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복덩이(3) >
가냘픈 기둥과 넓은 창을 가진 고딕 양식과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이 공존하는 바벨성.
접견실은 벽난로와 백열전구의 불빛이 어울려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뚜벅! 뚜벅!
한쪽에 퍼질러 있는 칼 10세가 발소리를 듣고 슬쩍 눈을 떴다.
"크흠···."
연을 보더니 눈을 감아버리는 칼 10세.
단단히 심통이 나 보였다.
"무엇이 그리 맘에 들지 않는 거지? 살고 싶다고 해서 살려 줬더니 싫나?"
유창한 독일말에 놀랐는지 칼 10세가 다시 눈을 번쩍 떴다.
흥미롭다는 듯 연을 바라보는 칼 10세.
인상을 찌그리더니 실룩거리는 입으로 주절거렸다.
"도대체 네놈이 못하는 게 뭐냐?"
"없어."
"크흠···."
왠지 슬퍼 보이는 칼 10세의 눈동자.
잠시 흔들리더니 다시 부릅뜨며 고정되었다.
"하나만 묻자?"
"뭐든지."
"왜 하지 않는 거지?"
"뭘?"
"그게···."
"세계 정복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칼 10세를 보며 딱딱한 나무 의자에 몸을 실은 연은 묘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칼 10세가 비꼬듯 말을 건넸다.
"알면서 하지 않는 거군, 나라면 벌써 끝냈을 건데"
"나는 네가 아니잖아. 그리고 그 짓을 해봐야 뭐 할 건데?"
"그 짓이라니?"
"쓸데없는 짓거리지."
"쓸데없는 짓거리라니!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었나? 이미 충분히 남긴 것 같은데? 아닌가?"
"이, 이···."
벌떡 일어난 칼 10세.
붉어진 얼굴과 입에서 욕지거리라도 튀어나올 만한데 그러지 않았다.
통돼지 같은 육중한 몸을 일으킨 칼 10세는 기운 빠진 손짓을 취하더니 '퍽'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새 연을 수행하던 검수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모를 거야. 모든 걸 가졌으니···."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너는 조선이 어떤 나라였는지 아나?"
"당연히!"
이제 유럽에서 조선의 역사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일본을 통해 알려진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
절대 작지 않았다.
조선을 감추려고 일본인이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조선은 인구만 해도 1천만 명이 넘는 대국이었다.
열병기가 없던 중세 시대에도 조선과 싸워 이길 만한 나라는 유럽에 거의 없었고, 근세 시대에도 그랬다.
그런 조선이 우수한 화기를 바탕으로 급속하게 커지면서 알려졌다.
예맥의 땅에서 루스 차르국을 몰아내고 예맥 대륙 중앙을 차지했다는 것을 이제는 모르는 학자가 없었다.
칼 10세 또한 군주였기에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80만 명도 안 되는 인구를 가진 스웨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조선.
때문에 연이 저렇게 당당하다고 생각하는 칼 10세는 핏덩이처럼 어려 보이는 연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거 아나?"
"뭘 말인가?"
"네가 생각하는 조선은 그쪽 동네에서는 작다는 사실을."
"뭐?"
"바로 옆에 10배나 더 큰 제국이 있었지. 또한 바다 건너에는 훨씬 인구가 더 많은 해적들의 소굴이었고."
"그,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기 위해 별짓을 다 했지. 제국의 눈치를 보면서 제국을 숭상하며 아부하는 관리들이 대부분이었던 곳에서 왕이 살아남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나?"
"거, 거짓말!"
칼 10세는 믿지 않았다.
자신도 추밀원의 의원들에게 견제를 받아봐서 알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조선이 커질 수는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조선이 그런 시절이 있었다니,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믿기지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었어. 해적 놈들이 쳐들어와 조선의 국토는 완전히 망가졌지. 또한 북쪽에서 말 탄 도적놈들이 쳐들어와 조선의 왕은 이마가 깨지라고 머리를 숙였지."
"그런데 어떻게? 말도 안 돼!"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칼 10세.
연이 한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너는 모를 거야 강한 주변국이 심심하면 쳐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악몽 같다는 걸."
"크흠."
"난 그래서 바이킹이 싫어. 다 죽이고 싶었지. 모두 죽여서 발트해에 처넣을 생각이야."
"이, 이!"
기분이 상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칼 10세.
연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어느새 검수의 칼이 그의 목덜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섬뜩한 칼날 빛에 놀라 급히 몸을 뺀 칼 10세는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 뒹굴었다.
'꼴값을 떠네'하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연이 다시 의자에 앉은 칼 10세에게 말했다.
"흥분하지 말고 잘 들어."
처음 본 조선 무사의 칼 솜씨에 놀란 칼 10세는 검수와 연을 번갈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네놈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기회를 줄 생각이야. 생각 같아서는 사지를 분리해 버리고 싶지만, 못난 네놈에게 기획을 주지."
"크흑···."
칼 10세의 병사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왜 그가 조선에 대항했는지 알아냈다.
그건 바로 연에 대한 시기와 질투, 증오였다.
잘난 조선의 태자.
그것도 어린.
그런 이가 조선군 총사령관이라니.
칼 10세는 인정하기 싫었다.
자신은 어땠는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기다린 끝에 스웨덴의 왕좌에 올랐지만, 조선군이 나타난 통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
그래서였다.
죽더라도 깨갱은 해보겠다는 치기로 조선에 대항한 것이었다.
잘하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적이나 다름없는 바이킹 전함 50척과 5만 명이 넘는 전사들이라면 해볼 만할 것 같았다.
하지만 조선군이 스웨덴을 치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알아본 정보는 달랐다.
이 모든 걸 조선의 태자가 이룬 것이라니.
믿기지 않았지만,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서 칼 10세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도주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하지만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이 이렇게 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연 때문이란 걸 조금이라도 먼저 알았다면 절대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았을 건데···.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렸다.
아무튼 이 모든 건 통신이란 게 발달하지 않은 세상이기에 한정된 소문을 가지고 추측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무슨 말이지? 나에게 기회를 준다니?"
"난, 너같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타인의 삶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놈을 증오하지. 하지만 그런 놈이라도 쓸 데가 있다는 걸 알았어."
"뭐!"
"내가 흥분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크흠···."
"예로부터 너희 바이킹 놈들은 약탈과 살인 방화를 좋아했더군. 그래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나와 내 부하들을 풀어 주겠다고? 어디로?"
연은 개새끼를 부르듯 칼 10세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다가온 칼 10세를 보더니 연은 가지고 온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이곳이 탐나지 않나? 너희 바이킹족들이 수도 없이 공략했던 곳인데?"
"잉글랜드?"
연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고 죽으란 소리군."
"설마? 내가 널 살려주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할까?"
"그럼 어떻게? 나에겐 아무것도 없는데."
"너에겐 5척의 바이킹 전함이 있고 나에게는 포로로 잡은 3만 명의 바이킹 전사가 있지."
"그걸로 저기를 칠 수 있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왜? 5만 명으로 나에게 덤비려 했잖아?"
"그거야 내가···. 크흠."
요새나 다름없는 스톡홀름을 믿고 조선군을 끌어들인 다음 몰살시킨다는 계획은 허황된 꿈이었다.
"이봐! 이미 지나간 일은 제쳐두고 앞날을 생각하자고. 정말 자신 없나?"
"자신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야. 하지만 나에게 무기를 지원해 준다면 가능하겠지."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그래 내가 무기를 지원해 준다면 자신 있단 말이지?"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좋아, 그렇게 하지."
연은 손가락을 튕겨 오스만제국과 신성로마제국에 팔고 있던 조선의 수석총을 가져오게 했다.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칼 10세는 매끄러운 조선의 수석총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대포는?"
"거둬들인 것을 모두 돌려주지. 그대의 백성들과 함께."
"그런 조건이라면 해볼 만하지."
야망이 큰 칼 10세는 연의 말에 활짝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연은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진짜 복돼지가 따로 없군."
수석총의 총신을 쓰다듬는 칼 10세는 희망이 치솟는 걸 느꼈다.
'이런 총이라면 해볼 만하지.'
비록 조선군이 사용하는 후장식 총은 아니지만, 매끈한 철로 된 총신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조건이 너무나 좋았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모르지만, 받지 않는다면 천하의 바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라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칼 10세이기에 너무 쉽게 말하는 연을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군주로 모셔야 하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단지 몇 가지 조건만 들어 주면 돼."
"그 조건이 뭐지?"
"잉글랜드 연합을 통합하면 이곳 노던 제도(Northern Islands)를 조선에 넘겨줘. 원래 노르웨이 영토였잖아."
"그거야 알지만, 왜 내가 허튼짓이라도 할까 봐?"
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북해 유전을 완벽하게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영국 북쪽 끝에 있는 군도인 오크니 제도(Orkney Islands)와 셰틀랜드 제도(Shetland Islands)는 둘을 합해 노던 제도라 부른다.
17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두 제도는 원래 노르웨이의 영토 일부였다.
15세기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이었던 크리스티안 1세는 딸 마거릿 공주를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3세에게 보내면서 지참금 대신 두 제도를 담보로 맡겼다.
하지만 지참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코틀랜드 영토가 되었다.
이곳을 조선의 손에 넣게 되면, 칼 10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한 후에도 헛수작을 하지 못할 거로 봤다.
"그 정도야··· 알았다. 그것뿐이야?"
"아니."
"설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조선은 타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원칙이니."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뭐야?"
총을 손에 쥐자 힘이 나는지 칼 10세는 다그치듯 물었다.
"아일랜드를 독립시켜 주고 맨섬(Isle of Man)을 조선에 넘겨."
"꼭 그래야만 하나?"
"응.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무슨 이유인지 들어보고 싶군."
연은 코메니우스에게 들었던 영국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따라서 네가 아일랜드를 가지고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어. 그러니 독립시켜 주는 게 좋을 거야."
"단지 그 이유뿐인가?"
연은 빙긋 웃으며 지도 한쪽을 가리켰다.
"앞으로 이곳으로 사람들을 보내지마. 그리고 이곳을 조선에 넘기고. 너 힘으로는 이곳을 관리할 수도 없잖아. 그곳보다는 차라리 이곳이 더 탐나지 않아?"
"탐이야 나지. 하지만 어느 세월에?"
"그거야 네가 하기에 달렸지."
"하지만 명분이···."
"명분이라···, 네가 언제 그런 걸 따졌냐?"
"크흠."
만약 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북방전쟁을 일으켜 유럽 전역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을 칼 10세이기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명분을 들자면 장미전쟁 때 놈들이 끼어든 걸 이유로 들면 되겠지."
1455년부터 1485년 사이에 벌어진 브리튼섬에서 두 왕가가 벌인 전쟁이 장미전쟁이다.
아일랜드섬과 마주 보고 있는 웨일스 지방의 랭커스터 왕가는 북은 장미를 표시로 삼았고.
요크셔를 지배하고 있는 요크 왕가는 흰 장미를 표시로 삼았다.
장미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에서 요크 왕가는 프랑스를 등에 업은 랭커스터 왕가에 패하고 거의 괴멸해 버렸다.
요크셔는 바이킹들이 세운 요르빅 왕국의 터전이기에 칼 10세는 충분히 명문을 만들 수 있다.
"네가 보내 달라고 한 곳도 그곳이니, 그곳에서 세를 모아 통일한 후 바다를 건너가면 되겠군."
"대단하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난 그냥 밀어붙이려고만 했는데···."
"너희야 빌어먹을 야만인들이지만, 조선은 예의 민족이거든. 명분 없이는 움직이지 않지."
"흥! 허울 좋은 명분 따위야···!"
"그래도 명분이 있으면 다를걸?"
"무엇이?"
"타국이 관여하지 못하지."
"그, 그게···."
별말이 아닌 것 같지만, 생각해보니 연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아무리 이익을 바라보고 타국의 전쟁에 끼어드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명분이 있는 곳에는 쉽게 끼어들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장미전쟁이 일어난 이유도 사소하지만 왕위 계승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가 랭커스터 왕가를 지원한 이유도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를 알고 있던 칼 10세는 연이 왜 이리 명분을 내세우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던 칼 10세.
순간 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 칼 10세 구스타브는 죽는 날까지 조선의 태자이신 그대를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는 하늘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연은 손바닥을 양쪽으로 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무 뜬금없었기 때문이다.
절대 기가 죽지 않을 것 같은 칼 10세가 이리 돌변하다니.
'즉흥적인 자로군.'
제2차 북방전쟁을 일으켰던 칼 10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할 때도 3일 만에 결정하고 시행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3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도 그의 과감한 행동과 열정은 식지 않았다.
이런 자가 자신을 따르겠다니 연은 활짝 웃으며 칼 10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소. 단지 그대의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랄 뿐이오."
"아닙니다.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해주신 주군께 감사드립니다."
굴러들어온 복덩이이자 정열의 사나이인 칼 10세와 앞날을 기약한 연은 앞으로 어떻게 영국을 요리할지 밤을 새워 작전을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