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바이킹과 거북함(3) >
태자비와 짧게 안부를 마친 연은 투덜거렸다.
"빨리 유선을 도입하든지 해야지 이거 잡음이 더 많으니 짜증 나네."
가까운 거리라면 모르지만, 한양에서 소양까지 직선거리로 8,000km나 된다.
그런데 지금 사용하고 있는 단파 신호는 1,000km 상공에 있는 전리층을 오가며 도달하기에 실제 거리는 훨씬 더 멀다.
'출력 낭비도 심하지.'
낮에는 전리층에서 전파를 흡수하기에 원하는 출력을 내려면 더 많은 전력을 써야 한다.
'보안 문제도 있지.'
태자비와 단둘이서 말을 나누기에는 날것 그대로 보내는 현재의 무선 통신은 문제가 있다.
지금 판매하고 있는 라디오를 뜯어 보고 이것저것 만지다 보면 무언가 발견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나올 테니까.
'만약, 놈이 나와 같은 자라면···.'
야코프는 가죽 대포의 상위 버전인 머스킷을 만들어 냈다.
그것도 증기의 힘을 이용하여 구리와 무쇠를 섞은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조선전력공사에서 팔고 있는 라디오를 구했다면 감청 정도는 쉽게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연은 유선 공사를 시행하라고 했다.
도로공사에 이어 철도 공사를 하면서 동축(同軸, Coaxial)으로 만든 유선도 깔라고 지시했다.
동축선은 구리로 만들었다고 해서 동축(銅軸)이라 하는 게 아니다.
케이블 TV 선처럼 가운데 구리심이 있고 플라스틱으로 절연을 한 다음 구리나 알루미늄이나 감아 놓은 형태라 동축(同軸)이라 부른다.
이렇게 만들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잡음을 차단할 수 있기에 두 가닥 전화선보다 안정적이다.
아무튼 동축케이블만 깔아 놓으면 전화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많다.
'놈이라도 유선은 쉬게 감청하지 못하겠지···.'
단지 그 이유 있는 게 아니었다.
한양에 계신 부모님과 대화 한 번 하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혹시라도 중계국이나 기지국에 있는 누군가가 들을 수도 있기에 모든 통신을 차단한 후 통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유선을 깔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주파수를 세분화시켜 유선에 실어 보내면 여러 명이 동시에 전화를 할 수 있으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언제라도 전화기를 들고 안부를 전할 수 있으니 세상은 더욱 좁아질 것이다.
'AM 라디오 방송을 할 수도 있고.'
단파 또한 진폭 변조(振幅變調, Amplitude Modulation)라 말하는 AM 방식을 쓰고 있다.
하지만 지표면을 따라 전파가 이동되기에 단파만큼 먼 거리까지 전송할 수 없다.
'유선에 실어 보내면 되지.'
다양한 주파수를 유선에 실어 보내 후 기지국을 세워 AM 라디오 방송을 한다면 채널을 다양화할 수 있다.
'민간 방송사 설립도 허가해 줘야지.'
지금은 오로지 선식이가 사장으로 있는 조선방송공사에서 출력하는 단일 라디오 방송이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사람들이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방송 시간을 늘리고 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조선의 문화가 풍부해지려면 다양한 민간 방송을 도입해야만 한다.
'언제까지 선동만 할 순 없지.'
연은 잘 알고 있었다.
괴벨스의 선동으로 독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러니 유선이 깔리면 AM 방송을 시작하면서 민간 방송국도 개설해 줄 생각이다.
아무튼 연이 조선의 문화를 발전시키고자 고심하고 있는 가운데, 발트해 서쪽에 있는 스톡홀름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다.
* * *
한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은 스톡홀름 하늘에서 서서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소빙하기에 들어선 게 확실하다.
"조선의 태자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슨 짓을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제가 알아본 정보로는 조선이 우릴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연유를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노르웨이와 핀란드까지 점령하고 덴마크까지 남쪽으로 몰아낸 구스타브 아돌프 왕의 정치적 동지였던 라르스 카그 백작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웨덴 추밀원의 원장인 그는 애초부터 칼 10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사건건 칼 10세가 하는 일에 불만을 토했다.
그 또한 군 장교이자 '브란덴부르크 안데르 하벨'과 '스판다우'의 사령관을 지냈었다.
그래서 현재 스웨덴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놈이 우리 스웨덴의 사신을 죽였소. 그런 놈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소?"
"그게 사실입니까?"
"그리 정세에 밝다고 자부하는 추밀원의 원장인 그대가 몰랐단 말이오?"
"크흠···."
라르스 카그 원장은 칼 10세가 조선의 태자가 있는 크라쿠프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어떻게 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알아보았다.
조선이 스웨덴을 치기 위해서 배를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도대체 무슨 요구를 했기에 사신을 죽인단 말입니까?"
"말이 심하군요. 원장. 단지 우리 스웨덴이 조선을 섬기겠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을 뿐이오. 그런데 조선은 그게 싫었나 보오."
"크흠···."
원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선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도 알기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 또한 카그 가문의 영주였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웨덴을 떠나긴 싫었다.
하지만 이대로 스웨덴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조선이 쳐들어온다면 막을 방도는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우리에게는 5만이나 되는 발할라의 전사들이 있소. 또한 무적이나 다름없는 50척의 전함도 있지 않소?"
"그것 가지고 되겠습니까?"
"이미 이곳으로 오는 섬 곳곳에 포대를 설치해 놓았소. 그러니 그대는 안심해도 좋소. 대신 자금을 융통해 주기 바라오."
"지금까지 쓴 돈이 얼마인데···, 얼마나 더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최소한 1,000만 리브르는 필요하오."
"예에?"
라르스 카그 추밀원 원장은 깜짝 놀랐다.
스웨덴도 크로나(Krona)라는 금화를 쓰고 있지만, 프랑스의 금화인 리브르를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의 의미는 뭔가를 국외에서 사들여야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그동안 약탈해 가지고 온 보물들을 팔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먹고 살 식량이오. 그것만 있다면 조선군이 제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버틸 수 있소."
"그렇다 해도 너무 큰 비용입니다. 그 비용을 대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야 합니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그 말에 칼 10세는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웃었다.
바사 왕조의 충신이었던 추밀원의 원장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르겠다는 말이 아닌가.
"일단 금붙이 놔두고 모두 내다 팝시다."
"어디다 말입니까?"
"어디긴 어딥니까? 요즘 조선의 태자가 예술품들을 무한정 사들이고 있다는 말 못 들었습니까?"
연은 금붙이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림이나 조각품 같은 예술품을 있는 대로 사들였다.
얀 2세가 바벨 성에 남겨둔 예술품을 보고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유물 급이라면 가격 따위는 따지지 않았다.
'얼마나 된다고 그걸 따져.'
21세기처럼 예술품의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물론 금장한 예술품은 엄청난 고가였지만, 연에게는 푼돈조차 되지 않았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사 와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연은 그렇게 수집한 예술품들을 모두 한양으로 보냈다.
넓어진 영토만큼 거대한 박물관을 지어 전시해 놓을 생각이다.
'굳이 프랑스나 영국처럼 도적놈이 될 필요는 없지.'
전 세계를 돌면서 약탈한 문화제와 예술품을 자국의 박물관에 전시해 놓은 놈들.
자기들 것이라 우기며 돌려주지 않았다.
연은 그런 더러운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 조선의 화폐인 원으로 받아야 합니까? 금 함유량이 부족한데 괜찮겠습니까?"
"원장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선의 원은 언제든지 원하면 황금으로 바꿔줍니다. 그래서 프랑스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원은 통용됩니다."
"하지만 수수료가 있지 않습니까?"
"쯔쯔···."
칼 10세는 혀를 찼다.
"왜 황금으로 교환할 생각을 하시오? 그냥 원을 주고 식량을 사 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굳이 황금으로 교환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즉시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스웨덴은 식량이 부족했다.
전쟁을 준비하느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그랬다.
척박한 곳이라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거의 없는 스웨덴.
약탈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핀란드를 점령해서 수탈을 자행했다.
다른 곳을 쳐들어가 먹을 것을 빼앗아 왔다.
그것만 하면 다행이었다.
약탈과 동시에 학살과 겁탈까지 하며 여인들을 잡아 왔다.
미래에 바이킹이라고 멋지게 표현되지만, 그냥 왜구나 다름없는 잔인한 도적 집단이다.
원장이 나간 후 칼 10세는 심복을 불렀다.
"여차하면 떠나야 한다. 그러니 오슬로(Oslo)에 배 5척을 대기해 놓도록 하라."
"승산이 없다고 보십니까?"
"당연하지 않으냐? 조선의 태자가 조선군을 아끼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우린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긴 합니다."
칼 10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을 도발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준비해 놓거라. 지긋지긋한 로마 가톨릭 놈들이 보이지 않는 신대륙으로 떠나자."
"알겠습니다. 폐하."
어차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칼 10세는 뒤를 도모할 준비 또한 철저히 했다.
독일의 귀족인 팔츠츠바이브뤼켄의 후작 요한 카지미르의 아들인 칼 10세.
그는 스웨덴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가톨릭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웨덴은 루터교라는 신교를 믿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를 쳐들어가 쑥대밭을 만들어 버렸다.
물론 발트해 남부 곡창지대를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에 지더라도 스웨덴으로 쳐들어올 나라가 없다고 봤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역사적으로도 그 사실은 명확했다.
1655년 제2차 북방 전쟁을 일으킨 스웨덴.
루스 차르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브란덴부르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덴마크에 포위당해 칼 10세가 이끄는 스웨덴은 전쟁에서 패했다.
그런데 스웨덴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았다.
1660년, 칼 10세가 사망하자 제2차 북방 전쟁이 끝났다.
폴란드의 올리바(Oliwa)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하지만.
처참하게 당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얀 2세는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리보니아를 스웨덴에 완전히 양도했다.
네덜란드는 교역상의 이익을 어느 정도 얻는 것으로 화해했다.
덴마크는 코펜하겐 조약을 체결하고 트론헤임과 보른홀름섬을 돌려줬다.
루스 차르국도 카르디스 조약을 하고 전쟁 중에 점령했던 지역을 스웨덴에 돌려줬다.
전범국인 스웨덴에 왜 이렇게 했을까.
계속 싸워봐야 답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만큼 스톡홀름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벽난로에서 일어난 칼 10세는 눈이 쌓인 왕궁 뒤틀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그자가 그랬지. 조선은 다를 거라고···."
칼 10세는 그자를 그냥 보낸 게 후회가 됐다.
자신이 스웨덴군의 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루스 차르국의 대공의 장자라는 자가 찾아왔다.
'사령관님, 저에게 지원해 주신다면 가죽 대포가 아니라 무쇠 대포를 만들어 주겠습니다.'
'이 총처럼 말이냐?'
'네, 사령관님.'
총을 살펴봤다.
겉은 투박하지만, 총구는 깔끔했다.
가격 또한 기존 머스킷의 절반이라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이곳에는 풍부한 철이 있기에 2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크흠···.'
탐이 났다.
이 총처럼 대포를 만든다면 3~4발 쏘고 나면 망가져 버리는 가죽 대포를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혼자인 크리스티나 여왕은 결혼식을 거부했다.
그러니 허울만 좋았을 뿐이다.
'나에게는 권한이 없다.'
'추밀원 때문입니까? 아니면 돈 때문입니까? 돈이라면 저에게 있습니다.'
'둘 다다.'
'어떻게 추밀원을 설득하실 수 없겠습니까?'
'라르스 카그가 문제다.'
'그자라면···.'
'어렵지···.'
존경받는 구스타프 대왕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추밀원 원장의 입김은 강했다.
또한 독일 귀족 가문의 태생인 칼 10세를 좋게 보지 않았다.
어떻게 해보려 했지만, 스웨덴 국민은 군의 사령관인 자신보다 그의 말을 더 따랐다.
'빌어먹을 해적 놈들 같으니라고.'
칼 10세는 자신도 모르게 루스 차르국에서 온 그 앞에서 욕 찌꺼기를 내뱉었다.
그러자 그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더니 말을 꺼냈다.
'혹시라도 어려움에 부닥치시면 저에게 오십시오.'
'어디로 말이냐?'
그자는 빙긋 웃더니 지도를 건네주었다.
'이곳으로 오셔서 저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떠십니까?'
어느새 수북이 쌓인 눈을 바라보는 칼 10세.
"그때 그자와 함께했더라면 조선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을 건데···."
이글거리는 칼 10세의 두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