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작전명 토벌(5) >
살다 보면 예감이 맞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게 빌어먹을 예감이라면, 악몽이다.
칼 10세는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돛대 끝에 쳐다보며 외쳤다.
"배라니? 무슨 배야?"
"폐하! 확인할 순 없지만, 무척이나 빠르게 커지는 걸로 봐서는 전함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칼 10세의 다그침에 함장이 설명했다.
"폐하, 배가 크고 빠를수록 빠르게 커 보입니다. 그러니 전함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 시대에 전함보다 더 큰 배는 없었기에 함장은 그렇게 판단했다.
"전함이라고? 왜 전함이··· 우리에게 온다는 말이냐?"
"그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함장.
불길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칼 10세는 북유럽의 뜨거운 여름 햇살에 심장이 구워지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작은 점이 자신을 항해 다가오면서 빠르게 크게 보였다.
햇빛을 등져서 그런지 잘 보이지 않았던 점은 어느덧 배라는 걸 인식할 정도로 커졌다.
"저, 저건···."
"폐하! 진정하십시오."
손가락을 가리키며 당황해하는 칼 10세.
이를 본 함장은 즉시 견시에게 물었다.
"깃발은?"
"아직입니다."
견시는 슬쩍 아래를 보고 대답한 후에 다시 망원경을 한쪽 눈이 붙였다.
초조한 듯 견시를 바라보는 함장.
"폐하, 혹시라도 조선군 전함일지 모르니 일단 배를 돌리겠습니다."
"그, 그래라."
차갑고 거칠고 험난한 북해(北海, North Sea)에서 만나는 모든 배는 위험하다.
그 어떤 배도 믿을 수 없는 곳.
우호적 함선이라도 해적으로 돌변하는 곳.
바로 영국,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 덴마크, 스웨덴으로 둘러싸인 북해이다.
자신들 또한 여차하면 해적으로 변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유럽 최강이라 할 수 있는 바이킹 전함 5척으로 함대를 구성해서 움직이고 있으니.
하지만 조선군의 함선일지도 모른다.
성인이 된 이후 평생을 바다에서 살았던 함장은 다가오는 배가 무척이나 빠르다는 다시 한번 인지했다.
'조선군의 전함이 틀림없어. 아무리 순풍을 강하게 받는다고 해도 저렇게 빠르진 않을 거야.'
그러니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뒤로 후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배 색깔이···."
맨눈으로 확인할 정도로 커진 배이지만, 거친 파도와 섞여 잘 보이지 않았다.
햇빛에 산란으로 인해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배의 형태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배의 색깔이 특이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조선군 함선은 흑색이라고 했는데···.'
전체를 회색으로 도색한 배를 보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희망은 처절하게 무너졌다.
'이런 제기랄! 돛이 없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함선.
색깔 때문에 배의 형태를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돛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색이 저래서···. 빌어먹을!"
아직도 견시는 어떤 배인지 확인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색 때문이었다니.
짜증도 나고 화도 났지만, 당장 느껴지는 건 두려움이었다.
발해만에 있는 조선석유화학.
이제 안정적인 석유 생산을 하고 있다.
석유 정제 기술이 높아지면서 그와 더불어 다양한 물감 또한 개발됐다.
연은 새로 전함을 만들 때, 그동안 사용했던 검은 색 대신 회색으로 칠하라고 했다.
'회색은 무채색이다. 그러니 사람의 눈으로 식별하기 어렵다. 따라서 전함에는 바다나 하늘처럼 파란색보다는 회색으로 칠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일반적인 배라면 눈에 띄는 색으로 칠하는 게 맞다.
항해 중에 발견하기 쉽기에 그만큼 안전하다.
하지만 군함이라면 발견하기 어려울수록 좋다.
그래서 잘 분간이 안 가는 회색으로 칠한다.
아무튼 연은 기존의 조경함까지 모두 회색으로 바꾸라 했다.
"하, 함장님! 조선군 전함입니다!"
"뭐!"
"번개 표시 깃발입니다!"
"이런 쌍! 빨리 배를 돌려라! 돌아간다!"
함장이 크게 소리치자 겁에 질린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해적만큼 날렵하게 배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니며 돛을 조정하는 병사들.
그 모습을 보고 칼 10세가 함장에게 말했다.
"함장! 저 배가 조선군 전함이라면 도망칠 수 있겠나?"
"그, 그건···."
해풍에 삶을 의지하고 사는 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조선의 전함은 돛도 없이 움직인다는 걸.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항해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크흠···."
급히 배가 회전하면서 칼 10세가 휘청거리며 침음을 내뱉었다.
"폐하!"
선실 벽을 짚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잡은 칼 10세는 허탈하든 크게 소리 내 웃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냐!"
정혼자인 크리스티나 여왕과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비웃음을 샀지만, 참고 기다렸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비굴하게 군 덕분에 스웨덴의 왕좌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친 후에서야 손에 쥐었다.
"그런데! 그런데!"
점점 다가오는 회색 물체는 거대하다 못해 웅장했다.
"한 척이 아닙니다!"
견시의 말에 뒤를 돌아본 칼 10세와 함장.
조선군 전함은 분실술이라도 쓰는 듯했다.
양옆으로 추가된 전함 3척이 거친 파도 따위는 무시하며 바다 위를 날아오다시피 오고 있었다.
-붕! 붕! 부우웅!
굉음까지 울리며 다가오고 있는 조선군 전함.
순풍에 의지해서 빠르게 북상하고 있는 스웨덴의 전함과 거리를 좁혔다.
-경고한다.
-즉시 돛을 내려라!
-저항은 용납지 않겠다!
-즉시 돛을 내리고 멈춰라!
칼 10세는 자신이 탄 스웨덴의 전함보다 2배나 더 길고 더 높은 거대한 철선이 다가오자 그대로 갑판 위에 주저앉았다.
조선군 전함은 유럽 최강이라는 바이킹 전함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쏴볼 테면 쏴보라는 듯 바이킹 전함 옆을 스치듯 가까이 붙어서 추월했다.
그런 후 급히 선회했다.
오슬로피오르 해협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대포에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고 붙을 붙이려고 준비하고 있는 병사들.
함장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폐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포기해야지."
칼 10세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바이킹들의 사령관이었기에 나름대로 바이킹 전사라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억울해.'
* * *
스톡홀름을 완전히 점령했다는 연락을 받고 연은 폭식했다.
그것도 매운 음식으로.
은동리에서 데려온 숙수는 연의 입맛을 알기에 고추를 듬뿍 갈아 넌 매운 갈비찜을 요리했다.
"아···, 이제야 좀 풀리네."
꿀 탄 탄산수를 마신 후 연은 '꺼억'하고 트림까지 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한 대로 삼발이까지 투입했지만,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었다.
나대용 장군의 후손인 나진서가 설계하고 만든 거북함을 믿기에 안심할 수 있었지만, 섬들로 이루어진 스톡홀름을 점령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이킹들 아닌가.
연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지 몰라 걱정되었다.
그런데 전투 결과 보고를 받은 난 후 온몸에 기운이 빠져 버렸다.
그만큼 긴장 했던 탓이다.
아무튼 수백 명이나 되는 부상자가 있었지만, 죽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철저히 준비한 덕분인가?'
최종 보고서를 받아 봐야 무엇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정확히 알겠지만, 일단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매운 갈비찜과 탄산수로 날려 버린 연은 기분 좋은 발걸음을 옮겼다.
'이참에 콜라와 사이다나 환타를 만들어 팔까?'
요즘 탄산수가 넘쳐났다.
소양 주변은 석회석이 많은 토양이기에 수산화칼슘이 함유된 지하수가 많았다.
'그렇다고 그냥 마시면 탈 나지.'
석회 성분이 위장을 자극하여 배탈이 나거나 요로 결석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연은 석회질이 많은 물에 이산화탄소를 첨가하여 탈이 없는 탄산수를 만들어 내는 공장을 세우라 했다.
처음에는 탄산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수산화칼슘과 이산화탄소가 만나면 불용성인 탄산칼슘(CaCO3)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유럽에서 간단하게 얻을 수 있는 탄산칼슘은 필요한 곳이 너무나 많았다.
정재화 된 탄산칼슘은 분필은 기본이고,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충전재, 제철소, 유리 제조, 타일 접착제, 건축 마감재, 물감, 플라스틱 충전재 그리고 산성화된 땅을 중화시키는 용도로도 사용한다.
'그것뿐만 아니지. 치약이나 제산제로도 쓸 수 있지.'
소양은 서역의 한양 같은 역할을 하는 서역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건 내가 할 일이지.'
그래서 소양 서쪽에 탄산칼슘 공장을 짓고 있다..
'그 옆에 탄산수 공장도 함께 지어야겠군.'
탄산칼슘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탄산수는 필수적으로 나온다.
'그냥 버리긴 아깝지.'
연은 이번 기회에 탄산음료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예 스파클링 와인도 만들도록 해야겠군.'
발포성 와인인 샴페인은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만든 것에만 붙이는 이름이다.
1668년 수도원의 관리자 돔 페리뇽이 우여곡절 끝에 만든 샴페인은 축제에서 빠지지 않은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연 때문에 '소양 와인'이 이제는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 같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체 바벨 성을 거니는 연을 보고 민삼이가 급히 달려왔다.
"쩐하!"
"무슨 일인데 또 그러느냐?"
"카, 칼 10세를 생포했다고 합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냐? 스톡홀름에서 사라진 후 흔적을 아는 이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그게···."
"민삼아, 올라가서 이야기하자."
"네, 네, 전하."
숨이 차는지 계속 말을 더듬는 민삼이를 데리고 연은 바벨 성 집무실로 들어갔다.
"좋아, 아주 좋구나. 운이 따르는구나."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전쟁을 끝냈다.
그런데 엄청난 보물을 싣고 도주하는 칼 10세의 함대를 사로잡다니.
"정말 기분이 너무 좋구나!"
"네, 전하. 우연치고는 너무 신기합니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고 했다."
"네?"
"놈은 우리 손에 잡힐 운명이었다. 망둥이처럼 날뛰던 놈이 알아서 잡히다니 그게 바로 필연이지 뭐겠느냐?"
"그렇습니까?"
"그렇다."
자신이 말하고서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아는 연이지만, 기분이 좋은지 신경 쓰지 않았다.
1618부터 1648년까지 30년 동안 일어났던 전쟁부터 온갖 전쟁에 다 끼어들었던 스페인은 국고가 바닥났다.
그런 이유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치면서 제2차 북방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연이 나타난 바람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런데 칼 10세를 생포한 후 스웨덴의 전함들을 수색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하루 이틀 만에 파악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일단 감정사들부터 수배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 몇 명이나?"
"최소한 10명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10명이나?"
"네, 전하. 그 인원으로도 다 정리하려면 한 달은 넘게 걸릴 거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빼먹은 거야?"
스웨덴에 돈이 없다고 했는데, 아니었다.
칼 10세가 가지고 도주한 보물들은 70m 가까이 되는 바이킹 전함 5척에 가득 실려 있었다.
최소 배수량이 1,200t 이 넘는 대형 함선 5척에 실려 있던 보물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미친놈이었군."
"네?"
연이 도망가라고 했을 때 도망갔으면 그 많은 보물을 고스란히 들고 갈 수도 있었을 건데.
무슨 생각으로 조선에 대항한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다. 칼 10세가 제정신이 아니란 소리다."
"맞습니다. 생포된 후로 미친놈처럼 살려만 주면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날뛰고 있다고 합니다."
"그까짓 놈 하나 죽여서 뭐 하겠느냐? 일단 각서를 받아 놓도록 하라고 해라. 그리고 물어볼 말이 있으니 이곳으로 데리고 와라."
"네, 전하."
수많은 자국의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칼 10세.
자신은 살겠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연은 그를 죽이지 않을 생각이다.
'전쟁을 일으켜 놓고 엄청난 보물을 챙겨 도망치는 국왕을 믿을 국민은 없을 테지.'
그런 이유도 있지만.
'복덩어리를 죽일 순 없지.'
칼 10세는 조선에 엄청난 보물을 안겨 주었다.
'얼마가 될지 계산조차 하기 힘든 보물이라···.'
그런 보물을 안겨준 칼 10세는 복덩이가 틀림없었다.
만약 저항했다면 차갑고 거친 북해 속으로 칼 10세와 함께 보물들이 사라졌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또한 몰염치한 짓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놈이 한 짓을 공개하면, 어떻게 될까?'
배신감 때문이라도 스웨덴인들은 조선의 품으로 들어오는데 망설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은 칼 10세에게 궁금한 것만 물어보고 추방할 생각이다.
이제 북유럽을 완전히 조선에 넣게 된 연은 벽에 걸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브렌트유를 손에 넣게 됐군."
비록 바닷속 대륙붕 밑에 있는 석유와 가스지만, 저유황 경질 원유다.
그래서 북해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는 같은 용량이라도 값이 월등히 비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