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브리튼 왕국(1) >
새벽이 돼서야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연은 탁자에 놓인 꿀물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 모습을 보고 꿀물을 가지고 온 민삼이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지 않고 기다렸느냐? 앞으로 그럴 필요 없다."
"아닙니다. 전하께서 주무시지 않는 데 제가 어찌···."
연은 피곤해 보이는 민삼이를 보고 씩 웃었다.
"다른 이도 있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너는 아침부터 할 일이 많지 않으냐?"
"그래도···."
"효율적이지 않으니 앞으로 그러지 말거라."
"네. 전하."
연은 여름 휴가 때 문식이와 함께 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둘이 번갈아 가며 운전을 하는데 서로의 의견이 달라 다투었다.
'아니, 내가 운전하고 있는데 옆에서 코 골며 자는 매너는 뭐냐?'
'네가 피곤하면 내가 운전해야 하잖아. 그러니 자야지.'
'뭐?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눈 뜨고 있어야 해?'
'그래야지.'
그러다 둘 다 피곤하면?'
'그냥 길가에 차 대놓고 자며 되지.'
'너무 비효율적 아니냐?'
'효율을 따지기 전에··· 그 뭐냐? 맞아 의리라는 게 있고 예의라는 것이 있잖아?'
'여기서 의리와 예의가 왜 나오냐?'
휴가철 정체로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고속도로에서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
결국 가위바위보로 결정했다.
그 후로도 둘이 여행을 떠날 때면 미리 가위바위보로 결정한 후 운전 시 행동 지침을 정했다.
"살아 있나 모르겠네···."
"네? 누구 말씀입니까? 전하."
"아, 아니다. 혼자 생각하는 거다."
"네, 전하."
공식이와 문식이.
둘도 없는 친구지만, 다른 게 많았다.
'아니 부어버리면 어떡해?'
'어차피 다 먹을 거잖아?'
'그래도 눅눅해진단 말이야.'
탕수육을 먹을 때도 공식이와 문식이는 다퉜다.
단무지에 식초를 치는 것 때문에도 문제가 있었다.
아무튼 식성까지 다른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보고 싶네.'
생각해 보니 다시 태어난 삶에서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왕이란 외로운 자리인데 왕이 되려고 하는 자는 도대체 뭔 생각일까?'
왕손으로 태어난 연은 어릴 때부터 또래와 지낸 적이 없었다.
눈뜨기 전부터 생각한 것이 있었기에 그것만 보고 달렸다.
생각한 이상으로 모든 것이 빠르게 자리 잡아가자 연은 왠지 울적했다.
아마 칼 10세 때문인 것 같다.
'열망이 대단한 사람이야.'
정혼자인 크리스티나 알렉산드라 여왕과 혼인하지 못하고 기다리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칼 10세.
끝내 스웨덴의 왕좌를 차지했다.
그만큼 열정적인 칼 10세가 연을 군주로 인정하며 꺼내 놓은 말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전하, 신대륙으로 가시는 이유가 야코프 때문입니까?'
'그렇소. 그자를 꼭 잡아야만 하오.'
'그렇다면 뉴스웨덴을 가십시오.'
'뉴스웨덴?'
'네, 전하. 신대륙에 스웨덴의 식민지가 있습니다. 저는 그곳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야코프의 연락책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북미에 스웨덴의 식민지가 있다는 말에 연은 눈만 깜빡거렸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뉘아스베리예'라고도 부르는 뉴스웨덴은 델라웨어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윌밍턴이었다.
1638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명에 따라 스웨덴은 그곳에 식민지를 세웠다.
그곳에 크리스티나 요새(Fort Christina)를 짓고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칼 10세의 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연은 막연했다.
신대륙으로 도망간 야코프를 잡기 위해 새로 건조한 함대를 암스테르담으로 불렀다.
하지만 어디로 가서 어디부터 수색해야 할지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북미 동부 해안의 요지인 윌밍턴에 스웨덴의 식민지인 뉴스웨덴이 있다니.
연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고맙소.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소.'
'아닙니다. 전하. 나 칼 10세 구스타브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습니다. 전하를 주군으로 모시기로 했으니 전하께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받치겠습니다.'
복스럽게 생긴 칼 10세는 저돌적인 사나이였다.
그랬기에 포로로 잡혀 왔어도 연을 보고 기죽지 않고 대들었던 거다.
이미 조선의 영토로 확정된 스웨덴.
스웨덴의 식민지라면 조선의 땅이다.
그러니 이젠 북미에 발을 디딜 확실한 명분이 생겼다.
'바로 출발하실 겁니까? 전하.'
'아니요. 그대와 그대의 백성이 브리튼섬에 자리 잡을 때까지 지원한 후 갈 겁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어떻게 영국 땅을 공략할 것인지.
야코프는 어떻게 잡을 건지.
상의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새벽이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뉴스웨덴이 지금 어떻게 되어 버렸는지.
칼 10세가 꺼낸 말 때문에 앞으로 네덜란드는 곤욕을 치를 것이다.
아침부터 코메니우스에게 역사강의를 받고 새벽까지 칼 10세와 작전을 짠 연은 힘든지 한숨을 내쉬었다.
민삼이가 그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되는지 물었다.
"전하, 주무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맑구나."
"그럼 꿀물을 한 잔 터 타올까요?"
"커피나 한잔 가져오너라."
"네, 전하."
태어난 후로 간간이 술을 마셨지만, 오늘처럼 과음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속이 더부룩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진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나자 민삼이가 물었다.
"그런데 전하, 굳이 그런 자에게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 자일수록 뒤통수를 치지 않을 거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아니면 말고."
"네?"
"사람의 속을 어찌 알겠느냐? 특히 야망이 있는 자인데. 서로 주고받으면 되는 것이지."
"그런가요?"
"그렇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민삼이를 보고 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걸린 지도로 걸어갔다.
"여기 그려진 땅덩이가 얼마나 기름진 곳인지 아느냐?"
"저야···."
"풍요로운 곳이다. 그래서 차지해야만 한다.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면 우리 조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 정도입니까?"
"그 이상이지."
연의 말에 민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조선이 확보한 땅은 끝도 없이 넓었다.
그런데 바다 건너 야만인이나 산다는 땅을 탐내다니.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곳이면 바로 점령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단다."
"네? 저 넓은 예맥의 땅도 얻어 내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명분이 있었고, 그곳은 사람이 살기 힘든 불모지였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이미 유럽 놈들이 진출해 있는 곳이다. 그러니 놈들을 설득해서 얻어 내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우리 조선이 놈들처럼 약탈을 하면 되겠느냐?"
"아닙니다. 우리 대조선은 도적놈들과 다릅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미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내용이다.
때문에 인제 와서 바뀔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나중에라도 틀림없이 문제가 발생할 것 같았다.
'다민족 국가가 되어 버린 조선을 지키려면 자라라는 아이들에게 확실한 명분을 세워줘야 해.'
역사를 잘 모르고, 인문학을 배운 적도 없고, 공돌이였던 연이지만, 국민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 줄을 알고 있었다.
'그게 없으면 무너져 버릴 거야.'
조선인 모두가 명분 없이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왕실 기업인 조선전력공사가 조선 땅 대부분을 독차지할 수 있지.'
그 누구도 아닌 연에 의해 개척된 땅이기에 소유권은 연이 사주로 있는 조선전력공사에 있다.
이런 정당한 명분이 없다면 후세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연은 기득권이라 말하는 다수이자 소수인 그들을 절대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꿈꾸는 세상은 21세기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이익을 위해 뭉치면 악마보다 더 한 짓을 하는 게 사람이지.'
아무튼 연은 자신부터 명분을 확실히 챙겨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칼 10세를 지원하는 것이다."
"아···."
민삼이는 이제야 이해가 됐다.
왜 연이 유럽 역사를 공부하고 칼 10세를 이용해서 영국을 점령하라고 하는지.
거기다 칼 10세를 부추겨서 프랑스를 침공하라고 하는지.
머릿속이 개운하게 정리되었는지 민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그런데 만약 주지 않는다고 버티면 어떻게 합니까?"
"별수 있나. 전부 가질 수 없으면 갈기갈기 찢어 놓기라도 해야지."
생각 같아서는 싹 밀어 버리고 차지하고 싶지만, 역량이 되지 않았고 문제도 많았다.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어찌할 것인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연은 태평양을 건널 수 있는 조경함을 만들어 놓고도 북미 대륙에 진출하지 않았다.
'어차피 서부야 동부만 정리하면 차지할 수 있는 곳이지.'
코메니우스에게 들은 말로는 스페인 도적 떼가 벌써 플로리다까지 진출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스페인이야 원주민들을 명분 삼아 처리하면 되지.'
말에 어폐(語弊)가 있지만, 연은 그 정도는 무시하기로 했다.
직접 원주민을 공격해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상관없다는 견해다.
'일일이 따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후세를 생각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북미 대륙을 손에 넣어야 한다.
그만큼 북미 대륙과 비교할 만한 땅은 지구상에 없었다.
"그런데 전하, 정말 저곳이 그렇게나 좋은 곳입니까?"
"암, 저곳을 개간하면 전 세계 사람들을 모두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을 얻을 수 있단다. 아니지, 지금보다 5배나 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지."
"네?!"
민삼이가 본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조선의 인구는 5천만 명 정도이다.
전 세계의 인구는 그보다 10배나 많은 5억 명 정도가 살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5배나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땅이라니.
자신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뿐만 아니다. 저곳은 기후도 좋고 캐기 쉬운 자원도 널려 있단다."
"그럼 꼭 차지해야겠습니다."
"그래야지."
서서히 떠오르는 햇살이 창을 통해서 지도위 북미 대륙을 밝혔다.
이미 북미 대륙에 진출하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그래서 연은 두 나라가 서로 싸우게 만들 계획을 세웠다.
복덩이 칼 10세를 내세워서 말이다.
'그래야만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는 오대호로 가는 길을 확보할 수 있지.'
연이 태어나기 전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 대륙 동쪽 해안을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그 정도는 알고 있기에 연은 북미 진출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제 때가 됐지.'
그러니 칼 10세가 빠르게 브리튼섬을 정복하고 프랑스를 공격하게 할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더는 북미에 지원하지 못하겠지."
연이 지도를 보며 중얼거리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민삼이는 괴롭기만 했다.
비서실장이자 조선전력공사의 이인자인 은쌍식이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이해할 만하면 딴소리를 하는 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 * *
다시 스톡홀름으로 돌아온 칼 10세.
마을 광장에 스웨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단상 위에 올랐다.
조선군이 마련해준 마이크 앞에서 칼 10세는 두 주먹을 쥐고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육중한 몸인데 양팔을 벌리자 거대한 곰처럼 압도적인 위압감을 표출했다.
"""와···!"""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칼 10세는 두 손을 저어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든 후, 마이크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사랑하는 너희들을 두고 떠난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들이 더 좋은 곳에 살 수 있게 하려고 목숨을 걸고 조선의 태자와 담판을 지었다.
-그래서 얻어 냈다.
"무엇을 말입니까?"
계획된 바람잡이가 큰 소리로 군중들 사이에서 물었다.
-조선의 총이다!
-난 내 전 재산을 털어 조선의 총을 샀다.
뜬금없는 칼 10세의 말에 군중들은 수군거렸다.
이미 스웨덴군은 조선군에 패했고, 스톡홀름은 조선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총을 팔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너희들조차 믿지 못 할 일을 내가 해냈다.
"이유가 뭡니까?"
"조선과 다시 싸우기라도 할 겁니까?"
"그건 안 됩니다. 핀란드 놈들이라면 모르지만, 조선군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 말에 군중들은 비아냥 섞인 말을 하며 동조했다.
전장에서 죽은 걸 최고로 치는 바이킹이지만, 조선군하고는 안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강한 자에게 복종하는 관습이 있는지, 이번 전쟁에서 수많은 스웨덴 병사들이 죽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문화였으니 농사짓기 힘들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이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제2차 북방전쟁에서 이긴 연합국이 되려 점령한 땅을 스웨덴이 돌려줬던 것 아닐까.
아무튼 칼 10세는 개의치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금 잉글랜드 연방이 어떤 상태인지.
칼 10세의 말에 군중들은 웅성거렸다.
"저게 뭔 말이야?"
"아, 올리버 크롬웰이란 의원이 찰스 1세 목을 치고 잉글랜드를 차지했다는 말일 거야?"
"그래? 어떻게···?"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 같으니 들어보자고."
물론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미리 심어 놓은 바람잡이들이다.
-원래 브리튼 섬 북부는 우리 바이킹들의 땅이었다.
-그런데 간악한 랭커스터 놈들이 프랑스 놈들을 끌어들여 우리 바이킹의 피가 흐르는 요크 가문을 멸살시켰다.
-그래서 난 깊이 생각했다.
칼 10세가 눈을 감고 고개를 쳐들자, 군중들은 숨을 죽이며 뒷말이 나오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