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브리튼 왕국(6) >
함부르크는 천혜의 지리적 요건을 바탕으로 교통의 요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서쪽으로 북해, 북쪽으로 발트해 그리고 엘베강을 이용해 동쪽까지 진출이 가능한 함부르크.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작센족이 몰려와 정주(定住)했다.
작센족(Sachsen)은 앵글로색슨 할 때 바로 그 색슨족(Saxons)을 말한다.
게르만족의 일파였던 이들은 동맹인 앙글리족(Angli), 유트족(Juti)과 함께 브리튼 섬으로 건너가 잉글랜드를 지배했다.
이들은 고대 영어를 쓰는 인도유럽어족이라 브리튼섬을 잉글랜드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물론 작센어는 저지 독일어, 즉 북독일 방언과 비슷하다.
하지만 수많은 민족이 몰려들었던 브리튼섬.
그곳에서 섞여 살면서 영어가 발전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언어였던 영어.
그래서 21세기에 세계 공용어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잉글랜드를 포함한 유럽반도는 북쪽에서 내려온 바이킹들이 섞이긴 했지만, 게르만 인들의 세상이었다.
그들이 북미라 말하는 신대륙에 진출해 있는 상황.
연은 이들을 효과적으로 북미 대륙에서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던 중 칼 10세의 말에 희망을 얻었다.
생긴 것처럼 칼 10세는 복덩이가 틀림없었다.
연 앞에 정렬해 있는 조선전력공사 해양경비대 서역 함대 사령관 을수와 함장들.
왠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일이라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곳을 중심으로 '북미 대륙'이라 말하는 곳을 확보해야 한다. 그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가장 좋은 땅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알았나?"
"""멸!"""
며칠 전, 완성된 철로를 따라 기차를 타고 함부르크에 온 연은 을수 함장을 서역 함대 사령관으로 진급시켰다.
서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가운데, 조선전력공사는 이미 확보한 만주에서 철과 석유를 원하는 이상 얻어 낼 수 있었다.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쉬지 않고 철선을 뽑아내고 있는 송림조선소.
그곳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조경함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서역까지 항해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연은 적이 사라진 동역보다 잠재적 적들이 몰려 있는 서역에 군사력을 보강하기로 했다.
"을수 사령관은 북미 신대륙을 확보한 후 즉시 돌아와야 한다. 아무래도 지중해에서 뭔 일이 날 것만 같다."
예맥해라 부르는 카스피해를 확보한 후에 다시 흑해까지 진출한 조선전력공사 경비대.
그들을 믿고 조선인이 된 선주들과 선원들은 지중해 진출을 희망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조선을 상징하는 '번개' 표시 깃발을 단 상선 2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남예맥 횡단철도가 지나는 마리우폴에서 고가의 조선전력공사 상품을 싣고 떠난 조선의 상선 두 척.
이스탄불에서 정박한 후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해 그리스 아테네로 가는 것까지 확인됐다.
그런데 그 이후로 연락이 두절됐다.
해경 전함과 달리 무전 시설이 없는 나무로 만들어진 갤리온선이라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장이 잘 되어 있는 배다.
그런 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아무래도 해적 놈들 짓 같습니다."
"감히 해적 따위가 우리 조선의 상선을 노린단 말이냐?"
엄연히 조선어 시험에 합격했거나, 거주증이 있는 선원들이기에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러니 해적 아니겠습니까?"
"크흠, 그렇다면 정리해야지."
이미 서역 전역에 조선군의 명성이 퍼져있는 상황.
제아무리 간을 빼놓고 사는 해적이라도 조선의 상징인 '번개' 표시 깃발을 보고 달려들 해적은 없을 줄 알았다.
그래서 지중해로 통하는 상선 운항을 허가해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사고가 난 거였다.
서역 함대 사령관이 된 을수는 모든 정보를 취합했다.
그래고 결론을 내렸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사장님. 그런데 지중해에서 설치는 해적 놈들의 뒤에는 오스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발생한 상선 실종 사건은 아마도 오스만에서 수작을 부린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해협을 빠져나가자마자 실종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오스만이 수작을 부렸다면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러니 을수 너는 정착지를 확인한 후 바로 돌아오도록 하라."
"넵! 사장님."
오스만 제국 놈들이 해적 놈들과 짜고 벌인 일이라 확신하는 을수.
어서 빨리 신대륙에 있는 정착지에 갔다 와 박살을 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 * *
함부르크 남쪽,
엘베강 변을 따라 정박해 있는 조경함 6척.
갑판 위에는 폴리프로필렌과 면을 섞어 만든 하얀 제복을 입은 해경 대원들이 서 있었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서역 사람들을 뽑아 만든 조선전력공사 서역경비대 군악대.
힘찬 행진곡에 따라 연과 을수 그리고 함장들이 등장했다.
"이건 무슨 노랫가락입니까? 대취타(大吹打)보다 흥겹습니다."
"행진곡이라 한다. 이곳에서는 이런 음악을 쓴다고 하길래 도입했다."
"아, 그랬습니까? 조선의 노랫가락보다 훨씬 빠릅니다."
조선에서도 대취타라 말하는 행진곡을 쓰고 있다.
3박인 국악과 달리 2박이 한 단위이기에 행진곡으로 적합한 대취타이다.
그렇다 해도 연이 기억을 끄집어내어 흥얼거린 대로 만든 행진곡보다 경쾌할 순 없었다.
국악과 서양음악이 혼합된 '소양시립교향악단'.
매달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자, 어느덧 소양은 음악 예술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반도에서 명문가의 후원으로 발전했던 서양음악.
몇몇 유명한 음악가가 아니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양은 달랐다.
먹고 사는 것만큼은 모든 예술인에게 조선전력공사가 지원해 줬다.
그래도 될 만큼 소양에 세워진 조선전력공사 분점의 이익은 엄청났다.
물론 예술인 시험에 합격해야만 한다.
안전하고 살기 좋다고 소문난 소양이기에 어중이떠중이까지 몰려들고 있다.
그래서 일정한 기준을 만들고 시험을 치르게 했다.
기준에 합격하지 못하면 소양에 발을 붙이지도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인간이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양으로 들어와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넘쳐났다.
하지만 거주증이나 조선인 신분증이 없으면 바로 광산으로 끌려갔다.
대부분 유럽반도에서 도망쳐 국경을 넘어 조선 땅으로 올라온 이들.
배고픔을 면하고자 찾아왔지만, 그냥 살게 할 수 없었다.
'제발 추방만은 면하게 해주십시오.'
간절한 부탁에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돌아가는 즉시 체포되어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고 사정하는 이들.
추방하는 것도 문제지만, 광산에서 일할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건을 달았다.
5년 동안 광산에서 착실하게 일하면 조선어 실력에 따라 거주증 또는 주민증을 준다고.
그런 조건이지만, 지원자는 넘쳐났다.
그런 조건이기에 조선 관리들의 단속에 반항하지 않았다.
물론 저항하거나 반항하면 즉시 처벌했다.
하지만 순순히 따른다면 삶이 보장되기에 그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군악대 연주에 맞춰 항구에 도착한 연은 대기하고 있는 깐깐하게 생긴 노년의 바이킹을 바라봤다.
"말로만 듣던 위대한 조선의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대가 라르스 카그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칼 10세의 부탁을 받아 이곳에서 전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말은 들었다. 그대가 정착지에 있는 사령관과 잘 아는 사이라 하던데···."
"맞습니다. 전하. 뉘아스베리예에 있는 크리스티나 요새 사령관은 한때 저의 기사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가서 모든 걸 설명 하겠습니다."
"고맙다. 이리 자진해서 수고해 준다니 그에 따른 보상을 하도록 하마."
"아닙니다. 전하. 이미 칼 10세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내가 주는 것이니 사양하지 말라."
"감사합니다. 전하."
라르스 카그 백작은 덴마크로부터 스웨덴을 독립시킨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손자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왕의 정치적 동지이자 군 장교였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의 외조카인 칼 10세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인 라르스 카그 백작.
귀족을 인정하지 않는 조선 땅이 되어버린 스웨덴을 포기했다.
대신 관리조차 안 되는 북미 정착지인 뉴스웨덴을 조선에 넘기고, 브리튼 섬을 차지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고 계산했다.
이미 칼 10세로부터 후작의 지위를 약속받았기에 라르스 카그는 이번 북미 정착지 안내가 달가웠다.
말로만 듣던 조선군 전함을 타고 가서 소개만 해주면 되는 일 아닌가.
이처럼 단순한 일로 살기 좋은 브리튼 섬에서 영지를 받을 수 있다니 부탁이 없더라도 자진해서 하고 싶은 일이었다.
"을수는 잘 들어라. 가서 굳이 나서지 말고 이자를 잘 활용하도록 해라. 이자의 기사였던 자가 크리스티나 요새의 사령관으로 있다고 하니 안내가 끝나면 그곳에 있는 이들을 모두 칼 10세에게 데리고 주고 오도록."
"잘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연은 독일어를 모르는 을수를 위해 친절히 설명해줬다.
새로 창설된 조선전력공사 제7 기병연대와 2개의 예맥 기병연대가 조경함 4척에 나뉘어 승선했다.
남은 조경함 2척은 북해를 감시하고 칼 10세가 이끄는 바이킹들을 지원해 줘야 하기에 대기하기로 했다.
힘찬 행진곡이 울려 퍼지며 4척의 조경함이 함부르크를 떠나자 연은 왠지 모르게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잘 될 거야. 뭔 일 있겠어.'
처음 북해에 도착한 조경 11, 12, 13함과 나중에 도착한 14, 15, 16함은 모두 아무런 사고 없이 수만 리 바닷길을 건너온 강철 전함들 아닌가.
게다가 빙산 위험이 있기에 브리튼섬 북쪽이 아닌 영불해협을 지나 브리튼섬 남쪽으로 항로를 정했다.
그러니 거친 북대서양이라지만, 위협이 될 순 없을 거로 생각했다.
* * *
셰필드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아들인 리처드를 가볍게 제압한 칼 10세.
드디어 런던을 코앞에 두고 첼시 북쪽 켄싱턴궁에 진을 쳤다.
템스강 변에서 물을 얻으려 했지만, 이미 잉글랜드 연합의 전함들이 포진하고 있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서펜틴 호수(Serpentine Lake)의 물을 식수로 쓰기로 하고 훗날 하이드 파크가 되는 곳을 점령했다.
"놈들이 성에 의지해서 나오지 않고 있는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폐하."
스코틀랜드 클랜들의 협조를 약속받고 돌아온 늙은 바이킹 비욘이 칼 10세에게 물었다.
"너는 보지 못했겠지만, 우리에게는 조선의 태자 전하께서 주신 강철 대포가 있다. 그러니 깨부수면 될 일이다."
"그렇습니까?"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칼 10세.
그 모습을 보고 비욘은 중얼거렸다.
"어쩐지, 셰필드 성이 개 박살 났다 했더니···."
연은 칼 10세에게 총 10문의 강철 대포를 주었다.
바이킹 전함 5척이면 볼품없는 잉글랜드 연합의 전함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많았다.
잉글랜드 연합의 전함들은 해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템스강 입구에서 서성이며 해안포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육상전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조선의 수석총이 좋다고 하지만, 대포 없이는 단단한 돌로 지어진 잉글랜드 연합의 성들을 공략하기 힘들어 보였다.
바이킹들이 만든 가죽 대포는 휴대가 편한 만큼 위력이 엉망이었으니 당연하다.
3~4발 쏘고 나면 폐기해야 하는 가죽 대포.
그런 대포보다는 빠른 승리를 위해 이제 조선군조차 쓰지 않는 전장식 강철 대포를 칼 10세에게 넘겼다.
"비욘?"
"네, 폐하."
"3일 후 공성전에서 비욘 네가 첫 발을 쏴 보도록 해라. 그래야 조선의 강철 대포가 얼마나 멋진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저에게 그런 기회를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폐하. 첫발로 적의 성문을 박살 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이룰 수 없게 됐다.
수적 열세에 몰린 올리버 크롬웰 호국경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연합군.
밤사이 템스강을 건너 남쪽 워털루로 넘어갔다.
각지에서 끌어모은 1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이 있지만, 크롬웰은 세인트 폴 대성당이 있는 런던 중심부를 포기했다.
그곳에서 전투를 벌이다간 도망조차 가지 못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미 자신의 아들인 리처드가 셰필드에서 싸워보지도 않고 성을 포기하고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말에 크롬웰은 템스강에 전함을 배치하여 방어하면서 프랑스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크롬웰은 프랑스의 재무장관 장바티스트 콜베르에게 서신을 전하면서 루이 14세에게 꼭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 * *
5세의 나이로 프랑스 왕좌에 오른 루이 14세.
23살이 됐지만, 실권이 없었다.
1651년까지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 대비의 섭정을 받았고, 그 이후로 대비와 추문으로 소문이 자자한 쥘 마자랭의 섭정하에 있었다.
그러니 그 서신은 루이 14세에게 가지 않고 쥘 마자랭의 손안으로 전달됐다.
한참 서식을 읽던 쥘 마자랭.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와달라?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각하."
올리버 크롬웰 호국경에게는 폐하라 호칭하던 장바티스트 콜베르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죽거렸다.
이익을 위해 쥘 마자랭의 심복이 된 콜베르.
그가 보기에도 서신의 내용은 말이 되지 않았다.
"보상은 없고, 되려 협박이라? 역시 풍운아였군."
"그렇습니다. 각하. 근본이 없는 자라 그런지 협상 아니 부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군요. 저 같으면 브리튼섬 남쪽 일부든지 아니면 말썽 많은 아일랜드라도 넘겨주는 조건을 달았을 건데, 되려 협박을 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행태입니다."
"그게 놈의 그릇이겠지."
올리버 크롬웰은 서신에 이런 내용을 담았다.
'우리가 패하면 다음은 너희 차례다. 그러니 즉시 병력을 파견하여 지원해야 할 것이다.'
사실 크롬웰의 말이 맞았다.
칼 10세는 브리튼섬을 차지한다 해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나라와 국민보다는 제 배 속을 채우기만 급급한 두 귀족 때문에 프랑스의 앞날 또한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나라 왕이건 왕국이 망하면 자신 또한 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랬기에 미치거나 멍청한 왕이 아니라면 나랏일을 우선시한다.
하지만 귀족들은 아니다.
언제든지 왕국을 버리고 타국에 가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으니.
나라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충실했다.
이 때문에 칼 10세는 생각보다 빨리 런던을 점령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