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뜻밖의 손님(1) >
어머니인 인선왕후와 전화 통화를 끝낸 연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그동안 아버지인 효종이 한 말이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봐야 대답을 안 해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역시 어머니가 최고야."
연은 민삼이를 불러 손님 맞을 준비를 서둘렀다.
그 바람에 바벨 성만 아니라 소양시 전체가 뒤집어졌다.
소양 시립교향악단은 손님을 맞이할 곡을 선정하고 연습에 들어갔다.
노래를 부를 두 소녀 또한 연주곡에 맞춰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어떡하지? 잘할 수 있을까?"
"그럼! 우린 잘 해낼 거야. 우리가 누구야?"
"카순이지!"
두 소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까르륵 웃었다.
아버지를 따라 소양에 온 순이.
크리스마스트리를 구경하면서 카트리나와 더욱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생긴 소양방송상사에서 주최하는 노래경진대회에 참가했다.
평소에도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기에 참가했지만, 우승 상품이 탐이 나서 신청한 거였다.
그런데 덜컥 우승해버렸다.
그 일로 소양방송에서 송출하는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게 된 두 소녀.
조선 전체에 그녀들의 노래가 퍼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둘의 이름 앞 자를 따서 '카순이 자매'라 지은 예명은 조선 최고의 가수라는 예은이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동역 소녀와 서역 소녀가 만나 노래를 부르니 신비로운 화음을 이루었고,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둘을 가리켜 '천상의 조화'라 불렀다.
"태자님께서도 잘 생기셨는데 태자비님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세상에서 가장 예쁜 분이 틀림없을 거야."
"그치?"
또다시 까르륵 웃는 두 소녀.
이번에 태자비 방문을 환영하는 화동(花童)으로 뽑혔다.
태자비가 두 소녀의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연이 그리하도록 한 거였다.
또한 동서 화합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좋다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자비님께서는 키가 무척이나 크다고 하시던데, 혹시 알아?"
"응, 들은 적 있어. 아마 나 보다도 클 것 같아."
"설마?"
순이는 아담한 체형인 반면 카트리나는 길쭉했다.
그런 카트리나보다 크다니.
조선 여인 중 그리 큰 여인이 있을 리가 없다고 순이는 생각했다.
"카트리나, 다시 연습하자. 태자비님 마중하는데 실수하면 안 되잖아."
"그러면 절대 안 되지."
두 소녀는 교향악단에서 넘겨준 악보를 보며 다시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 연습에 열중했다.
* * *
어릴 적부터 유난히 키가 컸던 태자비 유씨.
쌍꺼풀까지 있어 혼인 못 하고 평생 살 줄 알았다.
그런데 태자비가 되었다.
간택령도 없었는데 부름을 받고 궁궐로 찾아간 유씨는 가슴이 떨렸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부자이며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조선에 하나뿐인 왕자 이연.
얼굴까지 잘생겼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런 태자의 배필 후보로 인선왕후를 뵙게 됐다.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긴장되었지만, 어차피 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에 담담히 응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인선왕후와 안빈 이씨, 숙의 김씨, 숙원 정씨 까지 모두 극찬했다.
'어린데도 침착하니 보기 좋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 나이면 무서울 건데도 긴장하는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비 전하 저는 저 아이가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조선이 청나라를 치고 효종을 폐하라 부른 후 중전마마는 왕비 전하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런데 키가 너무 큰 건 아닌지···.'
숙의 김씨가 자신보다 월등히 큰 유씨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인선왕후가 나섰다.
'태자도 키가 커서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또 쌍꺼풀이 있어서 문제가 된다고 하지만, 태자가 좋다고 했답니다.'
'참말입니까? 왕비 전하?'
'참말이고 말고요. 태자가 그리 말했다고 폐하께서 말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더 찾아볼 필요가 없겠습니다. 바로 저 아이로 낙점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숙원 정씨까지 나섰다.
'그런데 가문이···?'
'동부승지(同副承旨) 유심(柳淰)의 여식(女息)이옵니다.'
'어쩐지···, 그랬군요.'
태자비 유씨의 아버지인 유심은 문무를 겸비한 수재였다.
20세에 진사(進士)로 장원급제한 그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칼을 들고 싸운 적도 있었다.
천성이 온화하고 행동이 순수하다는 말을 들었던 유심이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았다.
효심 또한 대단했다.
체격도 컸지만, 인물도 좋았다.
하지만 풍류와 여색을 멀리했다.
그랬기에 왕비와 후궁들도 알고 있었다.
'아비를 닮아 저리 침착한가 봅니다.'
'인물도 좋고요.'
'서예와 서화도 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시도 제법 읊을 줄 안다고 합니다.'
'말도 잘 탄다는 소리가 있던데···.'
숙의 김씨가 말을 꺼내자.
이번에는 안빈 이씨가 나섰다.
'그거야 흉이 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비가 학식도 높지만, 무예가 출중하다 보니 배운 것 아니겠습니까?'
'양반의 아녀자라면 말 정도는 탈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괜히 나섰다가 찍힐까 봐 숙의 김씨는 말꼬리를 흐리며 싱긋 웃었다.
'그럼 모두 찬성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네, 왕비 전하.'
인성왕후의 물음에 모두가 유씨를 태자비로 삼기로 결정을 내렸다.
태자비는 그때 일을 떠올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궁궐을 방문했는데 그리될 줄은 정말 꿈도 꾸지 않았다.
울창한 숲을 지나 푸릇푸릇한 초원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다시 거친 들판이 며칠이나 지속된 후에 깊은 산골짜기를 통과하자 다시 초원이 나타났다.
'도대체 세상이 얼마나 넓은 거야?'
태자 연이 한양에 올 때마다 말해주던 세상 이야기.
듣고 서도 믿지 않았는데 직접 경험해 보니 놀라웠다.
한양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한 지 반나절도 안 돼서 압록강을 건넜다.
그런데 7일이 지났는데도 아직 멀었다니.
상상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이 땅이 모두 조선 땅이라니···.'
자신의 배우자인 태자가 넓힌 영토가 엄청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넓고 광활할 줄은 몰랐다.
"마마, 진지 드실 시간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
"네, 마마."
태자비는 시계를 꺼내 보고 이상한 지 창밖을 내다봤다.
그 모습을 본 궁녀가 다소 곤히 입을 열었다.
"마마, 시차가 있어 시간을 조정해야 합니다."
"맞다.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였구나."
"저도 그렇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연이 한양갈 때 타고 다니던 기차는 더욱 보강됐다.
태자비가 타고 소양까지 간다는 말에 은쌍식이 나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시 개조했다.
고급 목재로 내부를 꾸몄지만, 단조롭기만 했던 객실.
향나무로 전부 교체하고 식당칸과 산책 칸까지 만들었다.
10일이나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라 혹시라도 병이라도 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이건 궁에서 먹던 거와 맛이 같구나. 아니 더 맛있구나."
"쌍식님이 마마를 위해 북해도에서 가져온 쇠고기입니다."
"그래?"
"네, 마마."
은쌍식은 태자비가 연과 달리 쇠고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북해도에서 키우는 소 중 가장 좋은 소를 골라 한양으로 보내라 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맛있어 보이는 소를 출발하기 전에 도축한 후, 좋은 부위만 골라 바로 기차에 실었다.
그래서인지 숙성된 고기 맛이 일품이었다.
"얼리지 않고 냉장고에 보관해 놓은 것입니다. 거기에 이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후추가 품질이 좋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돌아갈 때 복민이 선물을 사 가야겠구나."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태자비는 조서원을 맡은 은진이는 모르지만, 은쌍식은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조선전력공사의 이인자인데.
이리 신경 써준 은쌍식에게 보답하기 위해 그의 아들인 복민이를 챙기기로 했다.
* * *
뉴네덜란드의 총독인 페터르 스타위베산트는 소식을 듣고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그게 정말이냐?"
"네, 총독님. 잉글랜드가 망하고 브리튼 왕국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군이 왜 그곳으로 왔단 말이냐?"
"그게···, 브리튼 왕국의 왕이 된 칼 10세가 조선에 뉴스웨덴을 넘겼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되느냐?"
"조선군을 따라온 라르스 카그 백작의 말에 의하면 조선이 스웨덴을 얀 2세로부터 넘겨받았고, 칼 10세 또한 인정했기에 뉴스웨덴과 그 주변은 조선의 영토라 했다 합니다."
"이런! 제기랄! 빌어먹을!"
스타위베산트 총독은 담배 파이프를 집어 던졌다.
자신이 한 짓이 있기에 걱정됐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뻔히 알기에 분노와 함께 두려웠다.
"그런데 왜 조선에서는 말이 없다더냐?"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에 관해 물어봤지만,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조선에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타국에 대해 관섭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명분만 있으면 온 세상을 집어삼킬 놈들 아니냐?"
"그, 그러긴 하지만···."
이미 조선에 대한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식민지를 개척하고 상품을 네덜란드로 보내는 것이 주 업무이기에 수시로 상선이 오가고 있다.
그들을 통해 들은 소문.
조선은 무서운 나라였다.
그런 조선이 당하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게 틀림없었다.
'어찌해야 하지?'
'그냥 도망갈까?'
20세에 프레네커 대학에서 철학과 언어를 공부했을 때도 사고를 치고 도망간 적이 있었다.
하숙하던 집주인의 딸을 건든 것이다.
'아니지. 여기서 도망가면 어디로 간단 말이야.'
그때는 아버지가 있어 암스테르담으로 보내졌고, 운 좋게 서인도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패권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적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니야. 죽일지도 몰라.'
또다시 밀려오는 두려움.
조선군은 루스 차르국 차르조차 처형하지 않았는가.
네덜란드의 식민지 총독인 자신 정도는 찢어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슴 한쪽에서 안심하라는 듯 마음이 편해졌다.
"정말 조선이 신경 쓰지 않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 조용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네, 총독님."
사람이 곤궁에 처하면 자기합리화를 한다더니.
스타위베산트 총독은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가서 사죄하고 오는 게 낫겠지?"
"직접 가시게요?"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알겠습니다. 총독님. 제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심복이 나간 후 총독은 다시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 불을 붙인 후 깊게 빨았다.
뿌옇게 집무실을 가득 채운 담배 연기.
그 연기처럼 그의 앞날이 어찌 될지 보이지 않았다.
* * *
효종 8년(1656) 7월 15일.
그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기우제까지 지내려 했지만, 라디오방송과 어린 학생들의 비웃음을 듣고 하지 못했다.
"날씨가 이러는 건 하늘 탓이 아닌데···."
"세상의 흐름 때문에 기상 이변이 생겨서 그런 건데···."
코메니우스가 합류하기 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는 점점 충실해지고 과목도 늘어났다.
그중 '과학' 교과서는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너희들 은동리에 있는 과학자들이 얼마나 좋은지 알지?"
"당연하지. 무려 50원이나 하는 삼발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잖아."
여자아이들은 카순이 자매처럼 인기인이 되고 싶었지만, 남자아이들은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잘해야 동네에 한 대뿐인 삼발이 자동차.
그런 자동차를 개인마다 한 대씩 가지고 있다니.
과학자야말로 최고였다.
그러는 가운데 연은 바벨성 북쪽에 있는 소양 역으로 행차했다.
태자비가 오늘 도착한다는 걸 어찌 알았는지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정말 태자비께서 오늘 오시는 거 맞아?"
"그러니 이리 사람들이 많은 거잖아."
"그렇군. 그런데 왜 떨어져 지냈데?"
"너무 어려서 그랬다고 했어."
"어려? 태자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나 보네."
소양이 크라쿠프일 때부터 살았던 체스와프는 친구를 따라 소양 역으로 구경 나왔다.
다른 지역보다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은 소양이다.
그래서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지만, 이런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시민들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상사 연합에서 수시로 조선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데 특히 달달한 불고기가 일품이었다.
떡볶이라 음식도 있었는데 너무 매워서 혼난 적이 있었다.
불고기를 먹기 위해 나온 체스와프.
기다리는 동안 조선인이 운영하는 상사에서 근무하는 친구 미워쉬에게 궁금한 것을 묻는 중이었다.
"아니야. 두 살 차이라고 했어."
"뭐? 태자님 나이가 어찌 되는데. 20살은 넘지 않아?"
"아직 16세야."
"정말? 그렇게 안 보이던데."
"언제 본적이 있었어?"
"전에 멀리서 본 적이 있었는데 키가 무척이나 크던데."
"키 크다고 나이가 많은 건 아니야. 조선군 병사들만 보더라도 엄청 크잖아."
"에이, 그건 아니지. 그거 뭐냐···, 경비대, 경비대 대원들만 크지, 조선군 병사들은 작은 사람들이 많아."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태자님은 어릴 때부터 컸데."
멀리서 기차 기적 소리가 울리자 소양 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단상에 올라 지휘봉을 휘둘렀다.
동서양이 만나 어울려 춤을 추는 것 같은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고 그에 맞춰 순이와 카트리나도 화사한 장미 꽃다발을 들고 준비했다.
역 안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연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 승강장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연을 보고 벌떡 일어나 예를 올리는 경비대 대원들.
다른 날 같으면 손을 흔들어 주었겠지만, 연은 침이 마른 지 입술을 핥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긴장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