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복덩이(1) >
"예맥해까지만 진출하려고 했는데···."
바벨 성 집무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지도를 바라보던 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눈 뜨기 전부터 세웠던 계획.
그 계획 속에는 유럽 북부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예맥의 땅에서 루스 차르국만 몰아내도 후손들이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봤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됐지···?'
정신없이 세력을 넓이다 보니.
한에 맺힌 땅 욕심이 과하다 보니.
기름 한 방울 나지 않았던 분단된 조국에서 살다 보니.
욕심이 욕심을 불렀다.
그래서 연은 북해 유전도 후손들에게 남겨주고 싶었다.
신성로마제국 페르디난트 3세에게 협박하고, 오스만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이 싸우게 했다.
그 결과 함부르크까지 손에 넣고 북해 유전을 차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물론 석유와 자원 확보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예맥해까지였다.
그 이상 욕심을 내봐야 후손들이 잘 관리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해···.'
정복 군주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아는 연이기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
그러지 않으면 로마나 몽골 제국처럼 허물어져 버릴 테니까.
원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건 아시아와 유럽 북부를 전부 차지해 버렸다.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고, 그러면서 계획이 수정됐다.
이제 이름까지 '예맥 대륙'이라 부르는 유라시아.
그로 인해 졸지에 유럽반도가 되어버린 서유럽.
'그곳은 남겨 둬야지.'
다시 한번 지도를 곰곰이 살피던 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대항해시대 이전만 해도 별 볼 일 없던 유럽.
봉건 사회를 탈피하지 못했지만, 산업화 이후로 급속히 발전하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침략과 약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연 때문에 앞으로 그럴 일은 있을 수 없으니, 굳이 응징할 필요도 없었다.
대신 풍요롭고 기름진 유럽반도를 조선에 싱싱한 과일과 채소를 대주는 텃밭으로 삼기로 했다.
'지금 그곳에 신경 쓸 시간이 없어.'
동남예맥이라 부르는 청나라, 후금, 대명, 남명.
남예맥이라 부르는 동남아시아.
서남예맥이라 부르는 무굴제국과 준가르 왕국.
유럽반도라 부르는 서유럽.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름 잡아도 4억 명 가까이 된다.
'70%가 넘지.'
17세기 세계 인구 중 2/3가 넘는 이들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농사짓기에 최적인 곳이다.
조선 영토의 1/5도 안 되는 지역에 10배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몰려 살고 있다.
물론 조선 영토의 대부분은 불모지나 다름없다.
하지만 자원이 넘쳐나는 곳이기에 앞으로가 희망적이다.
'이제부터 바뀔 거야.'
만주부터 시작한 농지 개간으로 쌀과 밀 생산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아질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생산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쌀과 밀 같은 기본 농산물은 조선전력공사에서 직접 관리하기로 했기에 수급 조절을 하고 있다.
과잉 생산해봐야 팔아먹을 곳도 없기에 연은 농업인구를 줄이는 대신 공업과 상업을 키울 생각이다.
'앞으로 농촌인구는 줄여나가고 도시를 발전시켜야 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이지만, 미래를 생각한다면 2% 이하로 줄여야겠다고 계획을 잡았다.
'미국의 경우 농업인구의 비율을 1.3%뿐이 안 되지만, 미국은 농산물 수출국이고 한국은 수입국이었지.'
21세기에 중공업과 최첨단 산업의 선두주자에 속했던 대한민국이지만, 농업인구는 4.3%나 된다.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도 한국의 농업인구는 배 이상 많은 편이었다.
땅이 좁아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말이 되지 않았고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었지.'
귀농 열풍까지 불었던 21세기 대한민국.
누가 불편한 농촌에서 살고 싶겠나.
도시 생활이 힘들기 때문이지 않나.
도시도 도시 나름이었다.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지방 소도시는 점차 사라져 가버리고 있었다.
연은 균형 있는 도시 발전을 미리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인구가 너무 적어···.'
많은 나라를 흡수하면서 늘어난 인구가 몇 배나 되지만, 그래봐야 5천만 명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연은 농촌인구를 줄이고 도시인구를 늘릴 생각이다.
그래야만 계획한 일들을 빠르게 추진 할 수 있다고 봤다.
연은 농업인구를 대폭 줄여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봤다.
또한 미국처럼 대단위 농사를 짓데, 모두가 잘사는 방법의 하나로 농업협동조합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조선인이라면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조합을 결성하고 조선전력공사에 신청하면 개간된 농지를 불하받을 수 있다.
조선인이 아니라도 원하는 이는 누구라도 고용해서 일을 시킬 수 있다.
단, 집과 먹고 살 수 있는 임금을 제공해 줘야 한다.
이렇게 좋은 조건인데도 문제가 있었다.
엄청나게 넓은 개간된 땅을 불하받았는데 농사를 지을 사람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농업협동조합마다 더 좋은 조건에 걸고 일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 조선에 흡수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대거 이동하고 있었다.
특히, 우크라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 사파비 제국 사람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징집된 병사와 농노들.
포로가 되었던 이들 중 일부는 광산으로 끌려갔지만, 대부분 도로와 철도 공사에 투입됐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나 많았기에 성실한 자는 농업협동조합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대농장주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새로운 영토로 몰려온 조선인들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리 잡고 돈을 모은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되려 고향에 있는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쓴 편지를.
'사랑하는 엘레나. 난 살아 있소. 그것도 잘 먹고 잘살고 있소. ······. 그러니 리아와 데니를 데리고 이곳으로 오기 바라오. 빨리 오시오. 보고 싶소.'
레오는 글을 모르는 농노였지만, 농사짓는 법과 함께 한글을 배웠기에 자신의 의사를 글로 표현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어느덧 밤이 깊었지만, 연은 뭔가를 계속 써 내려갔다.
앞으로 진행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에 정리 중이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계획했던 목표가 달성되어서 그런지 피곤이 몰려왔지만,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젊다 못해 아직 어린 연이라 그런지 책상 위에 그대로 엎드려 자고 말았다.
* * *
효종 7년(1655) 10월 3일.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날을 기념하여 남산에서 큰 행사가 열렸다.
이제는 사라진 문무백관 대신 조선의 관리들이 효종을 따라 남산으로 올라갔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찌 저리 가는 기둥으로 저 높이 올릴 수 있단 말이오?"
"모두 은동리에 있는 연구원들 덕분 아닙니까? 그들이 아니었다면 상상이나 해 봤겠습니까?"
"모두 태자 전하의 제자들이라고 했으니, 태자 전하의 공이 가장 큰 것 아닙니까?"
"그거야 맞지만, 태자 전하는 천상천 아닙니까? 굳이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허허허."
관리들은 한양 탑을 올려다보며 너도나도 한마디씩 찬사를 보냈다.
미국 시애틀의 상징인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처럼 3개의 외부 지지대와 중앙 기둥 구조인 한양 탑이 드디어 완공됐다.
높이 100m의 한양 탑 위에는 넓은 둥근 접시 모양의 건물이 존재했고, 다시 그 위로 50m의 송신탑이 세워졌다.
송신탑이 시작되는 곳에는 조선전력공사를 상징하는 '번개' 표시가 있었고, 밤이 되면 둥근 테두리와 함께 환한 불빛을 밝히니 신비롭기만 했다.
총 150m인 한양 탑은 236.7m인 서울 타워보다 낮지만, 이보다 높은 건축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연은 파리의 에펠탑처럼 철골구조로 한양 탑을 만들고자 했다.
막강한 제강 능력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산 꼭대기는 그리 넓지 않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4개의 지지대보다 면적을 적게 차지하는 3개의 지지대로 구성된 탑을 생각했다.
그래서 떠 올린 게 바로 스페이스 니들이었다.
조선의 기술을 상징하는 한양 탑.
미려한 곡선을 이루며 받치고 있는 3개의 외부 지지대는 정정(正鼎)을 뜻한다.
다리가 3개 달린 솥을 뜻하는 정정은 안정적이다.
하지만 단 하나라도 없으면 쓰러져 버린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는 삼권분립을 뜻하지 않았다.
입법, 사법, 행정이라 말하는 삼권분립(三權分立).
서로 견제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지만, 악용의 소지가 있었다.
견제가 아닌 합심을 한다면 재앙이나 다름없는 제도가 바로 삼권분립이다.
그래서 연은 아예 삼권분립이란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대신 연은 효종에게 다른 의미로 정정을 설명했다.
'아버지, 정정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물어보는 이유가 뭐냐? 혹시 남산 위에 세워지고 있는 탑 때문이냐?'
'맞습니다. 아버지. 외부를 3개의 지지대로 구성하고 있는데 의미를 부여했으면 합니다.'
"의미라···, 무슨 의미 말이냐?'
'조선을 상징하는 탑인데 그 구조에 대한 의미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음···, 그러다 치고, 너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냐?'
그러지 않아도 남산 위에 올라가고 있는 건축물이 궁금했던 효종이라 바로 물었다.
'아버지, 왕이 있어야 나라가 존재하지만, 백성과 관리, 병사가 없다면 나라 또한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자는 각 지지대에 의미를 부여했으면 합니다.'
'가운데 기둥은 왕을 뜻하는 것이고?'
'네, 아버지.'
'단지 그것뿐이냐?'
단순히 그런 의미를 부여하고자 연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생각한 효종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앞으로 공이 있는 이들에게 포상을 하고 지지대에 이름을 새겼으면 합니다.'
'영원히 남도록 말이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고 하지만, 사람의 이름이란 회자 되다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조선의 상징이 될 한양 탑에 영원히 변치 않는 이름을 새겨준다면 명예를 찾는 이들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흐음···.'
연의 말에 효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갈수록 발전하고 있는 조선이지만, 전처럼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99칸이라는 규정이 없기에 이제 돈만 있으면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살아도 되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점점 돈을 찾아 못된 짓을 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명예를 중시하게 만든다···. 그게 소용이 있을까?'
'없는 것보단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긴 하겠지.'
조선이 잘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빠르게 커나가고 있는 만큼 사람들의 생각도 급하게 변해갔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배고픔만 면하면 된다고 했지만, 잘살게 되면서 시기와 질투도 늘어났다.
관리와 병사들의 월급은 기본적으로 많았다.
또한 지위가 올라갈수록 급격하게 높아졌기에 문제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아니었다.
라디오에 이어 자전거와 냉장고, 전화까지 시판되자 돈에 대한 열망을 갈망으로 변해갔다.
일반 백성들은 평생 벌어봐야 자전거나 냉장고를 살 돈을 모을 수 없었고, 전화 또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문을 열고 살아도 되는 조선에서 도적질이 벌어졌다.
차대 번호처럼 자전거에도 번호를 각인했다는 것도 모르고 훔쳐 갔던 도적은 바로 잡혔다.
가족들이 하소연했지만, 절대 봐주는 일은 없었다.
'배고파서 먹을 것을 훔치는 경우가 아니고선 남의 물건을 탐하는 자에게 용서란 없다.'
죄를 지어도 큰 죄가 아니라면 모르고 할 수도 있다고 봐서 한 번은 용서해주는 조선의 사법제도이지만, 자전거 같은 고가품을 훔치는 자에게는 단호했다.
아무튼 효종은 연의 의견을 받아 들였다.
한양 탑 지지대 밑면을 최고급 대리석으로 두르고, 그곳에 공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새기기로 했다.
* * *
올해도 연은 태자비를 볼 수 없었다.
조선에 대항한 바이킹들을 토벌했지만, 뒤처리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바벨 성을 찾아온 이들을 보고 연은 활짝 웃었다.
이번에 조경 11호 함을 타고 온 을수 함장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았다. 그래도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닙니다. 전하의 부름에 더 빨리 응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 때문에 저놈을 생포할 수 있지 않았느냐?"
"그러긴 합니다만···."
한쪽에 찌그러져 있는 칼 10세를 보고 연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연은 이번 토벌 작전을 계획하기 전에 을수를 불렀다.
따로 시킬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보다 월등히 커진 새로운 조경함의 함장이 된 일수.
3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이끌고 대만 일대에서 해상 훈련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안전이었기에 성능 실험 중이었다.
길이 120m, 넓이 30m나 되는 새로운 조경함 3척은 2년 동안 건조한 끝에 년 초에 진수 할 수 있었다.
조경 11, 12, 13호 함이라 명명된 이 전함들은 선체 강판 두께만 해도 5mm나 되었다.
지구를 한 바퀴 돌 수도 있기에 단단하고 튼튼하게 설계해서 만들었지만, 검증은 해봐야 안다.
그런데 칼 10세가 도발하자 빨리 오라고 급전을 때렸다.
새로운 조경함은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진 전함이지만, 이번 작전에 긴급 투입하기로 했다.
스웨덴 전함 5척이 오슬로로 이동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30,000km가 넘는 바닷길을 시속 30km의 속도로 쉬지 않고 달려온 조경함.
중간에 항구 몇 곳에서 정박하고 오느라 두 달이나 걸렸다.
연은 칼 10세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러자 칼 10세 또한 같이 노려봤다.
무언가 말을 꺼내고 싶은지 들썩거리다 마는 그의 입을 보고 연은 딴생각을 했다.
'실물이 더 복덩이처럼 생겼군.'
칼 10세를 생포한 건 행운이었다.
게다가 얻어 낸 전리품은 상상을 초과했다.
대충 계산된 전리품의 총액은 프랑스의 1년 예산인 7,000만 리브르가 넘었다.
그러니 칼 10세를 보고 연의 눈이 휘어질 수밖에.
'어찌 됐건 내겐 복주머니나 다름없군.'
영국으로 보내 달라는 칼 10세에 관해 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조서원의 보고를 받고 난 연은 묘한 미소를 띠며 입맛을 다셨다.
누구라도 연의 생각을 안다면 기겁할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