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브리튼 왕국(2) >
'단순한 눈을 감았을 뿐인데···.'
군중들이 조용해졌다.
그러니 칼 10세가 놀랄 수밖에.
'이놈들이 이럴 놈들이 아닌데···.'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후, 한동안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변함이 없는 곳.
그곳이 바로 거친 바이킹들이 사는 스톡홀름이었다.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이킹 전사들은 용맹을 넘어 무자비했다.
그랬기에 뭐하나 말하려고 해도 고성부터 지르던 이들 아닌가.
그런데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역시, 전하께선 대단하시군. 그 밑에 있는 자들 또한 보통내기들이 아니야. 그러니 대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겠지.'
칼 10세는 연과 조서원의 요원들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서원의 요원들이 했던 말을 생각하면서 서서히 눈을 뜬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힘차게 외쳤다.
-내 사랑하는 바이킹 전사들은 들어라!
-나! 칼 10세 구스타브, 그대들 앞에 당당히 말하겠다!
-나는 그대들과 함께 위대한 바이킹 왕국을 다시 세우겠다!
-나와 함께할 전우들은 나를 따르라!
"""와···!"""
뭘 어떻게 해서 세우겠다는 내용도 없었지만, 군중들을 함성을 질렀다.
칼 10세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연호(連呼)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나 반응이 좋다니.
덩달아 칼 10세도 흥이 났다.
-나는 우리 노르만 왕가의 피가 흐르는 요크 왕가를 잔혹하게 쳐죽인 랭커스터 왕가에 따지지 않겠다.
"""우···!"""
-그거야 전쟁에서 이긴 자가 하는 짓이니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복수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대들과 함께 복수할 생각이다.
칼 10세는 마이크를 벗어나 단상 끝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더니 거대한 도끼를 꺼내 높이 들고 외쳤다.
"나를 따르라! 나를 따라서 기름진 잉글랜드를 다시 차지하자!"
"""와···!"""
"그곳에는 왕도 뭐도 아무것도 없다!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다! 나를 따르라!"
"""와···!"""
"어차피 이곳은 조선의 땅이다."
"""우···!"""
"이곳에 남고 싶은 사람은 남고, 바이킹의 전사로 발홀에 가고 싶은 자들은 나를 따르라!"
"와···!"""
"기름진 브리튼 섬에 우리 바이킹 전사들의 왕국을 건설하자!"
"""와···!"""
연과 헤어진 칼 10세는 조서원의 요원들에게 선동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군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따르게 할 수 있는지.
그런데 그가 생각하는 것과 너무나 달랐다.
'선동의 기본은 바람잡이입니다. 선동당하는 대상은 무식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니 고상한 말은 쓰지 마십시오. 길게도 하지 마십시오. 알기 쉽고 간단한 말만 하셔야 합니다. 몸짓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효과를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열열한 군중들의 반응에 칼 10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정말 단순하군."
연과 계획을 짰지만, 어떻게 스웨덴 국민을 설득시킬지 막연했다.
그래서 연의 부하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
그랬더니 자신이 그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조차 따지지 않고 환호하지 않는가.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빌어먹을 세상은 요지경이군.'
자신 또한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데, 자신을 따르는 바이킹들은 더 단순했다.
'군중 사이에 끼어 있는 바람잡이의 효과가 이렇게나 대단하다니···. 이걸 군중심리를 이용한 선동이라고 했지.'
이렇게 호응하리라고는 상상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나 대단했다.
직접 목격하고 있는 칼 10세는 들고 있는 도끼를 꽉 움켜주고 휘둘렀다.
"""와···!"""
단순한 몸짓만으로도 환호하는 바이킹 전사들.
'생각보다 쉽게 잉글랜드를 정복할 수 있을 것 같군.'
칼 10세의 심장은 힘차게 뛰었다.
온몸에 뜨거운 피를 뿌리며 후끈한 열기를 퍼트렸다.
* * *
눈이 내리면서 겨울이 시작된 스칸디나비아반도.
발트해 연안을 따라 듬성듬성 조성된 마을마다 새로운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문은 깊은 산속까지 퍼졌다.
맹수조차 두려움을 느낄만한 깊은 산속.
땅을 파서 움막을 만들어 놓은 곳으로 누군가 올라오면서 소리쳤다.
"에베! 이제 숨어있지 않아도 돼!"
그러자 곰인지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든 거구가 기다시피 움막에서 기어 나왔다.
"뭐라고?"
"더는 숨어있지 않아도 된다고!"
"뭐! 핀란드 놈들이 물러갔어?"
"아니, 그게 아니라. 폐하께서 조선의 태자와 협상하셨데!"
"노아! 그게 무슨 말이야?"
헉헉거리며 움막으로 올라온 노아는 쉼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에베와 거의 비슷한 꼴을 한 자들이 악취를 풍기며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고약한 냄새에 코를 막고 손을 휘저은 노아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아주 중요한 정보라는 듯 속삭이듯 말했다.
"폐하께서 도망간 게 아니라 조선과 협상하러 가신 거래."
"그래?"
"응, 그렇다고 했어."
"그런데 그거하고 뭔 상관이야? 핀란드 놈들이 물러나지 않았다면서. 설마···?"
"맞아. 더는 핀란드 놈들이 우릴 쫓지 않을 거야."
그 말에 옆에 있는 자들이 놀라움과 희망이 섞인 눈빛으로 반응을 보였다.
"정말이야?"
"그 말 사실이지?
"그래?"
"정말, 핀란드 놈들이 우릴 추적하지 않는다고?"
"대체 무슨 협상을 했길래 핀란드 놈들이 포기한다는 거야?"
조선군에게 호되게 당한 에베는 무작정 산속을 헤맸다.
그러던 중 자신과 같은 처지인 스웨덴 패잔병(敗殘兵)들을 만났다.
'핀란드 민병대라고 말하는 자들이 설치고 다녀.'
'그럼 어떡하지?'
'잡히면 곱게 죽지 못할 거야. 그러니 산속으로 들어가자.'
어쩔 수 없이 에베와 패잔병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아무리 야생에 특화된 바이킹이라고 해도 무기와 소금 없이는 거친 스칸디나비아반도 산중에서 버티기는 힘들었다.
에베의 친구 노아가 간간이 찾아와서 먹을 것과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바로 내려가도 되는 거야?"
"그렇다니까. 폐하께서 오슬로로 전부 집합하라고 했어."
"뭐? 오슬로로 모이라고 했다고?"
"그래 그곳에서 집결한 후 잉글랜드로 쳐들어가자고 하셨어."
"그러니까 조선의 태자와 협상 했다는 게 이곳을 조선에 넘기고 우린 잉글랜드를 차지한다는 말이야?"
"응, 맞아. 그러니 어서 가자고. 이 빌어먹을 땅에서 어서 떠나자고."
"음···, 그렇다면 나쁠 게 없지."
세상과 단절된 에베와 패잔병들.
이제는 희망이 보였다.
*
이와 달리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은 소양은 들떠 있었다.
"드디어 내일 문을 연다는 거야?"
"그렇다니까 그러네."
"그런데 어떡하냐? 난 조선인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는데."
"그러길래 내가 뭐랬어? 어학당에 빠지지 말고 열심히 다니라고 했잖아."
"그러고 싶었지만, 돈 버는 게···."
"이런 바보를 봤나! 조선인이 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 젠장! 너에게 뭘 기대하냐? 내가 사가 지고 올 테니 필요한 것 있으면 말만 해."
다비트는 함께 사는 친구인 즈비그니에프를 보며 혀를 찼다.
자신은 먹고살 만큼만 일하면서 어학당을 착실하게 다녔다.
될 수 있으면 조선에서 온 사람들 밑에서 일하면서 말을 익혔다.
하루라도 빨리 조선인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즈비그니에프는 그러지 않았다.
평생 농노로 살면서 열심히 일했는데 먹는 것조차 부족했다.
그런데 해 떨어지기 전에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임금을 주지 않는가.
그것도 반짝이는 조선 돈으로 말이다.
그 맛에 즈비그니에프는 말이 안 통해도 일할 수 있는 철도나 도로 공사장에 하루도 쉬지 않고 나갔다.
물론 돈은 잘 벌었다.
하지만 이제 조선이란 나라가 통치하는 세상 아닌가.
그런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돈도 돈이지만, 조선말을 익히는 거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조선말을 못 한다고 차별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지만,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너도 빨리 조선인 시험에 합격해. 나도 결혼해야 하니까."
"알았어. 미안하다."
쉬는 날이라 얹혀사는 즈비그니에프가 비싼 삼겹살을 사 왔다.
"그냥 싼 닭고기나 사 오지···."
"감칠맛이 없잖아? 이렇게 쌈장에 찍어 먹으면 맛이 기가 막힌 데 웬 닭고기야 닭고기는. 그건 없었을 때나 먹는 거야."
"체! 우리가 언제 고기를 입에 덴 적이 있었나?"
"그건 그렇지만···."
"알아 너 맘. 고맙다. 고생해 번 돈으로 삼겹살 먹게 해줘서."
"고생은···, 전에 비하면 천국이지."
"그건 맞아. 생각해보니 정말 세상 좋아졌어."
조선군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것저것 억지 항목을 부여하며 악착같이 세금을 떼어가는 도적보다 무서운 관리나 병사가 없었다.
몸만 튼튼하다면 일자리가 넘쳤고, 일을 하면 즉시 임금을 줬다.
배고픔도 사라졌다.
몸이 아프거나 일할 수 없는 노약자들은 수시로 돌아다니는 조선 관리들이 알아서 챙겨줬다.
하지만 남의 것을 훔치거나 주먹을 휘두르면 가차 없이 처벌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조선의 관리들을 보고 '천사장'이라 불렀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가브리엘, 미카엘, 라파엘 3명의 천사장처럼 선과 악을 확실히 집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 뭐냐?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데 밥심이 최고라고 하던데 그게 뭐야?"
"아 그거, 쌀이 밀보다 더 힘을 낼 수 있다는 말이야."
"그래? 그럼 우리도 앞으로 쌀밥을 해 먹을까?"
"어떻게 하는지 알아?"
"아니?"
"낼 어학당에 찾아가서 물어봐야겠네."
어느새 인구가 5만 명이 넘어버린 소양.
서역의 중심 도시답게 급격하게 커나갔다.
그러면서 조선의 문화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 * *
웬만해서는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잉글랜드 연합의 중심 도시 런던.
그곳에 프랑스의 재상인 쥘 마자랭의 심복 장바티스트 콜베르 프랑스 재무장관이 찾아왔다.
"어서 오시오. 그러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소."
"처음 뵙겠습니다. 호국경 폐하."
"폐하라? 그대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법을 아는군요."
찰스 1세의 목을 베고 잉글랜드의 권력을 움켜준 올리버 크롬웰이 기쁜 듯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지배하시는 잉글랜드 연합의 수장인 호국경 아니십니까. 그러니 당연한 칭호입니다."
"말이라도 고맙소. 그런데 무슨 중요한 일이요. 이곳까지 직접 찾아와서 말하겠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소. 우리 잉글랜드 연합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고 했는데···."
"폐하, 저도 첩보만 듣고 확인해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중대 사안이라 급히 찾아뵙습니다."
"그래요?"
"네, 폐하. 아무래도 바이킹 놈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바이킹 놈들은 조선에 까불다가 다 죽은 게 아니요?"
바이킹이란 말이 호국경은 기겁했다.
끊임없이 잉글랜드를 침략했던 바이킹들.
끝내 나라까지 세웠다.
장미전쟁에서 프랑스의 도움으로 랭커스터 왕가가 요크 왕가를 처단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잉글랜드는 바이킹들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바이킹들이 다시 쳐들어온다니.
순간 머리가 띵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에 어질어질했다.
그만큼 바이킹이란 말은 공포였다.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칼 10세가 조선의 태자와 거래를 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칼 10세가 조선에 온전히 스웨덴의 왕좌를 넘겨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까지 털어 조선의 무기를 사들였다고 했습니다."
"뭐···? 조선의 무기를?"
"그렇습니다. 폐하."
"크흠. 그래서 칼 10세가 우리 잉글랜드를 침략할 거란 말입니까?"
"네, 폐하."
"확실한 겁니까?"
"확인은 못 해 봤으나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런···."
호국경은 답답한지 물 주전자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막힌 속이 뚫리지 않았다.
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을 통치하고 있는 올리버 크롬웰이지만, 조선의 무기로 무장한 바이킹들이 쳐들어온다면 대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1651년 중상주의 정책을 보조하기 위해 올리버 크롬웰은 항해조례(航海條例)를 제정했다.
오직 잉글랜드와 잉글랜드 식민지 배만 잉글랜드 식민지로 상품을 옮길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식민지 무역 이권을 네덜란드로부터 지키기 위해 법제화 한 것이다.
최소한 선원 절반은 잉글랜드인이어야 하고.
담배, 설탕, 직물은 잉글랜드만 팔 수 있고.
식민지로 향하는 모든 상품은 잉글랜드를 거쳐 세금을 내고 가야 한다는 잉글랜드와 잉글랜드인들을 위한 항해조례.
그만큼 잉글랜드 연합은 네덜란드를 상대로 해군력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스웨덴의 바이킹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있는 50척이나 되는 전함은 잉글랜드 연합이 어찌해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강력한 전함 대부분이 수장된 지 모르는 프랑스 재무장관 장바디스트 콜베르가 조심히 의견을 제시했다.
"네덜란드와 손을 잡는 건 어떻겠습니까? 폐하."
"그들이 하겠소. 설사 연합한다고 해도 승산이 없소."
"그럼 해전으로는 안 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요. 전처럼 해안포에 의지할 수밖에···."
"그러다 상륙이라도 허용하시면···."
"크흠···"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잉글랜드 연합.
사실은 그러지 않았다.
무적함대가 사라진 스페인이지만, 지중해함대가 남아 있었고, 붙어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해적 출신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승전했다고 하지만, 정면으로 붙어서 이긴 게 아니었다.
잉글랜드와 전투 중 침몰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81척 중 단 3척이었다.
결코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전략이 우수하거나, 잉글랜드 전함이 빠르고, 함포의 사정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도망가는 잉글랜드 전함을 쫓던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병신 짓을 해서 태풍을 만나 자침한 거였다.
소형 함선으로 이루어진 잉글랜드 함대.
스페인 무적함대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화약 고갈로 회항할 수밖에 없었고 해안포로 대신 견제했다.
그런 잉글랜드 함대가 어찌 바이킹 전함을 상대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었다.
잘해야 네덜란드나 상대할까.
그것도 견제 정도였다.
누구보다도 잉글랜드 함대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는 올리버 크롬웰 호국경.
심각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