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브리튼 왕국(5) >
효종 8년(1656) 4월 12일.
경상도 울산부(蔚山府) 민가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더니, 전라도 광주에서 폭설이 내렸다.
하지만 소란은 없었다.
이제 조선인이라면 이런 현상을 '기상이변(氣象異變)'이라 말한다.
천재지변 같은 지진이나 해일을 겪어도 하늘이 노했다는 헛소리도 하지 않았다.
과학 전문 라디오 방송에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와 매일 같이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남예맥 대륙 횡단 철도가 완공되면서 조선 사회는 더욱 빠르게 변해갔다.
병자호란 때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만봉이는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갔다.
아무리 여진족이 예맥이라는 같은 민족, 같은 조선인이 됐다고 하지만, 그는 가족을 모두 죽인 여진족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상종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만봉이는 여진족이 없는 전라도에서 자릴 잡았다.
그런데 정착한 마을에는 젊은이들이 없었다.
꿈을 찾아 모두 큰 마을로 나가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낼 모래 40이 되는 만봉이가 마을에서 일할 수 있는 남자 중 제일 어렸다.
그러던 중 전쟁과 배고픔을 피해 조선으로 온 일본 여인과 혼인했다.
소개받았을 때 지체 높은 가문의 여인이란 말에 싫다고 했지만, 조합 어른들이 만봉이를 잡아 두려고 반강제적으로 혼례를 치렀다.
그래서 태어난 민수는 마을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고개를 넘어가야만 초등학교가 있기에 민수가 등교하는 날이면 만봉이 집 앞에 삼발이와 함께 동네 남정네들이 모여 있었다.
"민수야, 오늘은 이 삼촌이랑 가자."
"아니다, 저 삼촌 말고 나랑 가지 않을래? 나랑 가면 민수가 좋아하는 설빙 사주마."
마을에 한 대밖에 없는 삼발이 자동차.
읍내를 오가며 마을에 필요한 물품을 사 나른다.
민수를 학교에 보내고 물품을 산 후 다시 민수를 데리고 오는 역할은 오직 민수의 간택에 달렸다.
그러기에 민수에게 선택을 받으려고 이리 모여든 것이다.
"아따! 형님들 그러지 마시고 늦둥이라도 보시라니까 그러시네요."
"염병할! 임을 봐야 뽕을 따지. 안해가 자식놈 챙긴다고 한양 가버렸지 뭐여."
"민수 앞에서 뭔 욕을 하는가?"
"어, 미안 민수야. 이 삼촌이 잘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조건 윽박지르기만 했던 어른들.
이젠 그런 어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똑똑해진 아이들.
겨우 한글을 떼고 사칙연산만 할 줄 아는 자신들보다 시도 읊을 줄 아는 아이들.
그러기에 어른들은 아이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넨 엎어지면 코 닿을 한양이지, 우리 집사람은 서역까지 갔다네. 서역!"
"서역? 거북함 함장이 되었다는 진만이 보러 간 건가?"
"그렇구만."
"자네도 따라가지 그랬나?"
"내가 가면 우리 진돌이 밥은 누가 줄 건데."
먹을 것이 풍부해진 세상.
개를 잡아먹는 일은 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남는 음식을 처리하느라 개를 애완동물처럼 키우는 집이 많았다.
"진돌이야 내가 돌보면 되지."
"그건 안 되네. 자네 집 나비가 보통 앙칼져야지. 우리 진돌이 코가 남아나지 않네."
고양이를 키우는 집도 많았다.
더는 호환이 없는 세상.
늑대와 승냥이가 판을 쳤지만, 민가를 덮치는 일이 발생하면 씨를 말렸다.
효종은 백성들의 하소연을 듣고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짐승은 모두 처리하라고 명을 내렸다.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살아도 충분하거늘 민가를 괴롭히는 동물은 가차 없이 제거하라.'
그래서인지 삵 같은 작은 육식 동물이 넘쳐났다.
마을까지 내려와 닭과 오리를 잡아먹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키우기 시작한 개와 고양이.
아직 순화가 덜 돼서 그런지 서로 친해지지 않았다.
"형님들, 민수 학교 늦겠습니다."
"아, 벌써 시간이 됐나."
"네, 형님. 오늘은 제가 알아서 일 다 끝내 놓을 터니, 두 분이 함께 읍내에 다녀오십시오."
"그래도 되겠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 마을에서 가장 젊지 않습니까?"
조선 백성의 평균 수명은 말도 못 하게 늘어났다.
조선 시대 평균 수명이 35세라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선비 김육만 하더라도 낼모레면 80이 되지 않는가.
병만 없다면 인간의 수명은 절대 짧지 않다.
해충이 들끓는 초가집에서 20세기 후반으로 뛰어 버린 주거문화.
페니실린을 개발하지 못했지만, 설파제로 치료할 수 있기에 조선 백성의 수명은 무척이나 길어지고 있다.
17세기 중반이 막 넘어선 조선이지만, 300년 후인 20세기 대한민국보다 훨씬 살기 좋았다.
연이 증기기관이 아니라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열식 발전기부터 개발했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
그와 달리 마을마다 도시마다 x냄새 풀풀 풍기는 유럽반도.
끝도 없이 치고받으며 싸우고 있었다.
* * *
우기가 없는 잉글랜드라 하지만, 겨울에는 비가 자주 내리고,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칼 10세는 기다렸다.
"폐하, 이제 진격하셔도 될 듯합니다. 이제는 비가 매일 같이 오지 않습니다."
"그렇구나. 이 정도 날씨면 문제없을 듯하다."
머스킷보다 월등한 성능을 보이는 조선의 수석총이지만, 비가 오거나 습기가 많은 날에는 불발이 일어날 수 있다.
2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라 하지만, 대부분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병사들.
조선군에서 파견된 병사들에게 매일같이 총 쏘는 법과 제식훈련을 받았지만, 아직도 문제가 많았다.
'저런 놈들은 처음 보네.'
'그러게 말이야.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네, 했어.'
'저러다 오발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미치겠네.'
사격 훈련 도중 화약과 총알을 잘 집어넣지 못해 내팽개치며 식식거리는 놈들.
정말 답이 안 보였다.
따로 불을 붙일 필요 없이 방아쇠만 당기면 격발되는 조선의 수석총.
하지만 전장식이라 화약과 탄환을 넣는 데 문제가 있었다.
정전기가 없는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든 화약통은 가볍고 사용하기 간편했다.
총구에 꽂고 중간에 달린 단추만 누르면 정해진 양만 들어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조차 잘하지 못하는 바이킹들이 너무 많았다.
덩치가 큰 만큼 손도 커서 그런지 섬세한 작업에는 젬병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뭘 만드는 것 보면 진짜 신기하지 않아?'
'그러게. 배나 집 짓는 것 보면 끝내 주더라고.'
투박한 손으로 미세한 작업은 잘하지 못하지만, 거대한 나무를 자르고 집과 배, 가구를 만드는 일은 기가 막히게 잘했다.
또 다른 문제는 체격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바이킹이라고 다 큰 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훨씬 작았다.
그러다 보니 제식훈련은 엉망이었다.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준 이는 연이었다.
'화약통 대신 종이에 총알과 화약을 함께 넣어 주도록 해라.'
'조1 소총 탄환처럼 말입니까?'
'그건 뇌관이 들어 있는 거고. 이건 그냥 총알을 아래에 깔고 그 위에 화약을 넣어 밀봉하면 된다.'
그래서 지급된 종이탄은 사용이 간편했다.
입으로 종이탄 입구를 물어 뜨고 화약을 넣은 다음 종이 채 총알을 집어넣으면 끝났다.
또한 키가 아주 큰 바이킹은 포병으로 빼고.
키가 아주 작은 바이킹은 기마병으로 활용하라 했다.
"런던까지 얼마나 되지?"
"조선의 단위로 40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 점령하자. 그것이 우릴 보살펴준 조선의 태자께 보답하는 길이다."
"네, 폐하."
병사로 나선 바이킹만 20만 명.
그들을 따라나선 가족까지 더하면 모두 80만 명이 넘었다.
그 많은 수를 먹일 곡식과 고기를 실어 나르는 것도 큰일이었다.
엄청난 저장능력이 있는 새로운 조경함이 아니었다면 수송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퍼줬기에 칼 10세는 연을 하늘같이 받들어 모셨다.
하지만 민삼이는 불만이 많았다.
'전하, 굳이 저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까?'
'있지. 앞으로 저들은 우릴 대신해서 유럽 놈들을 박살 낼 거니 당연히 지원해줘야 한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너무 주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신대륙을 넘겨받는 값이라 생각하면 된다. 저들이 날뛰면 날뛸수록 신대륙에 진출해 있는 놈들이 돌아올 수밖에 없을 테니.'
잉글랜드 식민지야 칼 10세가 런던을 점령하면 끝날 일이다.
하지만 프랑스가 문제였다.
1605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신대륙 식민지 누벨프랑스.
어느새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오대호 중 하나인 온타리오호까지 확장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그러니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성질 급한 칼 10세가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요크(York)까지 3일 만에 진격했다.
요크 자체가 바이킹들이 요크셔 일대를 점령하고 세운 요르빅 왕국이다.
그래서인지 칼 10세가 당도하자 성문이 활짝 열렸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수척한 얼굴로 말을 타고 성에서 나오는 기사.
그를 보고 칼 10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아실지 모르지만 저는 토머스 페어팩스입니다. 이곳 요크 성을 관리하고 있는 영주입니다."
"반갑소. 페어팩스 경. 그런데 그대는 의회파 아니었소?"
"맞습니다. 한때 올리버 크롬웰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찰스 1세를 처형하는 걸 보고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 전부터 크롬웰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검은 톰(Black Tom)'이란 별명을 가진 토머스 페어팩스.
잉글랜드의 귀족이자 정치가이며 유능한 장군이다.
특히 기병을 지휘하는 데 있어 대단한 실력을 보였고, 용맹 또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부하였던 올리버 크롬웰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당할 뻔 했다.
워낙 전공이 컸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는 그때를 잊지 않았다.
요크셔의 하원 의원이었던 토머스 페어팩스는 칼 10세가 바이킹들을 데리고 잉글랜드로 온다는 말에 즉시 반기를 들었다.
이미 선동꾼들에 의해 민심이 들고 일어난 상황.
토머스 페어팩스는 깊이 생각한 끝에 칼 10세에게 붙기로 했다.
올리버 크롬웰이 집권하고 있는 잉글랜드는 미래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도 없는 나라 아닌가.
한때 잉글랜드 의회군 총사령관이었던 토머스 페어팩스.
자신과 같은 무장 출신 칼 10세라면 군주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봤다.
"그렇다면 나를 따르겠소?"
"당연히 그럴 마음이기에 이리 마중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폐하."
칼 10세는 소리를 내 웃진 않았지만, 무척이나 기뻤다.
토머스 페어팩스가 명장이라는 소문은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이가 자신을 따른다니.
'전하를 따르고 나서부터 내 운이 트이는구나!'
그전까지 모든 일이 살얼음판이었다.
그런데 연에게 복종을 맹세한 후로 모든 일이 다 잘 풀렸다.
막막했던 앞날이 밝게 빛났다.
"지금 놈들은 어디에 있소? 런던에 처박혀있는 건 아니오?"
"아닙니다. 폐하. 크롬웰은 그곳에 있지만, 아들 리처드는 셰필드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곳을 무너트리면 런던까지는 바로 진격하셔도 됩니다.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필드라···. 여기서 이틀을 쉰 후에 바로 쳐들어가도록 합시다."
"아닙니다. 폐하. 이곳보다는 리즈(Leeds)가 더 좋을 듯합니다. 리즈에서 한나절이면 셰필드까지 진격할 수 있으니 내일 그곳으로 간 후 전열을 정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흐음···."
토머스 페어팩스는 분명히 올리버 크롬웰의 정적이었다.
하지만 처음 본 그를 믿을 수는 없는 일.
"그러도록 합시다. 그대의 의견이 여러모로 좋을 듯하오."
"제 의견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당연한 것 아니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칼 10세는 요크 성 앞에 진을 친 후 바로 척후를 보냈다.
혹시라도 리즈에서 셰필드로 가는 길에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전하께서 돌다리도 두드려 본 후 건너가라고 하셨지.'
연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만 명이나 되는 바이킹들이기에 질 수는 없다고 봤지만, 정예가 아닌 급조된 오합지졸 아닌가.
만약에 패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신대륙을 얻기 위한 명분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런 상황이 싫기에 연은 칼 10세를 단단히 교육시켰다.
성질 급한 칼 10세가 급발진할 수 있기에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만약 패하면 너와 너의 바이킹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명심하거라.'
연의 말을 떠올린 칼 10세는 다음날까지 눈을 붙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모두 돌아올 때까지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폐하,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위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페어팩스 장군을 믿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제야 안심한 칼 10세는 다음날 리즈로 출발했다.
해안포를 피해 뉴캐슬에 상륙한 후 남쪽으로 진격하는 칼 10세의 바이킹들.
그들은 말로만 들었던 기름진 땅을 보았다.
요크에서 리즈로 가는 길.
끝도 없이 넓은 곡창지대.
하얀 양들이 뛰어노는 초원.
이곳이야말로 새로운 바이킹 제국이 될 땅이 아닌가.
그들의 가슴속에 희망이 자라고 있는 사이.
연은 함부르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