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61화 (161/275)

< 161. 뜻밖의 손님(2) >

서역의 중심도시 소양.

폴란드 지역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라는 바벨 성이 있고, 그곳에 태자 연이 묵고 있다.

그런데 태자비가 보기에 너무 작았다.

한양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봤던 조선의 영토.

그 규모에 비하면 한양에 있는 왕궁은 너무 작았다.

그래서 경복궁을 재건축하기로 했다.

새로운 경복궁은 조선의 건축장인뿐만 아니라 서양의 건축 기술자들도 초빙돼 역사상 가장 크고 웅장한 규모로 새로 구상 중이다.

단순히 주춧돌 위에 나무를 이용해 지었던 조선의 왕궁.

이걸 보고 서양 장인들은 고개를 내 저었다.

'이런 방식으로 지으면 불에 타기 쉽습니다. 그러니 돌을 이용해 지었으면 합니다.'

전 같으면 나라 살림을 걱정하여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했겠지만, 재정이 넘치도록 풍부한 조선 왕실이기에 서양 장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완전 새로운 방식으로 설계에 들어갔다.

남예맥 횡단철도가 개통되면서 더욱 활발해진 동서 간의 문명교류.

그 교류로 인해 서역이 어떤 곳이란 걸 라디오에서도 자주 방송해줬다.

조금이지만, 서양에 대해 알고 있는 태자비.

크고 웅장한 건축물을 선호하는 서양이기에 이곳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연과 함께 마차를 타고 바벨 성으로 들어가는 도중 태자비는 예쁜 입을 열어 물었다.

"전하, 이곳은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너무 작은 것 아닙니까?"

"그게 궁금하오?"

"네, 전하···."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태자비를 보고 연은 살짝 미소를 띠었다.

그러지 않아도 키가 컸던 태자비는 몇 년 사이에 더 훌쩍 커버렸다.

그런데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물론 연이 보기엔 말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아주 웅장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다 하오. 하지만 요즘은 그러지 않는 것 같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되오."

"그 말씀은 왕권이 미비하다는 것입니까?"

"그렇소. 이곳만 아니라 유럽반도 대부분은 각 지역의 패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소."

"그럼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있었소. 왕권이 세습되는 게 아니라 권력을 쥐고 있는 귀족들이 이익에 따라 왕을 뽑았으니 엉망이었소. 그중 가장 심했던 루스 차르국,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겁도 없이 우리 조선에 덤볐던 거지요."

연은 태자비에게 유럽에 대해 아는 만큼 설명해 줬다.

장거리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왕유(王乳, Royal Jelly)를 듬뿍 탄 차를 마시면서 경청하던 태자비.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소. 기독교의 교세가 커지면서 왕권보다 로마교황청이 휘두르는 신권이 문제가 되었던 거지요."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왕권보다 더 강한 신권이라니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러게 말이오. 어찌 됐든 신권이 왕권보다 높아지자 각지의 귀족들은 왕을 따르기보다 교황의 말을 들었소."

훈족의 침입을 받은 게르만족이 대이동 하면서 멸망해버린 로마제국.

둘로 갈라졌지만, 훈족의 침략은 멈추지 않았다.

"황제의 자리가 수시로 바뀌었다니, 그래서 유럽반도가 이리되었나 보네요."

"맞소. 호랑이가 사라지자 늑대들이 권력을 나눠 갖게 된 것이오."

끊임없이 지속된 훈족과의 전쟁에서 서로마 제국을 대신하여 나선 게르만족 용병들.

교황 레오 1세가 금은보화를 주고 훈족 최후의 왕이며 유럽 훈족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아틸라 왕을 돌려보내자, 그들은 다른 마음을 먹었다.

게르만족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소년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쫓아내 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오도아케르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공동 통치자였던 테오도리크에게 잔치 도중 급습당해 살해당했다.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브리튼섬까지 지배하던 로마는 그 후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인구 감소와 세수 부족으로 재정난에 허덕이던 서로마 제국은 결국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와 달리 그리스에 자리 잡은 동로마제국은 되려 발전했다.

비단길을 통해 아시아와 무역으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동로마제국도 오스만제국 때문에 힘을 잃어 갔다.

아시아로 오갈 수 있는 비단길로 통하는 교역로가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거대한 범선을 이용해 대항해 시대를 연 대서양 연안 나라들이 커졌다.

하지만 봉건제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

"우리 조선이 있기 전에 고려 때처럼···."

"맞소. 아직 봉건제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 바로 이곳 유럽이오."

태자비는 조선 왕실에서 금기시하는 고려라는 말을 꺼낸 후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연은 친절하게 응대했다.

"고려 때처럼 권력이 중앙 집권화되지 않고 영주라 말하는 봉신(封臣) 귀족들이 힘을 가지고 있었소. 그 이유가 바로 왕권보다 신권이 더 강하기 때문이었소."

교황에게 척을 진 왕을 암살하고 그 자리를 노렸던 귀족들.

그들은 강력한 중앙집권보다는 느슨한 봉건제를 선호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유지하기 쉬우니까.

"이곳에서 가장 크다는 신성로마제국만 하더라도 수많은 작은 나라들이 모여 결성된 연합제국이오."

"그래서···?"

연은 태자비를 보고 빙긋 웃었다.

자신이 한 짓을 태자비가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맞소. 언젠가는 그들도 조선처럼 중앙집권화될 것이 틀림없소. 그러기 전에 그들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벌인 일이오. 물론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고 영토를 넓히는 데 혈안이 되어 싸우기를 좋아하는 자들이기에 그리 한 것이오."

연은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이 싸우고 있는 상황을 십자군 전쟁부터 태자비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긴 시간 동안 설명을 듣고 난 태자비.

"자신의 치부를 위해서는 억만금을 쓰면서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다니 어찌 왕이라 할 수 있습니까?"

"나도 그들이 왜 그런지 잘 모르오. 아마 종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소."

"종교 때문이라니요?"

"이곳 사람들 대부분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고 있소. 십자군 전쟁으로 교황청의 힘이 줄어들자 왕들은 신권설을 주장하며 힘을 키우고 있소."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전하. 그런데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들어본 바로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다고 했다는데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조선에서도 기독교가 퍼져나가고 있었기에 궁궐 안에서만 살아가던 태자비라 하더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어느 종교나 교리 자체는 참 좋습니다. 교리가 좋지 않다면 종교가 아니라 사악한 집단으로 취급받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종교나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종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교리를 해석하느냐에 따라 종교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니 말이오."

"아···, 그래서 서로 싸우고 있는 거 군요."

"맞습니다."

연은 바로바로 알아듣는 영특한 태자비가 자랑스러웠다.

누구에게 뽐내고 싶을 만큼.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한양을 떠나기 전에 이곳에 관해 공부했던 태자비.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르치는 재미를 느낀 연은 집무실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를 토대로 주변 정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서로 같은 신을 믿지만, 교리 해석에 따라 서로 싸우고 있는 거였군요."

"맞소. 그래서 조선은 처음부터 종교의 자유를 표명했던 것이오. 왕이 단 하나의 종교만 믿으며 다른 종교를 배척한다면 백성들은 분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오."

"전략을 바꾸신 것입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이번에는 연이 태자비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조선 시대 아녀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전략이라니.

믿기 힘들었다.

아마도 무장보다 더 칼을 잘 쓰는 장인어른 유심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곳 왕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를 달리 해석하여 새로운 교리를 만든다고요. 그래서 생각해봤습니다. 왜 그랬을까? 아마 전하께서는 그들과 달리 백성들의 문제는 백성들이 알아서 할 수 있게 방치한 것이 아닌지···.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배척하시는 것 같습니다."

태자비의 말에 연은 뜨끔했다.

그 어떤 나라나 지역보다도 차별 없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선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니었다.

종교 단체의 재정 투명성을 강조하고 종교인에게 세금까지 걷고 있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오."

"무슨 이유입니까? 전하."

"피곤하지 않소? 멀리서 오느라···."

"아닙니다. 전하. 기차 안이 넓고 편해서 괜찮습니다."

사실 태자비가 타고 온 기차 객실은 태자비가 기거하는 궁궐의 처소보다 훨씬 넓었다.

'크게 하길 잘했군.'

21세기 대한민국의 철도 표준궤 간격은 1,435mm.

연이 철도를 구상하면서 정했던 철길 사이의 간격은 1,500mm.

21세기보다 17세기 조선에서 운행하고 있는 철도의 폭이 65mm가 더 넓었으니 주행 안정성이 더 좋을 수밖에.

아무튼 넓은 객차 안을 혼자 쓰면서 이곳까지 온 것 때문인지 모르지만, 태자비의 눈은 초롱초롱하기만 했다.

연은 다시 자리에 앉아 태자비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려가 불교 때문에 나라가 엉망이 되었듯이 이곳도 기독교 때문에 지옥과 같은 시절이 있었소. 그때를 가리켜 '암흑시대'라 하오. 그만큼 사람들이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소.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부와 권력을 이룬 자들이 있었소."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성직자들이오. 그들은 자손 대대로 교회를 물려주면서 부와 권력을 잡고 놓지 않았소."

"그랬습니까? 사제들은 혼인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자신이 알고 있던 내용과 달라서인지 태자비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소. 교회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한 몇몇 성직자들이 교회 재산을 사적으로 쓰고 세습하면서 교회의 재정이 나빠지기 시작하자 교회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을 것이오."

"네? 사제들은 검소하다고 들었는데···."

"사람은 누구나 똑같소. 사제라고 해서 다르지 않소. 아니 더 했지요. 그들은 신을 섬긴다면서 더 추악한 짓을 서슴치 않고 했소. 그래서 이곳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이오."

미모의 소녀들, 수녀들, 심지어 자신의 딸까지도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던 성직자들.

그들도 할 말은 있었다.

바티칸의 교황부터 첩이 많았고 음란한 생활을 즐겼기에 따라 했을 뿐이라고.

"아무튼 몇몇 교황들이 나서서 교회법을 바꾸었기 때문에 이제 사제들은 독신으로 지내야 하지만, 그것도 전부는 아니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교회는 세습으로 인한 악습을 막기 위해 사제들의 독신을 강요했다.

하지만 동로마 교회는 성경에도 없는 내용이기에 따라 하지 않았고 성직자들의 혼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하."

"고맙긴요. 자주 연락하지 못한 내가 미안하오."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서 이 나라 조선을 위해 애쓰시는데 제가 어찌 서운한 감정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연은 뜨끔했다.

'서운했구나···.'

태자비의 표정은 아니었지만, '서운'이란 단어가 입에서 나왔다는 말 자체를 무시할 순 없었다.

평생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연이지만,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연은 태자비의 눈이 졸려 처질 때까지 질문에 성의껏 답했다.

* * *

연이 태자비에게 그동안 못했던 사랑을 베푸는 사이.

북미 뉴스웨덴에 손님이 찾아왔다.

"사령관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일단 무장 해제시키고 한쪽에 몰아넣어라."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조선전력공사 기병대 제5연대장이었던 폭수.

이번 북미 진출을 맡으면서 북미 기병대 사령관에 임명됐다.

해경 서역함대 사령관인 을수가 떠난 후.

폭수는 흔적만 남은 크리스티나 요새를 재건하고 주변을 정찰했다.

앞으로 있을 북미 대륙 점령을 위한 전초기지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이곳을 이렇게 만든 놈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폭수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마중나갔다.

"나는 뉴네덜란드 총독인 페터르 스타워베산트요. 그대는?"

"나는 이곳을 맡고 있는 사령관 폭수라 하오. 그래 무슨 일 때문에 오셨소."

무려 600명이나 되는 기병을 이끌고 온 페터르의 말에 폭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응대했다.

'감히 조선의 영토를 불태우고도 겁도 없이 찾아오다니···.'

당장 면상을 갈기고 싶었지만, 폭수는 꾹 참았다.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니 아무 짓도 벌이지 말라'는 연으로부터 통보를 받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손님으로 방문했다고 밝힌 상대를 내칠 수도 없는 일.

폭수는 팔짱을 끼고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일전에 이곳을 점령한 일을 사죄하기 위해서 찾아왔소. 그러니 그대의 상관에게 연락해 주시오. 조선군은 멀리 떨어진 곳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무전기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리 잘 아신다니 잘 됐군요. 조선은 조선의 영토를 침략한 자에게 너그럽지 않다는 사실도 말이오."

"네?!"

폭수의 말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 놀라는 뉴네덜란드 총독.

그런 그를 보지도 않고 폭수는 부관에게 말했다.

"이자는 전범이다. 도망가지 못하게 가둬놓아라. 처벌은 총사령관님께 물어본 다음에 하도록 하겠다."

"멸!"

졸지에 전범으로 낙인찍힌 페터르 스타위베산트 뉴네덜란드 총독은 거친 항의를 하며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그를 따라온 뉴네덜란드 병사들은 무장해제당한 후 수용소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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