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40화 (140/275)

< 140. 협상(5) >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조선의 태자가 절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14살이라고 하던데 대단하군.'

유럽의 왕가 같으면 철부지나 다름없을 나이인데 조선의 태자는 세상을 휘젓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신성로마제국 페르디난트 3세가 부탁했던 정략결혼 이야기는 꺼낼 수 없었다.

'괜히 꺼냈다가 본적도 찾지 못할 것 같군.'

그래서 교황은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로마의 이익을 위해 나서기로 했다.

한참 말을 하지 않고 입만 벙긋거리는 교황을 보고 연은 다른 생각을 했다.

'설마 영지를 돌려 달라는 건 아니겠지?'

이번에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점령하면서 말썽 많던 교회의 영지를 모두 압수했다.

귀족들의 영지도 전부 빼앗아서 조선전력공사 소유로 돌려놓았는데 교회의 영지라고 특혜를 주지 않았다.

성직자는 성직 말고는 정치나 사회에 관여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다.

'조선은 대장군이라고 해도 정치에는 관여하지 못한다. 그러니 성직자는 정치에 관여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또한 돈을 벌고 싶으면 성직을 때려치우고 장사를 해라!'

마을마다 있는 광장 한가운데 게시판을 설치하고 조선글로 된 여러 언어로 방문을 붙여 놓았다.

점령하고 다스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배우기 쉬운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초등학교까지 세워져서 어린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고 있다.

물론 강요하지 않았다.

'배우고 싶은 아이만 오라고 해라.'

굳이 자국의 언어를 버리고 조선말만 쓰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공서와 모든 공고문은 조선글인 한글로 표현한다고 공포(公布)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한글을 좋아했다.

그만큼 한글이 배우기 쉬웠나 보다.

물론 맞춤법이 개판이었지만, 쓸 수만 있으면 읽을 수 있기에 한글을 배운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글을 안다는 것 자체가 지식인이었던 세상이기에 너도나도 한글을 익혔다.

아무튼 연은 조용히 기다렸다.

교황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해서다.

'설파제를 달라는 건 아닌 것 같고, 뭐지?'

설파제 판매에 대해서도 이미 공포했기에 굳이 달라고 하진 않을 것 같았다.

1인분인 10알을 1원에 판다고 했기에 교황이 상대하는 사람들이라면 헐값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해온 설파제 임상 실험 결과 피부발진과 발열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긴 했지만, 극히 일부였다.

그렇다 하여도 의사 진단 없이 파는 건 허가 하지 않았다.

약을 원하면 직접 소양까지 찾아와 진료를 받고 약을 받아 가라고 했다.

다시 따라준 홍삼차를 다 마신 교황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이곳에 개설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로마에도 조선전력공사의 분점을 개설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소양에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개설된다는 소식에 조선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난리가 났다.

분점에서 판매하는 모든 제품은 가격이 같았다.

그러니 멀리 조선까지 가지 않고도 소양에서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인이 아니라면 조선전력공사 분점을 이용할 수 없게 했다.

'조선인이 되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지만, 조선인이 되면 혜택을 줘야지.'

그랬기에 너도나도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워 조선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죄송합니다. 교황 예하, 그것은 곤란합니다. 아시겠지만, 조선전력공사 분점은 조선인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대신 조선의 상사들이 로마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쉽군요. 그럼 그게 안 된다면 병원이라도 부탁합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어떻게 해서든지 교황청이 있는 로마의 경제를 끌어 올리고 싶었다.

로마에 조선 병원을 개설하고 실력이 좋다는 조선 의사들이 있다면 굳이 소양까지 찾아가 진단을 받고 설파제를 구매하지 않아도 된다.

1원이나 하는 높은 가격이기에 부유한 자들이 로마로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로마로 온다면 로마 경제가 활성화될 게 명확해 보였다.

21세기에 교황청은 바티칸이라는 작은 도시였지만, 지금은 로마 인근 지역을 포함하여 중부 이탈리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넓은 지역을 관리하는 교황청은 로마의 경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박살이 난 교황청의 재정을 끌어 올리기 위해 인노첸시오 10세는 아쉬운 소릴 꺼냈다.

"알겠습니다. 교황 예하.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건 누구나 나서야 하는 일이죠.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조선에서 설립하는 병원은 치외법권 지역으로 선언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하여 안전을 책임 져 주셔야 합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병사들을 보내 로마 약탈(Sacco di Roma)을 자행했다.

그때 스위스 용병들은 카를 5세의 병사들과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멸했다.

그 후로 '패배했음에도 빛나는' 무용담을 남긴 스위스 용병들은 명예로운 용병의 상징이 되었다.

"직접 조선군을 파견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교황 예하. 조선은 타국의 내정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타국에 군을 보낼 수 없습니다."

연은 굳이 경비대나 조선군을 로마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관리 자체를 할 수 없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안될 일이지.'

조선군이 로마에 주둔하고 있다면 이걸 이용하여 수작을 부릴 세력들이 틀림없이 나타날 게 뻔했다.

'존경하지만, 그렇다고 믿을 순 없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교황이 된 인노첸시오 10세이다.

그러니 정치력이 만만치 않을 거로 예상해야 한다.

"다두 왕국에는 보내지 않았습니까?"

역시 인노첸시오 10세는 조선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다두 왕국은 조선의 우방국입니다. 그것도 피를 나눈···."

"크흠···."

연이 딱 잘라 말하자, 교황은 침음을 뱉었다.

'단호하니 행동하는 걸 보면 정치를 모르는 것 같은데···.'

서로 이익을 위해 주고받기 위해 협상하는 것이 정치이다.

그런데 조선의 태자는 이익을 원하지 않고 소신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만큼 힘과 권력과 재력이 있는 조선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인지 교황은 페르디난트 3세가 특별히 부탁한 두 번째 일을 꺼내지 않았다.

'여기서 괜히 혼인 이야기를 꺼내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군.'

어떡해서든지 조선 왕실과 혼인으로 엮고 싶어 하는 유럽의 왕가와 귀족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중에는 교황의 팜필리 가문도 있었다.

더는 할 말이 없어진 교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태자의 요구를 페르디난트 3세에게 전하고 답변을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교황 예하. 하지만 너무 늦으면 안 될 겁니다."

"그게···?"

"곧 있으면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올 겁니다. 그러니 빨리 서두르셔야 합니다."

"무얼 서둘러야 한다는 말입니까?"

"자세한 것은 비엔나에 가 있는 얀 2세에게 물어보라고 하십시오."

무기상으로 변신한 얀 2세의 영업 실적이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연은 측면 지원을 하기 위해 슬쩍 말을 꺼냈다.

"앞으로 조선에서 파는 총은 모두 얀 2세를 통해 거래하기로 했으니 그리 전하시면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페르디난트 3세는 조선과 직거래하기를 원하며 얀 2세가 말한 거래 조건을 무시했다.

몇 번이나 페르디난트 3세가 보낸 사신이 소양까지 와서 직접 총을 사겠다고 했으나 연은 만나주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그랬기에 페르디난트 3세는 이번 교황 방문에 부탁했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단호히 거절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상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 오실 때 타고 온 마차는 선물로 드리는 것이니 꼭 그 마차를 타고 다니시길 바랍니다. 웬만한 총알 정도는 모두 막내 낼 수 있습니다."

"누가 감히 나를···!"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교황께서 오래 사셨으면 합니다."

"크흠···, 감사합니다."

연은 은진이로부터 교황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사장님, 야코프의 마지막 행적은 쥘 마자랭(Jules Mazarin)을 만나고 난 후부터 사라졌습니다.'

연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인물인 야코프가 마지막으로 만난 자가 다름 아닌 쥘 마자랭이었다.

그랬기에 교황 암살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연은 두꺼운 아크릴로 만든 방탄유리로 마차를 만들었다.

아크릴 또는 아크릴 유리로 알려진 폴리메틸메타크릴레이트(PMMA)는 강화 유리보다 가볍고 강도는 6~17배 강하다.

석유를 정제하면서 가장 간단한 형태인 아세틸렌(C2H2)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 카르보닐화(Carbonylation) 반응이라 말하는 일산화탄소로 반응시켜 아세트산을 합성해 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새로운 물질을 얻기 위해 수많은 화합물을 섞어 보는 것이 일인 연구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세틸렌에 사이안화수소(HCN)를 첨가하여 아크릴 섬유(Acrylic Fiber)까지 개발해 냈다.

연구원들 사이에 '매끈 플라스틱'이라 부르는 아크릴 섬유는 양모와 비슷한 촉감이다.

보온성이 뛰어나고 가볍고 튼튼하기에 겨울용 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전기가 심하게 일어나기에 군에서는 사용이 금지됐다.

그래서인지 조선군 병사들이 양모 코트를 많이 샀던 거다.

아무튼 조서원 요원들이 야코프를 추적하다 알게 된 쥘 마자랭은 교황 암살에 앞장섰다.

72세 나이로 교황에 선출된 인노첸시오 10세는 즉위하자마자 많은 적을 만들었다.

프랑스의 공작이자 추기경이자 정치가이며 루이 14세의 섭정이었던 쥘 마자랭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제236대 교황 선출 때,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콘클라베에 참석하지 못한 그는 사사건건 교황에게 반기를 들었다.

전임 교황의 바르베리니 가문을 공적 자금 횡령 혐의로 처벌하려 했다.

하지만 쥘 마자랭이 그들은 보호했다.

그에 대해 교황은 허락 없이 교황령을 6개월 이상 떠난 추기경들을 모두 성직록에서 박탈한다는 칙서를 반포했다.

하지만 쥘 마자랭은 프랑스 의회를 동원하여 프랑스에서는 효력이 없다고 선언하고 되레 이탈리아 침공을 계획했다.

아무튼 쥘 마자랭은 나이가 80이 넘은 교황이 자연사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정정히 활동을 이어나가자 참지 못한 그가 손을 쓰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연은 앙숙이 된 두 사람이 사고 치기 전에 방지하려 했다.

'잘못하다간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삼킬 수 있지.'

이미 오스만 제국에 땅을 양보받고 수석총을 넘기기로 했다.

그러니 신성로마제국이 일방적으로 깨지기 전에 그곳에도 수석총을 팔아야 한다.

'젠장, 무기 장사가 쉬운 게 아니네.'

균형을 잘 맞춰야만 매출이 올라가니 어쩔 수 없었다.

드넓은 땅을 확보한 조선이지만, 그만큼 개발 자금이 필요했다.

물론 쌀 본위제이기에 찍어 내면 된다.

하지만 어찌 될지 모르는 미래를 생각하여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은과 비교해 헐값이나 다름없는 금을 확보해 놓아야 해.'

지구상 한정된 자원인 금을 확보해 놓아야만 죽고 나서도 재정문제로 골치 아플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유럽과 오스만 제국이 싸울 때 팔 수 있는 것은 총만이 아니었다.

군복, 군화는 물론 식량까지 팔 수 있는 게 너무나 많았다.

'유럽이 가난한 게 아니야. 왕실이 부실할 뿐이지.'

어찌 보면 현재 유럽은 조선 말기와 같았다.

권문세가를 대신하여 귀족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막대한 부를 챙겼다.

죽은 루이 14세의 어머니와 놀아났다고 소문난 쥘 마자랭.

그가 죽을 때 가지고 있던 재산이 프랑스 연간 예산의 50%인 3,500만 리브르(금화 0.5kg, 약 4천만 원)였다.

조선의 모든 부를 다 가져버린 민비 일가와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엄청난 거였다.

아무튼 때를 봐서 쥘 마자랭을 족쳐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 가시는 길 편안하시길 바라며 꼭 페르디난트 3세 황제에게 서둘러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교황 예하."

"알겠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대신해서 온 교황과 협상을 끝낸 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거지?"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핀란드인들에게 자국의 병사가 살해당하자 사촌 오빠인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왕위를 넘기고 로마로 가버렸다.

스웨덴에 숨어 들어간 조서원도 어떻게 왕위 계승이 되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넘긴 거야, 아니면 찬탈당한 거야?'

결혼하지 않았기에 자녀가 없었던 크리스티나 여왕이 사라졌다.

그런데 칼 10세 구스타브란 자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떠들어대자 새로운 골칫거리가 생겼다.

'다 죽여야 하나?'

발트해 안을 따라 형성된 마을 말고는 오지나 다름없는 산지인 스웨덴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땅덩어리가 커도 문제 군."

국민이라고 해봐야 80만 명도되지 않는 스웨덴이지만, 그냥 둘 순 없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제 막바지에 이른 북유럽 확보에 바이킹도 아닌 독일인 출신 칼 10세 구스타브라는 자가 훼방을 놓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