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복덩이(2) >
보름 전.
연은 바벨 성에서 코메니우스를 만났다.
조서원의 요원들이 조사한 내용을 정확히 알고 싶었던 연은 영국 역사에 관해 잘 아는 학자를 모셔오라 했다.
따로 역사학자가 없던 시대라 요원들은 체코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교육자이자 종교 개혁가였던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를 데리고 왔다.
"위대한 대조선의 태자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른 체형에 꼬장꼬장하게 생긴 코메니우스가 더듬거리며 조선말로 예를 올렸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은 밝게 웃으며 독일말로 인사를 건넸다.
아담 샬에게 독일어를 완벽히 배웠던 연의 말에 코메니우스가 깜짝 놀랐다.
조선의 태자가 천재라고 하더니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전하. 독일말이 유창하십니다."
"아담 샬 신부님께 배웠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제가 비록 종교 개혁에 앞장서고 있지만, 아담 샬 신부님은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잘 계십니까?""네, 아직도 정정하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동남 예맥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코메니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넌지시 말을 건넸다.
"태자 전하, 그러지 않아도 전하를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네, 전하. 저는 교육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대조선은 제가 생각하고 있던 교육을 벌써 시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궁금해서 알아보았는데 이 모든 것을 전하께서 주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혹시 초등학교를 말하는 겁니까?"
"네, 전하. 바로 대조선에서 운영하고 있는 초등학교가 제가 꿈꾸던 교육 제도입니다."
"아···."
갑자기 교육에 관심을 보이는 코메니우스.
연은 이제야 생각났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이라 했더니···.'
그는 바로 '근대 교육의 창시자'라 말하는 코메니우스였다.
'지식의 사랑'이라는 아모스(Amos)란 별칭을 가진 코메니우스는 교육 사상가가 되기 이전에 종교인이었다.
24살 젊은 나이에 썩어 문드러진 가톨릭에 반하여 폴네크에서 목사로 지낸 그는 조국인 보헤미아가 전쟁에서 패하자 세상을 떠돌았다.
42년간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조국의 독립과 교육에 대한 뜻을 펼친 코메니우스의 명성은 대단했다.
1641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북미에 최초로 세워진 하버드 대학교에서 총장 제의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기에 조서원에서 모셔 온 거였다.
'근대 교육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코메니우스는 자연의 순리와 같은 교육을 꿈꿔왔다.
그런데 그런 꿈 같은 일을 시행하고 있는 나라가 있었다.
바로 조선이었다.
초등학교에서 보편적인 원리를 먼저 가르치고,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은 나중에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조선의 교육 제도.
바로 코메니우스가 구상한 교육 제도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전하."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걷지도 못하는 데 뛰는 자를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아···, 감동입니다. 전하."
자신이 평생 생각해왔던 교육 제도를 단순한 표현으로 설명하는 연을 보고 코메니우스는 감탄했다.
그 뒤로 그의 입은 쉬지 않았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과 간결한 대답.
몇 번이나 차를 마신 후에야 진정됐다.
한참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묻던 코메니우스가 미안했는지 본론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이루고자 한 교육 제도를 듣다 보니 잠시 정신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에 대해 알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번에 일어나 토벌 전쟁을 아십니까?"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대조선에 넘겨준 스웨덴의 왕좌를 칼 10세가 내놓지 않아 일어난 정쟁 아닙니까?"
"정확히 알고 계시군요."
조선이 스웨덴까지 정복했다는 소문을 모른 이는 유럽에서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코메니우스만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대조선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네, 전하. 대조선은 명분 없이는 타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세계를 정복하고도 남은 무력을 가진 대조선이지만, 지금까지 타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명분 없이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흠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음···, 조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군요."
"학자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길쭉한 매부리코를 가진 코메니우스라 인상 자체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 관한 일이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브리튼 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고 싶어서 이리 모셔 온 겁니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올리버 크롬웰 호국경(Lord Protector)이 집권하고 있는 것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어찌 왕이 아닌 자가 그런 일을 행할 수 있는지···."
"그곳은 다른 곳과 좀 다릅니다. 원주민이라 할 사람이라곤 남아 있지 않은 곳이고, 힘 있는 자가 지배하던 곳이었으니 당연하지요."
"네?"
역사를 잘 모르는 연이기에 영국에 관한 내용은 단편적이었다.
그래서 연은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박살 낸 후 해양을 지배한 영국이 계속 잘 나갔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연이 알고 있던 영국에 대한 역사는 산업혁명 이후였다.
그전까지 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으로 이루어진 영국은 수많은 봉건 세력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로마가 브리튼섬을 침공하기 전까지 그곳에는 켈트족의 일파인 브리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 살았던 원주민들은 멸망하고 사라져 버렸죠."
"아, 그렇습니까?"
"네, 전하. 로마가 지배한 후 다시 색슨과 앵글족이 터를 잡았고, 다시 바이킹들이 끊임없이 쳐들어왔습니다."
중석기 시대 말까지 유럽과 연결되어 있던 브리튼섬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런던을 포함한 중남부 지역이 곡창지대다 보니 수많은 유럽인들이 그 땅을 노렸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켈트족에 멸망 당한 이베리아 인들을 제외하면 켈트, 로마, 색슨, 앵글, 노르드, 프렌치 노르만인들이 혼합하여 어울려 살았다.
'마치 미국과 같은 인종의 용광로였군.'
영어가 모든 언어를 받아들여 만들어진 거라고 하는데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코메니우스의 말을 계속 듣고 있던 연은 감탄했다.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수십 년 동안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깔끔하게 연에게 설명해줬다.
"그러다 보니 그곳에서 수도 없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하께서 보시기에는 고만고만한 아이들 같은 싸움이지만, 그들에게는 재앙과 같았습니다."
"음···, 그래서 연방국이라 하는군요."
"네, 전하. 봉건 영주들이 연합한 연합체가 바로 전하께서 알고 싶어 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로 오랫동안 나누어져 있었고 인종조차 다르기에 아직도 문제가 많습니다."
"그걸 올리버 크롬웰이란 호국경이 전부 집어삼켰고요?"
"그렇습니다. 전하. 하지만 적이 많습니다."
"그래요?"
현재 영국을 지배하고 있는 올리버 크롬웰은 대단한 자가 틀림없었지만, 연이 보기에는 미친 놈이었다.
'그래서 아일랜드인들이 혼합되지 못했구나.'
찰스 1세의 목을 자르고 '잉글랜드 연방'을 세운 크롬웰은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엄마가 아이를 잡아먹을 때까지 드로이다 성을 포위한 크롬웰은 성을 함락한 이후 갓난아이까지 모조리 죽였다.
폭동을 일으켰던 아일랜드 가톨릭 세력을 진압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같은 개신교도도 무차별 학살했다.
그랬기에 소설과 영화에서도 올리버 크롬웰은 자주 등장한다.
악당 또는 악마로.
일본에서 신사(紳士)란 단어로 쓰였던 젠틀맨(Gentleman).
교양있고 예의 바르며 몸가짐이 단정한 멋진 남자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을 젠틀맨이라 말하지 않는다.
신사의 어원인 젠트리(Gentry).
조선과 비교하면 '한량'이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입신하지 못해 양반이 되지 못하고 받은 유산으로 즐기며 사는 한량.
귀족은 아니지만, 가문의 휘장을 사용하며 받은 유산으로 살아가는 젠트리.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영국에 유학 갔다 온 일본인에 의해 미화되어 신사에 관한 소설이 히트를 쳤다.
그래서 동양권에서는 젠틀맨이 멋진 남자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 젠트리 출신인 올리버 크롬웰은 풍운아였다.
귀족이 아닌 그가 하원의원이 된 후, 잉글랜드 내전이 터졌다.
1642년, 찰스 1세와 의회가 충돌하면서 청교도 혁명이 일어났다.
크롬웰은 민병대인 철기군(Ironside)을 조직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권력을 잡았다.
"전하께서는 크롬웰을 미친놈 취급하시지만,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다 무능한 찰스 1세 때문입니다. 찰스 1세가 쓸데없이 남긴 편지 때문에 크롬웰이 돌변한 겁니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무슨 편지였는 데···?"
"찰스 1세가 남긴 편지에는 '크롬웰을 비롯한 의회파 놈들에게 사로잡혀서 속이고 있지만, 다음에 남김없이 모가지를 쳐버릴 거다'란 내용이 적혀 있으니 크롬웰이 살기 위해서라도 찰스 1세의 목을 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변해 버린 것이지요. 그전까지 크롬웰은 찰스 1세에게 언제나 정중하게 예를 보였습니다."
"흐음···."
40세 이전까지 젠트리라 말하는 지방 소지주였던 크롬웰.
어찌하다 하원의원이 된 후 민병대 대장이 되었다.
철기군이라 말하지만, 철로 된 투구만 쓰고 전쟁에 나섰던 민병대를 이끌고 그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찰스 1세가 남긴 편지만 아니었다면 크롬웰은 영웅 취급받았을 겁니다. 그 자신이 결벽증이 있어서 그런지 병사들에게 봉급을 밀리지 않았고, 군율을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조선군처럼 말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농노나 다름없는 철기군을 정예화시킨 것이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악마라 불린 다면서요?"
"참···, 그렇습니다. 자연은 변함이 없지만, 한순간에 변해 버리는 게 사람이라···."
올리버 크롬웰이란 인물을 아까워하는 듯한 코메니우스의 표정을 보자 연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렇게 될 수도 있었겠지.'
연은 막강한 무력을 확보했지만, 명분 없이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명분 없이 침략 전쟁을 일으켰던 군주들의 뒤 끝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미 대륙으로 진출하기 전에 명분을 만들려 했다.
'단지, 야코프를 잡으러 간다는 것으론 부족하지.'
신대륙으로 떠났다고 하는 야코프.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그 명분만으로 이미 터를 잡고 사는 청교도들을 몰아낼 순 없다.
'1원짜리 금화에 그려진 지도로 우기기도 힘들고.'
루스 차르국에게는 통했던 일이다.
'그거야 예맥의 땅은 조선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예맥의 땅을 확보한 것처럼 북미 대륙을 날름하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하지 못 할 일이 아니지만, 뒤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복덩이 칼 10세를 핑계 삼아 영국에 진출하려고 알아봤다.
그런데 영국의 사정은 너무나 복잡했다.
연이 대충이나마 알고 있던 영국 역사와 전혀 달랐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참 뭔가를 생각하던 연이 묻자 코메니우스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태자로서 대학자인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에게 정중히 요청합니다. 조선인이 되어 조선의 교육 발전에 힘써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뜬금없는 요청에 코메니우스는 당황했다.
"비록 초등학교와 대학교를 세웠지만, 아직 세부적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탁합니다. 조선에서 뜻을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제 조국인 보헤미아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어떤 일 말입니까?"
"보헤미아의 독립과 보헤미안 형제단을 위해 보탬이 되려고 합니다."
체코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애국자 중 한 사람인 코메니우스다운 대답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런 인재를 놓칠 연이 아니었다.
"조선은 명분이 없으면 타국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헤미안 형제단에 지원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게 없지요."
"네?"
"매년 5천 원을 보헤미안 형제단에게 지원하겠습니다."
"네?!"
1원이면 한 가정이 1년 동안 먹고 사는데 충분한 금액이다.
그런데 5천 원이라니.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코메니우스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연이 이렇게 큰 금액을 지원하려고 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코메니우스가 대단한 학자라고 하지만, 매년 5천 원이나 되는 거금을 쓰면서 모셔 올 정도는 아니었다.
"부족한가 보군요. 매년 1만 원씩 지원하겠습니다."
"네에?!"
동그랗다 못해 튀어나오려고 하는 코메니우스의 눈을 보며 연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연은 이번 기회에 소양 바로 옆에 있는 보헤미아를 독립시켜 우방국으로 만들 생각이다.
'오스만 제국과 싸우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보헤미안 형제들을 지원해서 독립시키는 것이 여러모로 좋아."
유럽반도로 진출하지 않으려고 확정지은 연이다.
하지만 바로 옆에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큰 나라가 있는 것은 별로였다.
'21세기처럼 찢어 놓은 것이 좋겠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걱정할 것이 없지만, 그 후로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행동에 옮기고 싶었다.
또한 압박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연은 보헤미아의 독립을 돕고 싶었다.
"결정하기 힘드십니까?"
"아, 아닙니다. 전하. 그저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코메니우스는 어디서 배웠는지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일어나세요. 그대가 무릎을 꿇을 대상은 오직 조선의 황제입니다."
"전하···."
연이 코메니우스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의 두 눈에는 연을 향한 감사의 표정과 함께 눈물이 가득 차 흘러 내렸다.
"앞으로 조선과 그대의 조국인 보헤미아를 위해 힘써 주세요."
"감사합니다. 전하."
연은 지금 시대에 보기 힘든 교육학자인 코메니우스를 거둬들인 후,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칼 10세는 복덩이가 틀림없어. 그리니 복을 줘야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칼 10세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연의 표정은 즐겁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