 고통받고 있던 서역 사람들을 구해준 영웅이 조선의 태자 연이라는 찬양 일색의 가사 내용은 들을수록 간지러웠다.
어서 빨리 공연이 끝나기만 기다리던 연에게 민삼이가 다가왔다.
"전하, 즉시 가보셔야겠습니다."
"응? 무슨 일이냐?"
"중요한 정보를 가진 자를 누군가 데리고 왔습니다."
"급한 일이냐?"
"그게, ···원에서 데려온 자입니다. 그자의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그래? 알았다."
연은 태자비에게 양해를 구한 후 바로 바벨 성으로 돌아갔다.
온몸에 핏자국이 가득한 사람이 연을 보더니, 몸을 일으켜 힘겹게 말을 꺼냈다.
"전하,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대는···?"
"네, 맞습니다. 전하. 일전에 한양에서 뵌 적이 있었지요. 그때보다 더욱 늠름해지셨습니다."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요?"
연은 오스만제국의 사신이었던 자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제국의 사신과 달리 당당했던 오스만제국의 사신.
그는 메흐메트 4세의 특명을 받아 소양까지 오는 길에 수많은 암살자를 만났다.
그 와중에 자신을 수행하던 병사들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파디샤가 내린 명령을 완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의 목숨을 끈질기게 이어 붙인 것이다.
다행히도 조서원의 요원에 의해 발견된 오스만제국의 사신.
삼엄한 호위 하에 즉시 소양으로 옮겨졌다.
'조선의 태자께 꼭 전해줘야 할 말이 있소. 그러니 나를 태자께 데려다주시오.'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아테네로 항해하던 조선국적 상선 두 척 실종 사건을 수사하던 조서원의 요원들.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설파제를 먹이며 그를 소양까지 데리고 왔다.
"내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고 했나?"
"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파디샤께서는 전하를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라는 파디샤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
연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와주고 싶지만, 너도 알다시피 조선은 타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전하!"
오스만제국의 사신이 애처롭게 연을 불렀지만, 연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금까지 지킨 원칙을 자신을 좋아하고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메흐메트 4세를 도와줄 순 없는 일이다.
"전하, 이는 타국의 일이 아닙니다. 조선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 조선과 연관되어 있다니?"
"얼마 전 사라진 조선 상선 두 척. 모두 내란을 일으킨 놈들의 소행입니다."
"뭐라고!"
그동안 조서원에서 흔적을 찼지 못 한 이유가 해명됐다.
상선이 사라진 에게해는 전부 오스만제국의 관할권이다.
해적들이 날뛰고 있는 곳이지만, 오스만제국에서 편의를 받고 있는 해적들이기에 오스만제국의 허락이 없다면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또한 '번개' 표시 깃발을 단 상선 아닌가.
그런 상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그랬기에 수많은 조서원의 요원들이 투입됐지만,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조차 찾기 힘들었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면서 빠르게 말라가고 있는 오스만제국의 재정.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으로 더욱 힘들어져 갔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의 상선이 흑해를 건너 지중해로 진출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남예맥 횡단 철도가 완공되자 중계무역조차 할 수 없게 된 오스만제국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새로 재상에 오른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그건 바로 해적들을 이용해서 조선 상선을 납치하게 한 것이었다.
자국민을 아끼는 조선의 태자라면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는 지중해 진출을 못 하게 할 거라고 본 거였다.
"그대의 파디샤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섭정인 재상이 처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섭정이 범인이라니···. 믿기 힘들군."
"하지만 사실입니다. 전하."
"사실이라고 해도 근거가 희박하다. 단지 조선 상선이 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을 늦추기 위해 벌인 일치고는 너무 큰 일 아니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입을 열다 만 오스만제국의 사신을 보고 연은 씩 웃었다.
"이유가 있을 건데···?"
"그게. 그게···."
"정확히 말하도록 해라. 왜 그런지 알아야 도와주든 말든 할 것 아니냐?"
"사실은······."
연은 사신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들이 나를 가지고 놀려고 해.'
소양에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생긴 후.
그곳에서 물품을 사다 유럽반도에 넘기는 중간 상인들이 등장했다.
조선 국적이어야만 출입이 가능한 조선전력공사 분점이지만, 수고료를 주고 상품을 받아 가는 유럽 상인들이 많았다.
지중해 주변국까지 흘러 들어가게 된 조선전력공사 상품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지만, 그로 인해 오스만제국의 상인들은 손가락을 빨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짜낸 계책이 모략이야?'
오스만제국은 신성로마제국만 적이 아니었다.
몰타 기사단의 헛짓으로 베네치아 공화국과도 전쟁을 벌였는데 아직도 진행 중이다.
"몰타 기사단의 짓으로 몰려고 하다니,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래서입니다. 파디샤께서 저를 전하께 보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 때문이라니?"
"파디샤께서는 전하를 높이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새로 재상이 된 쾨프륄뤼 파샤가 일을 벌이자 그냥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대를 보내 해명하려고 한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해명한다고 달라질 일은 없겠지만, 자신보다 1살이 어린 오스만제국의 메호메트 4세가 따른다는 말에 묘하게 정이 갔다.
"어떻게 해주면 좋겠나? 우리 조선은 타국의 내정에 관섭하지 않는다는 걸 잊지 말고 말해 보게나."
"콘스탄티노플에 함대를 파견해 주십시오."
"뭐?"
"그곳에 조선의 함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상이 헛짓을 더는 하지 못할 겁니다."
"음···."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함대를 보내 자신을 지켜 달라?'
정리하자 간단했다.
어릴 때부터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긴 메흐메트 4세.
재상 쾨프륄뤼에게 섭정을 넘기 어머니 하티제 투르한 술탄도 믿을 수 없었다.
이제 15세가 된 메흐메트 4세는 자신을 못 믿는 어머니가 두려웠다.
비록 자신을 독살하려던 할머니 쾨셈 술탄의 암수에서 구해주긴 했지만, 그녀 또한 살아남으려고 했던 거였다.
연은 오스만제국의 사신을 한번 쳐다보더니 벽에 걸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한참 지도를 살피던 연이 사신을 보며 말했다.
"이곳 마르마라해에 있는 임라르(Imrali) 섬과 마르마라(Marmara) 섬을 조선에 넘겨라. 그리하면 너의 파디샤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임라르 섬은 조선 함대가 쓸 곳이고 마르마라 섬은 조선전력공사의 분점을 세울 장소다. 무슨 의민지 알겠느냐?"
"하오나 전하, 너무 멀지 않습니까?"
"임나르 섬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는 2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리니 무슨 일이 발생해도 2시간만 버티면 된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느냐?"
한동안 뭔가를 가름해보던 사신은 연을 향해 엎드렸다.
"전하, 감사합니다. 그리해주신다면 파디샤께서 편하게 주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계산할 것이 남아 있다. 무엇인지 알겠지."
"네, 전하. 파디샤께 전해 드리고 결정되는 대로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연은 사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만제국이 망하면 안 되지.'
일진일퇴(一進一退)하면서 신성로마제국과 땅따먹기에 열중하고 있는 오스만제국.
내전이라도 일어난다면 망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사파비제국 땅도 정리 못 했는데···.'
일본인들로 구성된 치안대를 사파비제국으로 보냈지만, 안정되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너무 충성스러워도 문제가 있지.'
새로 주군이 된 연에게 일방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일본인 치안대.
'융통성이 없어.'
그래서 문제를 일으켰고, 그걸 해결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