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협상(4) - 지도 >
사실 인노첸시오 10세가 연을 찾아온 진짜 이유는 쫓겨난 사제들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3세의 부탁을 받고 협상을 하기 위해 찾아온 거였다.
페르디난트 3세는 너무 크게 일을 벌였기에 조선이 모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조선과 협상하려 했다.
하지만 협상으로 보낼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그러던 중 교황 인노첸시오 10세가 조선의 태자와 서신으로 교류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막대한 후원을 약속하며 부탁했다.
'독일의 왕이자,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의 왕, 크로아트인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나 페르디난트 3세의 이름으로 약속드리오. 조선과 협상만 잘해준다면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이자 교황청의 후원자가 될 것을 맹세하오.'
30년 전쟁으로 잃은 게 너무 많았던 페르디난트 3세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세상 그 누구보다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계신 황제시여. 간악한 프랑스 놈들 때문에 쌓이게 된 부채를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크흠···. 그게 무엇이냐?'
'조선을 치는데 후원을 하시면 됩니다.'
'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어찌 막강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조선을 칠 수 있다는 말이냐!'
루스 차르국 대공가의 장자라 말하는 이가 찾아와 만났는데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내자 페르디난트 3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가 개발한 머스킷 총이 있다면 가능합니다. 황제께서 총을 만드는 데 자금을 지원해 주신다면 제 조국인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나설 겁니다.'
'흥! 감히 나를 속이려 하는 것이냐? 네가 개발한 총을 만들어 팔고자 하는 것인 줄 내가 모를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네놈은 목 위에 달린 것이 버거운가 보구나.'
'아닙니다. 어찌 제가 감히 폐하를 속이려 하겠습니까? 제가 개발한 총은 철과 구리로 만들 수 있기에 제조 비용이 반의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건 가능하지 않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데···. 네놈은 듣지도 못했느냐?'
30년 전쟁으로 막대한 채무를 지게 된 페르디난트 3세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솔깃했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말을 듣는 순간.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판단되었다.
'폐하!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무굴제국까지 동참한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뭐? 어찌 이교도 놈들과···.'
'그들도 조선의 기물을 탐내고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교도 놈들과 함께 할 수 없다.'
'그건 놈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폐하, 우르바노 2세가 기사들을 모집하여 이교도 놈들과 전쟁을 선동한 이후로 누가 권위와 힘 그리고 황금을 움켜주었는지요? 설마 폐하께서는 그 전쟁을 성전으로 보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크흠···.'
아직 십자군이란 말을 쓰지 않고 있는 시대이기에 성전이라 말하는 제1차 십자군 전쟁.
신성로마제국의 전신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아나톨리아에서 잃어버린 제국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던 우르바노 2세와 손을 잡았다.
1054년, 4세기경부터 이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로마,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지역의 연합체가 동방교회로 분리된다.
이를 교회의 대분열(The Great Schism)이라 말하는데, 종교적 신념보다는 서로 간의 이권이 정치적 논란으로 승화되어 벌어진 거였다.
그런데 새로운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이 나타나 쳐들어오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두 세력은 힘을 합친다.
하지만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 서방교회의 병사들이 같은 기독교인이 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지역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하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완전히 단절된다.
영원히 원수로 지낼 것 같은 두 세력이지만,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다시 손을 잡는다.
'교회는 공교회(公敎會)적이고, 교회 중심은 그리스도이시고, 교회의 스승은 사도들이다'란 말처럼 보편교회(普遍敎會)라고도 부르는 공교회 이념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따지지 않고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 됨을 지칭하기에 꺼릴 일은 없었다.
신을 섬기기보단 권력과 욕망에 충실한 성직자들.
이권에 따라 분열되고 손을 잡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됐다.
그러니 이교도와 손을 잡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같은 신을 모시고 사는 것 아닌가.
교리만 다를 뿐.
고심하고 있는 페르디난트 3세에게 야코프가 말을 이었다.
'제아무리 강력한 화력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비싼 황동으로 만든 총알이 떨어지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열병기와 다르게 냉병기는 화살이 떨어지더라도 전쟁을 치를 수 있다.
그러나 열병기는 다르다.
빠르게 양성할 수 있는 열병기 병사들은 화약이나 총알이 떨어지면, 농노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제국들이 연합한다면 능히 조선을 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병사를 모두 죽일 만큼 조선이 총알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테니까요.'
'크흠···.'
연신 침음을 내뱉는 페르디난트 3세에게 야코프는 마지막 일침을 가했다.
'설사 전쟁에 패하더라도 폐하께서는 금전 말고는 손해 보실 것이 없습니다.'
'응?'
'주변 강대국들이 병사를 모두 잃게 되면, 폐하의 신성로마제국의 힘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아쉽게도 둘의 대화는 오스만 제국에 알려졌다.
신성로마제국에 오스만 제국에서 파견한 암자가 있었던 거였다.
그랬기에 오스만 제국은 조선을 치는 데 동참하지 않았다.
어부지리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페르디난트 3세는 조선을 침략하는 데 군자금을 대고 수익을 얻어 만회하려 했지만,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패하더라도 눈엣가시 같은 오스만 제국을 치려 했지만, 그것도 성사되지 않았다.
되려 오스만 제국이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 왕국을 노리고 쳐들어온다는 첩보를 받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페르디난트 3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조선과 화해하고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했다.
이런 내막을 자세히는 모르는 연이지만,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3세를 잡아 죽일 생각이었다.
'아니면 암살이라도···.'
하지만 은진이의 말을 듣고 마음을 돌렸다.
'사장님, 그냥 두시는 것이 훨씬 조선에 이득이 될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유럽이란 곳은 무척이나 특이한 곳입니다. 혼인으로 나라가 왔다 갔다 하는 아주 미개한 곳입니다. 하지만 풍요로운 땅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고 굳이 그곳을 정복하고 다스릴 필요는 없습니다.'
'흐음···.'
은진이와 무전으로 교신하면서 나눈 대화는 놀라웠다.
'사장님,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은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던 유전병으로 멸족될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냥 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유럽 전체가 더 혼란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왕이나 영주, 귀족이라고 해도 글을 모르는 자가 있는 곳이 바로 유럽이다.
그랬기에 어릴 때부터 글을 배운 유대인들이 등용되었다.
하지만 글을 아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지자 주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유대인들은 다시 핍박을 받고 쫓겨났다.
아니면 천시하던 금융업이나 하게했다.
물론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채권자인 유대인들을 쫓아내면 빚을 갚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조선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유럽에 살고 있는 친지들에게 연락했다.
'종교의 자유는 물론이고 직업의 자유도 보장되는 곳이야! 빨리 이곳으로 와. 이곳은 낙원이나 다름없어.'
원해서 고리대금업자가 된 게 아닌 유대인들.
친지들의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가산을 정리해서 조선의 영토가 된 폴란드로 몰려왔다.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섰다는 이유로 어딜 가나 천대받기는 마찬가지였기에 그래도 희망이 있는 곳을 찾아온 거였다.
연은 유대인들이 오는 것을 반겼다.
'앞으로 유대인들이 세계 금융을 지배하지 못하겠군.'
고리대금업 말고는 직업이 제한된 유대인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금융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업의 자유가 있는 조선에 오면 다른 일을 할 것이 분명했다.
아직까지 금융업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유럽에선 돈을 갚지 않기 위해 채권자인 유대인들을 암살하고 모함해 죽이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창조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대금업으로 돈을 만드는 일은 신성모독이다'는 개소리로 거리낌 없이 쫓아내든지 죽였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에게 대금업을 하게 했다.
일반인들은 당장 먹고살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서.
귀족들은 사치를 부려야 해서.
왕은 수시로 일어나는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서.
성직자들은 교회를 증축하고 지어야 해서 급전이 필요했다.
그러니 고리대금업을 할 사람은 꼭 있어야 했다.
알아본 바로는 유대인들이 빌려주는 돈은 고리대금도 아니었다.
많아야 7~20%였다.
점점 상업의 규모가 커지는 유럽이지만, 대금업을 하는 유대인들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장님, 그래서 유대인들이 빠져나오면 유럽의 상업은 붕괴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야 우리 조선의 상사들이 진출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 조선에 이득입니다.'
은진이의 말은 참으로 무서웠다.
유럽의 경제를 조선의 상사들이 움켜주고 흔드는 게 더 이익이란 말이었다.
그로 인해 유럽에 사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래서 연은 페르디난트 3세를 죽이려 했던 생각을 버렸다.
"생각 같아서는 조선을 침략하는데 뒤를 봐준 신성로마제국을 응징하고 싶지만, 참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실 겁니다."
"오스만 제국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 왕국을 침략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연은 교황에게 거짓을 말하진 않았지만, 속였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꿋꿋하게 넘어갔다.
이유야 어쨌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를 속이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21세기에 살았던 공식이었다면 모르지만, 눈뜨기 전부터 생각해왔던 세상이 있었기에 연은 모른 척하고 표정 관리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교황은 희망을 품고 연에게 물었다.
"우릴 도와줄 수는 없나요?"
연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아시겠지만, 우리 조선은 명분 없이는 타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제국의 전쟁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아···!"
장탄 음을 흘리는 교황의 한숨 소리에 연은 마음이 아려 왔지만, 정신을 단단히 잡았다.
'어차피 수도 없이 지들끼리 싸우는 곳이야. 그럴 바에는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이득을 챙기는 것이 좋아.'
앞으로도 변함없이 치고받고 싸우면서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곳이 유럽과 오스만 제국이다.
'그것만이 아니지.'
대항해시대라 말하며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식민지를 만들고 약탈과 학살을 저질러 놓고도 사과 따위는 하지 않는 유럽이다.
그러니 은진이의 말대로 유럽과 오스만 제국이 박 터지게 싸우게 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그게 답이야.'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진 연은 힘든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교황에게 말을 건넸다.
"교황 예하, 페르디난트 3세 황제에게 전해 주십시오."
"무엇을 원하든 들은 대로 전하겠습니다. 말해 보세요."
연은 미리 펴 놓은 지도위에 선을 쭉 그으면서 입을 열었다.
"원래 이곳은 스웨덴이 지배하고 있던 포메라니아 공국과 폴란드의 땅입니다. 그러니 이곳 엘베강을 따라 동쪽에 있는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와 오데르강을 따라 남쪽에 있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 연결하는 북쪽 지역을 조선에 정식으로 넘겨주길 원합니다. 그것으로 조선과 신성로마제국 간에 있었던 모든 은원 관계를 청산하고자 하니 교황 예하께서 잘 설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지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은 조선의 태자를 보고 안심한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장 큰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은 교황은 기운이 빠지는지 식어 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홍삼에 꿀을 타서 만든 홍삼차를 마신 교황은 신기한지 연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조선에서만 나는 산삼으로 만든 몸에 좋은 차입니다. 돌아가실 때 가지고 가셔서 꼭 매일 한 잔씩 드시길 바랍니다."
교황 중에 몇 안 되는 존경할 만한 인노첸시오 10세이기에 연은 산삼으로 만든 홍삼차를 챙겨주었다.
'오래 사셔야 할 텐데···.'
올해 80세가 된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이기에 연은 걱정이 되었다.
'내 생애에 이만한 분을 다시 뵙긴 힘들 거야.'
교황을 배출해 내는 일을 가문의 사업으로 보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 시대이기에 아무리 소신 있는 사람이 교황에 선출되더라도 뒤를 봐준 가문에 특혜를 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실을 알기에 연은 다음 교황이 누가 되든지 만나지 않을 생각이다.
아무튼 홍삼차를 마시고 기운이 나는지 교황의 표정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태자. 그런데 교회 문제는···."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조선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곳입니다. 그러니 염려 마시고 사제들을 보내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함께하길 바랍니다."
성호를 그으며 감사를 표한 뒤에도 교황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연이 다시 따라준 홍삼차를 마시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열다 닫았다.